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5. 눈치 게임! (3)
성국의 주력 병력이 거인의 산맥을 타고 서서히 남진할 준비를 했다.
그럼 제국군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마수를 온전히 제압했다고 가정했을 시, 북동부에 병력을 모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럼 이 병력을 본래 있던 자리로 회군시키고 다시 명령을 내려야 할까?
그건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병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방법이 없을까?
해답은 간단했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사람에게 군을 이끌게 하면 되는 것.
대전 회의에서 만장일치를 얻어 낸 한 명의 인물에게 총사령관을 임명하고 해결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당사자가 그것을 받아들이겠냐는 것이다.
「특별군 총사령관 임명장」
시카리오 후작의 손에 들린 한 장의 임명장.
그것은 바로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를 특별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는 증서였다.
제국 동부와 공국의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만 유지되는 한시적인 직위.
문제는 그 규모가 변경백과 3군의 정예 병력이 모인 엄청난 군대라는 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걱정하여 한 사람에게 이런 병력을 지휘할 권한을 주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하께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시카리오 후작이 한숨을 쉬었다.
반란? 아니면 군권을 장악할 위험?
제국의 변경백이자 중립파의 거두인 시카리오 후작조차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저 카리엘에게 어떻게 이걸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 낼지만 걱정하고 있었다.
쿠구궁!
“음…….”
때마침 불의 요람이 흔들거리면서 파장이 좀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화산에서의 경험을 기억해 낸 시카리오 후작은 카리엘이 불의 요람 안에서 나올 때가 다 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치겠군.”
항상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후작의 얼굴에 불안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시카리오 후작의 눈동자가 떨려 올수록 불의 요람의 흔들림 역시 커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요동치는 불의 요람이 마침내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폭발할 것 같자 다급하게 시카리오 후작은 병력을 뒤로 물렸다.
퐁!
“응?”
시카리오 후작의 멍청한 소리와 함께 불의 요람을 이루던 불꽃들이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귀여운 소리와 함께 불꽃 축제라도 벌어진 것처럼 불의 요람이 하늘로 솟아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저하!”
비틀거리는 카리엘을 부축하기 위해 시카리오 후작이 황급히 다가갔다.
“후…….”
“이게…… 마수입니까?”
“맞소.”
시카리오 후작이 강아지 같은 작은 늑대를 보면서 묻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번처럼 사라지진 않았군요.”
“아무래도 육체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작은 늑대를 바라보았다.
귀엽기만 한 새끼 늑대였지만 본래는 라그나로크의 주역 중 하나의 자식이자 태양을 삼켰다는 전설이 있는 늑대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까?”
“안에 있는 영혼이 완전히 잠들었기에 가능했소.”
높은 격을 갖고 있던 영혼의 조각.
소멸이 예정된 그 조각을 수르트의 도움으로 보호하고, 정령왕의 파편이 힘을 불어 넣어 소멸만큼은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덕분에 폭주하던 영혼이 안정을 되찾으며 정순함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폭주를 통해 부풀려진 영혼의 크기가 작아져 버렸는데, 육체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거품이 꺼진 것과 비슷하군요.”
“맞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다가 시카리오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낑낑거리는 느낌.
냉철한 시카리오 후작의 모습에선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표정이라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시오?”
“그것이…….”
“혹, 나에 관한 것이오?”
눈치 빠른 카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묻자 시카리오 후작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면서 품속에서 서신을 꺼냈다.
서신을 받아 읽은 카리엘은 곧바로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분노가 뚝뚝 묻어 나오는 음성에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흠칫하면서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다.
“동부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시카리오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까마귀들이 보내온 동부 소식이 담긴 보고서를 카리엘에게 보여 주었다.
공국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동부의 상황을 간략하게 정리한 보고서를 차분히 들여다본 카리엘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후작이 하면 될 것 아니오?”
“소신은 북부 변경백만으로도 버겁습니다.”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이 살짝 째려봤다.
그러자 시선을 피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시카리오 후작.
“3황자도 있을 텐데?”
“수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하옵니다.”
“수상한 움직임?”
“예, 아무래도 벨푸르스가 제국 안으로 잠입한 것 같습니다.”
시카리오 후작의 보고에 카리엘이 인상을 찡그렸다.
“서부의 해적들이 들어온 것이오?”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서부 바다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후작의 보고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법사와 연관된 것이오?”
“그런 듯싶습니다. 동부의 언데드 군단의 발생지가 벨푸르스의 영향력에 있었던 영지인 것이 의심되어 다른 영지들도 살펴보았는데,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합니다.”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중앙에서 수상하다고 판단될 정도라면 지방에서 난이 일어나는 것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서부의 해적들도 벨푸르스의 잔당이니 동시에 움직일 것을 감안하면 제국 전체를 흔들어 보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벨푸르스를 버리면서까지 흑마법사가 넘어갈 시간을 벌어 보겠다는 건데…….”
어차피 제국을 흔들 수 없게 된 이상 벨푸르스라는 장기짝은 쓸모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전부 드러내 제국을 흔들고 넘어가 볼 생각인 것이다.
거기다 겸사겸사 서대륙의 혼란도 야기해 전체적인 힘을 약화시켜 볼 심산인 것이다.
