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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77화 (77/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6. 공국과의 거래 (2)

공왕과의 조율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일단 카리엘이 공왕을 크게 압박하지 않았다는 점이 컸고, 동맹을 맺기 위해 도움에 대한 대가 역시 많은 것을 바라지 않은 것도 있었다.

오히려 공왕이 당황하면서 자신이 더 내주기도 했다.

문제는 마지막 안건이었다.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리하고자 하오.”

카리엘의 말에 단번에 알아들은 공왕은 침묵했다.

섣부르게 답할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정리하시려는 것이오?”

“분쟁 지역에 모인 국가들은 전부 정리할 생각이오.”

“으음…….”

“더불어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었음에도 제국에 협조하지 않은 국가 역시 정리 대상이오.”

분쟁 지역에 있는 연합군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흑마법사와 연관이 있다면 모두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

카리엘의 단호함이 깃든 음성에 공왕이 입을 다물고 장고에 빠졌다.

서대륙에는 무늬만 국가인 아주 작은 소국들이 있었다.

연합군을 결성한 국가들은 그래도 제국의 웬만한 영지보다는 큰 영토를 갖고 있지만, 그보다도 못한 국가들이 존재했다.

강국들 사이에 끼어서 통관으로 먹고사는 국가

범죄 집단들에 영토를 내준 국가.

도박이나 유흥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국가.

사실 이들이 꼭 잘못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나름대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역시 제국의 이권을 갉아먹는 벌레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땅히 다른 국가들처럼 와서 조아려야 할 터.

하지만 카리엘이 다른 강국을 때려잡을 때 눈치만 보고 있었고, 지금도 상황이 돌아가는 것만 지켜보면서 어떻게든 배상금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사실 제국이 배상금을 제대로 요구했다면 곧바로 파산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와서 빌었다면 사정을 봐주었을 터였다.

‘골든 타임은 끝났어.’

이들이 용서받을 시간은 끝났다.

마음 같아서는 완전히 멸문시켜 버리고 제국의 황실 직할령으로 삼고 싶었지만, 그 부분은 이미 카리엘의 손을 떠난 영역이다.

카리엘은 공왕과의 거래로 밑그림을 그려 주는 것으로 완전한 은퇴를 이룰 생각이었다.

“대규모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시오?”

“그것까지는 모르겠소. 이 거래에서 할 일은 공국과의 굳건한 동맹 그것 하나뿐이니 그 이후의 일은 폐하와 제국이 결정하지 않겠소?”

완전히 은퇴하고자 하는 카리엘의 의지를 느낀 공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이와 공녀를 혼인시키는 게 제일 좋긴 했다.

권력 욕심이 없고, 공녀를 상대로 나쁘지 않은 신분과 힘,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녀가 호감을 보이는 사내였다.

문제는 모든 것이 지겹고 귀찮은 듯한 저 권태로운 눈빛이 공녀의 결혼 생활이 굉장히 고될 것으로 예상되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할 것 같군.’

공왕이 그렇게 생각하며 카리엘과의 혼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말로 공녀를 제국에 보내 볼까?’

카리엘의 눈빛을 볼수록 귀찮음이 묻어 나오는 얼굴로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으름을 이겨 낼 정도로 재능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공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리엘의 제안을 논의해 보겠다는 말만 남기고 비공식 회담을 끝냈다.

하지만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공국 또한 소국들로 인해 피해를 많이 입었다 보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국가들의 접경지역을 돌아다니며 단속을 피하는 마적 떼.

소국의 영토를 근거지 삼아 돌아다니는 범죄 집단과 해적들.

모두가 타국의 영토를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제국이 이것을 정리해 준다면?

공국 입장에서도 피해를 현격히 줄일 수 있게 된다.

다만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서대륙에 주요 국가들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름 완충작용을 하던 국가들이 사라졌으니 본격적으로 강국들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보다 훨씬 긴장되는 상황이 펼쳐진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현재의 제국을 보면 필시 나중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국의 미래 역시 그리 밝지는 않았다.

‘어차피 다가올 미래라면 우리가 먼저 선택하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왕은 공국의 주요 귀족들을 불러 모아 비밀 회담의 내용을 설명했다.

워낙 사안이 엄중한지라 귀족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리고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서는 귀족들도 받아들였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 * *

자정이 될 무렵,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화려한 연회보다는 조촐한 게 낫다는 공왕의 의견에 개최된 연회.

귀족들은 불만이었지만 기사들이나 다른 이들은 오히려 이런 연회였기에 더 편안해 보였다.

“좋네.”

카리엘 역시 이런 조촐한 연회가 더 마음에 든다는 듯 웃으면서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연회였다면 고위 귀족들만의 놀이터가 되었겠지만, 조촐한 연회를 열면서 공국의 왕궁을 개방했기에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시끌벅적한 연회가 만들어지면서 정감이 가는 공간이 되었다.

“저하를 뵈어요.”

“반갑소.”

자신에게 다가온 공녀를 보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

그런 그를 향해 공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께 저하께서 하신 얘기를 들었어요.”

공녀가 그렇게 말하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럴 리가. 공녀를 마다할 남자가 있겠소?”

공녀의 물음에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왕의 딸답지 않게 어릴 적부터 상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상재에 두각을 드러냈고, 지금은 공국의 유명한 상단을 이끌고 있는 중이다.

