<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7. 욜로 라이프 시작!
공국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카리엘은 곧장 분쟁 지역으로 떠났다.
누가 잡을세라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명분은 아직 불안한 분쟁 지역을 살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현재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제국과 탈로스와의 접경지역이 아닌 휴양지로 떠났다는 것에서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이번에야말로 진짜 은퇴하는 거니까.”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황태자를 은퇴하고 다 끝날 줄 알았건만 지금까지 개고생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진짜 끝이다.
이런 카리엘의 생각과 달리 타리온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까지 분쟁 지역을 핑계로 머물러 계실 수는 없을 겁니다.”
“알아. 상황이 정리되면 내 영지로 가야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가 되면 큼지막한 일은 전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본격적으로 동생들의 황태자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니 자신에게 신경 쓸 틈도 없을 것이다.
“분쟁 지역에 있는 소국 연합까진 끝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동부 사령관이 알아서 하겠지. 여차하면 남부 사령관이 나서도 되는 일이고.”
공국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서 아켈리오는 중앙군을 이끌고 복귀할 각을 잡고 있었고, 대공가의 기사단 역시 서부군과 함께 서부 지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로 인해 벌어졌던 일들도 마무리되어 가는 것이다.
남은 건 제국 내에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반란과 흑마법사들 잔당의 소탕뿐이다.
하지만 그건 대규모로 벌어졌던 일에 비하면 소소한 일일 뿐이다.
거기다 소국들이 연합군을 결성해 봤자 서대륙의 강국 하나도 상대하기 어려울 터.
하물며 강국이 그러할진대 제국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일은 없을 거야.”
“음…….”
타리온이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성을 내뱉었다.
확실히 제국에는 인재가 많다. 카리엘 하나 없다고 제국에 문제가 생길 리는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꾸만 불안감이 들었다.
‘저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되어야 할 텐데…….’
타리온은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면서 휴양지에서 뭘 할지 기대되는 표정으로 계획을 세우는 카리엘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전부 끝났다는 생각 때문일까?
고된 일정 속에서도 환하게 웃으며 가는 카리엘.
예전이었다면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겠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풍경도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상인들과 얘기도 나누고 물건까지 사 주었다.
‘여유가 생기셨구나.’
매일같이 귀찮은 표정이 역력하던 카리엘의 얼굴에선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 *
“오오오!”
혹시나 자신을 잡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공국의 수도에서 빠르게 멀어졌기 때문인지, 목적지였던 휴양지까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서대륙에서도 유명한 휴양지답게 아름다운 바다를 배경으로 멋들어진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마공학과 고풍스러운 건축학이 절묘하게 이루어진 건물들 사이에서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심겨 있는 모습은 남부에서 보았던 풍경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확실히 이름값을 하긴 하네요.”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별장으로 향하는 카리엘.
그런 그를, 황궁 기사들과 시종들 역시 웃으면서 뒤따랐다.
평소 별다른 터치가 없던 카리엘이기에, 자신들 역시 이 휴양지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리엘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향했다.
해수욕장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바꾼 기사들과 함께 다니면서 휴양지를 구경했다.
첫째 날엔 해수욕장을, 둘째 날부터는 도시를 구경한 카리엘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인근 지역까지 돌아다니면서 구경했다.
“질리시지 않습니까?”
“질려? 글쎄…….”
질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생엔 전쟁 때문에 제대로 쉬어 보지 못했고, 지구에서도 여행을 갈 시간이 없었다.
집이 잘살지 못한 터라 뼈 빠지게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건 어때? 미혼인 이들 한정으로 가장 먼저 여자 친구를 만나는 사람에게 이 돈을 걸지.”
카리엘의 말에 황궁 기사들과 시종들의 눈이 번뜩였다.
황궁 기사들은 물론이고, 카리엘의 시종들 역시 그림자 출신이라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다들 자신 있어?”
“예!”
“좋아. 출발해.”
카리엘의 명령에 신나서 출발하는 부하들.
그런 그들을 보며 타리온이 한숨을 쉬었다.
“저하도 혼인은 하시지 않았잖습니까.”
“나야 어차피 정략혼일 테니까. 구경이라도 해야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는 타리온은?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뭐 했어?”
“했었습니다.”
“했었다고?”
카리엘의 물음에 타리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별했습니다.”
“아…… 그럼 자식은?”
타리온이 작게 고개를 젓자 잠시 입을 다문 카리엘이 조심스레 말했다.
“재혼도 생각해 봐.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잖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써 웃으면서 말하는 타리온을 보며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리온도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단계에선 물어보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 보면 친위대 녀석들 전부 비밀이 있단 말이야?’
심상치 않은 비밀을 하나씩 품고 있는 친위대원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물었다.
“친위대 녀석들은 뭐 하고 지내려나?”
“저하께서 명하신 걸 수행하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잠시 카리엘을 지키기 위해 수도에서 벗어났던 친위대는 전원 1황자 궁으로 복귀했다.
동시에 카리엘이 명한 것을 수행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도를 벗어나기 전에 카리엘이 명했던 것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명령들이라 친위대원 전원이 바쁜 일과를 보내는 중이었다.
