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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76화 (76/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6. 공국과의 거래

공국을 당장에라도 집어삼킬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카리엘은 언데드 군단만 박살 낼 뿐 공국의 요새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서부, 남부군을 이용해 남부 왕국들을 견제하고, 북부군을 통해 성국을 견제하게끔 했다.

카리엘이 정말로 약속을 지키자 공국에 카리엘을 지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다른 국가와 달리 제국은 믿을 만한 국가라는 인식이 공국 안에서 퍼져 나가자, 몇몇 귀족들은 공녀와 혼인하여 공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카리엘이 공녀와 결혼하면 공왕이 될 수 있을 테니 후에 제국에 편입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멸망을 걱정했던 공국 입장에선 타국의 접근을 막아 준 제국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믿냐? 삼국 중 가장 많은 군대를 몰고 왔는데? 이 사람들아, 생각을 좀 해 봐!”

“저 새끼, 탈로스의 첩자 아녀?”

“맞구먼! 저놈 저거! 탈로스와 교역하면서 돈 좀 벌었다더니!”

“공국을 구해 준 귀한 분한테 뭐? 이놈! 죽일 놈이구먼!”

상인 출신의 준귀족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공국의 사람들한테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마스터와 기사단이 로만의 공격과 흑마법사들의 공격으로부터 철벽을 지켜 냈다는 소식이 돌자 귀족들의 주장은 순식간에 힘을 잃어버렸다.

“……공국의 영웅이 되어 버렸군.”

공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지근거리에서 호종하던 기사들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 역시 카리엘의 영웅 만들기에 한 손 거들었기 때문이다.

“후…… 그래도 뜯어먹힐 처지는 면했으니 좋은 것인가?”

제국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변수가 남았지만, 일단 위기 하나는 넘겼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공국의 사람들도 그것을 알기에 부상을 입고 고된 노동을 하는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제국이 공국을 방어하자 성국과 탈로스도 섣부르게 진입하지 못했다.

명분 자체가 공국을 지키기 위함이었고, 설사 그것을 무시하고 진입하려 해도 제국과 공국의 저항을 뚫어야만 하는 탓이다.

그런 상황에서 로만의 침공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우린 돌아간다.”

탈로스를 지휘하는 클레타 공작이 철군을 지시했다.

이대로 제국이 분쟁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끔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공국의 주요 지역만을 남겨 두고 분쟁 지역을 점령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황급히 돌아가야 했다.

반면에 성국은 영리하게 행동했다.

“성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공국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다수의 사제들이 요새 안으로 진입했다.

어떠한 비용도 받지 않고 치료하는 사제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혀를 찼다.

본래 사제의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으려면 엄청난 비용을 내야 했다.

돈 없는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비용을 내야 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만든 포션 역시 굉장히 비쌌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들 치료받고 있음에도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은 살갑게 굴면서 공국의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대륙의 평화를 지킨 공국에게는 어떠한 비용도 받을 수 없다며 무상으로 치료를 계속하자, 싸늘하기만 한 공국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여우답네.”

카리엘이 교황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성기사들을 제외하고 오직 사제들만 요새 안으로 들여보냈을 뿐만 아니라, 교황 본인 역시 공국의 외곽 지역을 돌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제국에서는 먹히지 않았던 작전을 다시금 사용하는 것이다.

단순히 회복만 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갖고 온 군량을 이용해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 주기가지 했다.

전쟁에 지치고 다친 사람들은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치유해 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에게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법.

아무리 제국군이 큰 활약을 했더라도, 일반 공국민들 입장에선 성국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국의 위상을 회복하려는 겁니까?”

수도에서 명령했던 일을 처리하고 카리엘의 옆자리로 복귀한 타리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럴 거야. 지금 당장은 성국이 막대한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위상만 회복한다면 잃은 돈이야 금방 복구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겁니까?”

“상관없어. 오히려 너무 적극적으로 막으면 성국이 남부와 손잡을 수도 있어. 그럴 바에야 살길 정도는 열어 두는 것이 더 편해.”

그렇게 답한 카리엘이 타리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날 호위할 친위대와 황궁 기사단만 추려 놔.”

“공국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여론 몰이가 끝났으니 끝을 보러 가야지.”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며 사라지는 타리온.

타리온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카리엘은 제국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도 기웃거리는 사제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륙 회의에 의해 서대륙 최고의 종교라는 지위를 위협받을 가능성이 생겼다. 공국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만 있다면 이곳을 발판으로 남부까지 다시 손을 뻗어 볼 수 있겠지만 제국이 그것을 모조리 틀어막았다.

카리엘이 공국에서 한 일은 단순히 성국과 탈로스의 개입을 막은 것만이 아니었다.

상단을 통해 공국의 상계를 집어삼키려는 탈로스와 사제들을 통해 공국 내에서 종교의 위상을 높이려는 성국의 의도 자체를 뭉개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성국이 이렇게 고생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좀 더 고생해라.’

물론 성국에 대한 불신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제국민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짓이다.

그러니 공국이나 다른 국가들이나 공략해야 할 판.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카리엘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성국이 공국의 공략에 시간을 버리는 동안 제국은 다음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몇몇 나라 빼고 다 정리해야겠지.’