거기다 얼굴 역시 충분히 아름다웠다. 몸매 역시……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음.”

카리엘이 잠시 헛기침하면 공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공왕의 말이 사실인 것 같은 표정.

볼은 붉어져 있었고,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다.

이것이 연기라면 속을 수밖에 없으리라.

“선택지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오.”

“……선택지요?”

“그렇소. 혈맹이라고는 하나 강제로 이루어진 혼약이오. 공녀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터. 그러니 적어도 세 황자들 중에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공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시라는 거죠?”

“물론이오.”

카리엘의 대답에 공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자신감이 생겼는지, 이때부터 공국에 대해 이야기해 주거나 제국에 대해 묻기도 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실 제국이 궁금하긴 했어요.”

“그렇소?”

“네. 태자 전…… 아니 저하께서 본격적으로 움직이신 후로 제국이 많이 변했다고 들었거든요. 대륙 회의로 방문했을 때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긴 했는데, 손님이다 보니 접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었어요.”

“흠…….”

공녀의 말에 카리엘이 턱을 문지르면서 생각에 빠졌다.

전생의 경험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공녀의 말대로 제국이 많이 바뀌긴 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여전히 귀족들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했기 때문이다.

전생에 제국이 박살 나면서 한 가지 크게 변화한 점이 있었으니 바로 황권의 강화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국민들의 신분 상승이라는 변화가 따라왔다.

‘제국이 위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털면서 생긴 자금, 그리고 그들만의 기술 등을 풀었다.

수많은 사건들로 약화된 제국의 힘을 단기간에 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행했던 정책들.

각 가문에서 전해져 오는 마법, 검술, 기술 등을 아카데미에 풀고 모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았다.

거기다 더해 기초 아카데미까지 신설시켰다.

처음엔 반대했던 귀족들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지 결국 어느 정도 선까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미래는 지금은 힘들어질 것이다.

“……아쉽긴 하네.”

“네?”

“아니요.”

공녀의 물음에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방법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조금씩 제국민들의 신분을 상승시키고 제국을 부강하게 할 방법들.

판은 만들어졌으니 조금만 손봐도 지금보다 더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업 체계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으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마법이라는 한계에 막혀 있어서 그렇지, 그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도 지구의 산업 시대처럼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흐음~.”

흥미롭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공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오?”

“아니에요.”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한 권태로운 눈에서 한 번씩 번뜩이는 눈빛.

그 모습에 공녀의 마음은 설렜다.

‘다른 황자님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공녀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동생들이 얼마나 천재인지 자랑하면서 소개해 주려고 안달 난 사람처럼 구는 1황자였지만 제국에 가서 두 황자들을 본다 해도 이 마음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황자님 말씀대로 한번 가서 확인해 볼게요.”

공녀의 말에 진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리엘.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공국의 귀족들은 웃으면서 은근슬쩍 지켜보았다.

서로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서로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나 공국의 국민들 역시 이 모습을 보며 하나같이 흐뭇하게 웃었다.

카리엘과 공녀가 이 연회의 주인공이라는 듯 함께 사라지자 연회에 모인 모든 이들의 대화가 둘의 혼인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런 이들의 기대감과 달리 며칠 후, 카리엘이 공녀과 제국의 수도로 향할 것이라는 발표가 나왔다.

「아일라 공녀! 제국의 황자들을 보기 위해 제국의 수도로!」

「공녀에게 황자들을 선택할 권한을 준 제국!」

「대륙에서 제일 부러운 여인은 누구? 바로 아일라 공녀!」

애지중지 키운 공왕을 배려해 공녀에게 황자들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끔 한 것에 공국의 국민들 모두가 좋아했다.

공국을 배려하는 제국의 모습에 호감도는 더욱 올라갔다.

그러자 황자들 중 하나가 공왕이 되어 사실상 제국의 속국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쏙 들어갔다.

설령 속국이 된다 한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공국에서 제국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카리엘은 마지막 협정문에 도장을 쿵 찍은 후, 공왕과의 협상을 끝냈다.

“2차 협정은 제국의 수도에서 이루어질 것이오.”

카리엘의 말에 공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분쟁 지역으로 가실 생각이오?”

“그렇소.”

공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냈기에 공왕이 개인적으로 선물한 별장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의 영지야 황궁에서 관리할 터이니, 이대로 별장으로 내려간다 한들 상관없었다.

제국에서 보내온 돈도 있었고, 공국에서 카리엘에게 선물삼아 준 돈 역시 상당했기에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부럽소.”

“공왕께서도 빨리 공녀에게 넘기고 쉬시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공왕도 그러고 싶었지만 공녀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상인으로선 어느 정도 믿어 줄 만했지만 정계를 이끌어 갈 힘이 많이 달렸다.

그에 반해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이미 완성형이라 평가받은 카리엘이기에 제국에서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욕심이 나는 듯 카리엘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공왕.

“흠흠! 그럼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소.”

“쯧! 그럽시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공왕.

하지만 카리엘이 공왕이 될 그림은 안 나왔다.

황태자 자리를 차고 나왔는데 공왕의 자리가 눈에 들어오겠나?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될 수 있는데 공왕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즐거운 휴식이 되길 바라겠소.”

공왕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휴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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