“저한테 부럽다고 연락이 오더군요.”
그렇게 말한 타리온이 미소를 지었다.
여유로운 자신과 달리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토토가 시간 날 때마다 타리온에게 부럽다고 서신을 보내왔던 것이다.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한번 놀러 오라고 해. 그들이 부탁했던 것들도 하나씩 들어줘야지.”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친위대가 간직한 비밀들을 하나씩 털어 가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 결심한 카리엘.
이것도 다 여유가 생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카리엘은 잔뜩 기대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타리온과 시종들은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 * *
그러나 여유 있는 카리엘 일행과는 달리 서대륙 전체는 상당히 혼잡한 상황으로 변해 갔다.
「제국과 공국의 동맹 체결! 이제 다음 단계는 혈맹으로?」
「아이론-제국-공국으로 이어지는 거대 동맹. 남은 국가들은?」
「남부 연합과 성국의 비공식 회담」
「앞으로 서대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제국과 공국의 동맹으로 성국과 남부 연합이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남은 국가들에겐 불리한 상황인데, 거기에 더해 제국이 소국들에 대한 징벌을 시작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최소한의 완충 작용을 하던 국가들이 전부 사라지면 남은 국가들이 심대한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에 남부 연합과 성국에서 강렬히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제국에서 그동안 소국들이 저지른 범죄 증거들을 공개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소국 연합을 치진 못했다.
당장에라도 모든 소국을 쓸어버릴 수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제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의 규모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반란이 한 군데에서만 일어났다면 그나마 수월했지만, 제국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흑마법사들까지 반란에 합류하면서 토벌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소국 연합이 비밀리에 제국의 반란 세력에 물자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저하, 이것을…….”
한창 휴가를 즐기고 있는 카리엘에게 타리온이 다급하게 서신을 전해 주었다.
그림자를 통해 다급히 보낸 검은 봉투에 담긴 서신을 본 카리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 새끼들 봐라…….”
남부 연합이 몰래 소국 연합에 자금을 지원해 주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그림자의 보고.
그것을 이유로 황궁에서는 카리엘이 분쟁 지역에 압박하길 원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실 때가…….”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황궁에 복귀할 수는 없잖아.”
“음…….”
“귀찮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복귀하면 괜한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이야.”
타리온이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카리엘이 억울하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애써 고개를 돌리면서 수긍하는 타리온.
“에휴, 부하조차 날 믿지 못하네.”
“……믿습니다.”
“그게 믿는 얼굴이냐?”
“흠흠!”
헛기침하는 타리온에게 카리엘이 차분히 설명했다.
“잘 들어 봐. 지금 두 황자들에 의해 권력이 양분되기 시작했지?”
“예.”
“그런데 내가 가면? 괜히 의심하는 놈들이 생긴다니까? 이 새끼가 약속을 안 지키고 다시 황태자가 되려는 거 아닌가? 아니면 이참에 황제가 되려는 건가?”
“설마요.”
“있어. 너도 보고 들어서 알잖아.”
“극소수일 뿐입니다.”
“그놈들이 힘 있는 놈들이라는 게 문제지. 그 녀석들이 계속해서 그런 주장을 해 봐. 그럼 뒤따르는 녀석들이 생길걸.”
괜한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차기 황태자가 생기기 전까진 얌전히 이곳에 박혀 있는 게 상책이었다.
하지만 타리온은 카리엘이 너무 걱정을 사서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쯧! 일단 분쟁 지역에 남아 있는 군대부터 모아 봐.”
“직접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타리온. 그런 그를 카리엘이 미소를 띤 얼굴로 보며 말했다.
“너무 쉬기만 하는 것도 안 좋아. 가끔은 소일거리 같은 것도 해 줘야 휴식의 참맛을 느낄 수 있지.”
그리고 분쟁 지역에 있는 병력들의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짧게 설명할게. 지금부터 우린 탈로스를 압박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탈로스의 물음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이야 충분하지. 아직도 소국 연합이 분쟁 지역에 군대를 남겨 두었잖아.”
“탈로스에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아직 분쟁 지역에 대한 협상은 시작도 안 했는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아이사르만을 공국과 제국 탈로스가 나눠 갖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탈로스가 계속해서 협상일을 미루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분쟁 지역이었다.
사실상 영토가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는 분쟁 지역이기 때문에 소국 연합 역시 이 분쟁 지역에 한 발 담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소국 연합이 공국의 위기 시에 마적들의 뒤를 봐줬다는 정황증거도 있는 바.
제국이 소국 연합을 치기에 명분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 마침 그들이 탈로스가 있는 분쟁 지역에 있는 것이다.
“우린 소국 연합을 치러 가는 거야. 알지?”
“예!”
“좋아. 시작해.”
명령을 내린 카리엘이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서 에메랄드빛 바다의 풍경을 감상했다.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럼~! 군대를 이끄는 건 지휘관들의 몫일 뿐. 내가 나서야 하는 순간은 저들이 협상하기 위해 항의 서한과 함께 사신을 보냈을 때뿐이야.”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여유롭게 과일주스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