대륙 회의에 참석했던 강국들인 서부의 아이론, 동부의 공국, 남부의 두 왕국, 북부의 성국 정도를 제외한 소국들은 서대륙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소국들이 연합해서 분쟁 지역에서 제국을 도발했으니 명분도 충분했다.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아이론이었다.

동맹을 맺은 상태이니 서쪽만큼은 안전할 터. 그렇다는 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더 많아진다는 뜻인데, 만약 공국과도 동맹이 성사된다면 성국와 두 왕국만 남게 된다.

그러면 이들을 세 명의 마스터가 포함된 전력으로 견제하고 남은 병력으로 소국 연합을 쓸어버리면 된다.

변경백들이 이끄는 주력군을 사용하지 않아도 소국 연합쯤은 충분히 정리해 버릴 수 있을 만큼 제국은 강했다.

“위대한 제국의 시작인가?”

본래 제국의 영토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떨어져 나간 떨거지들.

그 떨거지들을 다시금 제국의 품으로 복속시킬 때가 되었다.

그 시작이 공국과의 동맹이 될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카리엘이 온다는 소식에 요새의 정문에서 맞이한 공왕과 귀족들.

그런 그들의 환대에 카리엘도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반갑소.”

웃으면서 공왕과 악수한 카리엘이 가볍게 담소를 나누면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최소한의 호위만을 대동한 채 들어가는 그 모습에, 카리엘은 공국의 사람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갔다.

어떠한 압박도 없이 공왕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자 공녀가 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한 채 카리엘을 맞이했다.

“공녀 아일라 제국의 1황자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소. 공국 제일의 미녀를 뵙게 되어 영광이오.”

손등에 가볍게 키스를 한 카리엘은 웃으면서 공녀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바로 공왕을 바라보았다.

“파티를 준비하신 것 같은데 일단 큰일부터 처리한 후 진행하시는 게 어떻겠소?”

“좋습니다.”

서로 찝찝한 기분으로 있지 말고 큼지막한 일부터 처리하자는 말에 근방에 있는 귀족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공왕과 일대일 대담을 나누고 싶소.”

다소 무례할 수 있는 요구였으나 지금의 카리엘은 일반적인 1황자의 신분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전권을 위임받은 이였기에 공왕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테이블이 마련되고 자리에 앉자마자 간단한 티 세트가 마련되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고 사람들이 물러나자 카리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굳이 혼인 동맹을 하지 않아도 되오.”

카리엘의 말에 공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왕의 딸 사랑은 대륙에서 알아줄 정도라고 알고 있소. 무엇보다 공국이 제국에 먹힐 거라 걱정하는 이들도 있는 만큼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소.”

“……후에 타국에서 제국에게 항의할 것이오.”

“제국이 걱정되시오?”

카리엘의 물음에 공왕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공국이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공왕은 이렇게까지 도와준 제국이 욕먹는 것은 내키지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제국이 원하는 것은 강력한 동맹이오.”

“아이론 연맹과 맺는 것보다 강력한 동맹을 원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공국과 제국의 굳건한 동맹을 증명하는 건 현 분쟁 지역이 될 것이오.”

아이사르만을 평화롭게 나눠 갖는 것.

공국의 주요 지역을 건드리지 않고, 제국 역시 아이사르만 일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서로가 만족할 만한 거래가 될 것이다.

당연히 탈로스가 반발할 수 있겠으나, 그들에게도 제국이 점령한 지역 일부를 내주면서 분쟁을 끝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 분쟁 지역에 모여 있는 소국 연합을 친다는 명분으로 압박하면 될 일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판을 짜신 것이오?”

공왕의 물음에 카리엘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쉰 공왕은 카리엘에게 말했다.

“사실 공국 입장에선 그대와 공녀의 혼인이 나쁘지만은 않소.”

“음…….”

“무엇보다 공녀가 그대를 좋아하고 있소.”

공왕의 말에 카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라고…… 하셨소?”

“공녀가 그대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소.”

“……확실하오? 동생들과 착각한 것 아니오?”

재차 묻는 카리엘을 보며 공왕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엇보다 공국 입장에서도 혈맹을 하는 편이 좋소.”

공왕의 대답에 카리엘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공녀와 혼인한다 → 차기 공왕이 된다. → 제국과 공국의 정치 싸움에 빠져든다.

여기까지만 하더라고 골치 아픈데 만약 카리엘을 지지하는 이들이 다시금 황태자로 복권시키자고 한다면?

‘미치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카리엘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공녀를 제국에 유학 보내실 생각은 없소?”

“볼모로 잡고자 하시오?”

공왕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공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직 내 동생들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소. 혈맹을 원하신다면 공녀께 폭넓게 황자들을 모두 만나 본 뒤에 선택권을 드리고자 하오.”

카리엘이 웃으면서 말하자 공왕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굳이 급하게 혈맹을 맺을 필요가 있소?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진행하는 게 좋지 않겠소?”

“음…….”

카리엘이 어째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공왕.

황태자 자리에서 겨우 물러나 잠적하려는 카리엘을 제국의 대신들이 끄집어내 총사령관까지 맡긴 것이다.

그만큼 권력을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대놓고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평화와 안정이오.”

“……귀족들과 상의해 보겠소.”

“좋소. 가장 어려운 문제를 풀었으니 이제 술술 풀리겠구려.”

웃으면서 말한 카리엘은 공왕과 남은 문제들 역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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