단번에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전부 파악한 카리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이런 서신을 보낸 건지는 알겠네.”
임명장과 동봉된 작은 서신에는 두 황자들의 구구절절한 변명이 담겨 있었다.
공국과의 혼약은 명분을 만들기 위함이니 마음에 안 들면 나중에 취소해도 된다는 것과, 총사령관직에 앉아만 있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그냥 그 자리에 있어만 달라는 부탁.
정계에서 은퇴한 1황자라는 상징성이 필요한 것이다.
“후작.”
“예, 저하.”
“만약 내가 총사령관에 오른다면 피곤해질 수도 있소.”
카리엘의 경고에도 시카리오 후작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뜻대로 부리십시오.”
시카리오 후작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던 카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중앙에 이 서신을 전해라.”
그는 근처에 있는 그림자에게 급하게 휘갈긴 서신을 전했다.
중앙으로 보낼 것임을 아는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시카리오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거절하시는 것입니까?”
“아니요.”
“그럼…….”
“내 조건을 받아들이면 수락할 생각이오.”
카리엘은 시카리오 후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후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카리엘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동부에 모인 모든 병력을 지휘할 전권. 그것을 달라 할 것이오.”
“허…… 반역이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시카리오 후작이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하자 카리엘이 웃긴다는 듯 피식 웃었다.
“피곤하게 뭐 하러 그러겠소.”
카리엘의 대답에 시카리오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역? 그딴 게 왜 필요한가?
지금 당장 중앙에 가서 다시 황태자가 되겠다고만 해도 지지할 자들이 넘쳐 나는데.
“동부의 일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요.”
“확실하게 말입니까?”
“그렇소.”
무너져 가는 공국을 먹기 위해 성국과 탈로스까지 움직였다.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악화된 상황.
성국이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면, 제국 역시 보다 과감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아켈리오 후작과 대공가 기사단의 파견을 요청했소.”
“설마…….”
“그렇소. 로만을 막는 철벽. 그곳에 대공가의 기사단과 아켈리오 후작을 보내 도움을 줄 것이오. 동시에 내가 이끄는 정예군이 동부군과 함께 언데드 군단을 쓸어버릴 것이오. 겸사겸사 성국과 탈로스도 견제할 수 있을 테지.”
“공국을 완전히 점령하실 생각입니까?”
시카리오 후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선택은 공국이 하게 될 것이오. 다만 우리도 확실하게 얻는 것은 있어야 하니 분쟁 지역을 남부군이 점령하게끔 할 것이오.”
공국의 수도 근방에 성국과 탈로스, 제국군이 모여 있는 동안 제국 남부군이 분쟁 지역을 점령한다.
동시에 아켈리오와 대공가 기사단을 보내 로만을 막는 데 도움을 준다.
‘분쟁 지역을 점령하고 덤으로 공국의 이권 개입에도 우위를 보일 수 있지.’
탈로스와 성국의 마스터들은 시카리오 후작보다 조금 처졌고 병력 역시 제국이 우위에 있으니, 언데드 군단을 처리하는 데도 더 우위에 있을 것이다.
“작전명은 ‘공국의 영웅 되기’요.”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짓자 시카리오 후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홀로 외롭게 싸우는 공국의 마스터를 돕고, 공국을 괴롭히는 타국들을 지켜 주는 제국군. 어떠시오?”
“음…… 그럴 거라면 확실하게 분쟁 지역도 점령하지 않는 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해야 공국도 마음이 편할 것이오. 대신 분쟁 지역도 공국의 주요 지역은 남겨 두고 점령할 것이오.”
압도적인 전력으로 공국을 점령할 수 있음에도 돕기만 하는 제국군.
명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쟁 지역 일부를 점령하기는 하지만 공국에서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만 점령해 준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제국이야 아이사르만 어디든 좋지만 공국 입장에선 필요 없는 지역이 존재했다.
그곳만 냉큼 먹고 공국의 영토를 탈로스로부터 지켜 준다면?
“공국 입장에선 제국이 나쁘게만 보이진 않겠군요.”
“제국군은 로만이 서대륙에 진입하는 걸 두고 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필요하오.”
카리엘의 말에 시카리오 후작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도 그럴듯하게 보여 주는 편이 좋다.
정치가들을 제외한 다른 공국의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좋아진다면 상대적으로 성국과 탈로스의 이미지는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총사령관이 되겠지만 군권은 건들지 않을 생각이오. 동부에 도착하면 각 지휘관들에게 자율권을 부여할 것이니 부담 없이 움직이시오.”
“음…… 그래도 중요한 부분은 직접 관리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 일은 큰 틀만 짜는 것. 아마 중앙에서도 그걸 바랄 것이오.”
여전히 카리엘의 신념은 확고했다.
각자 잘하는 걸 하는 것.
어설픈 지식으로 설치는 것만큼 최악은 없었다.
“일단 동부로 움직입시다.”
“허허…… 중앙마저 압박하실 생각입니까? 그리 안 해도 승인할 겁니다.”
“경고이기도 하오.”
카리엘의 말에 시카리오 후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딱 여기까지만 할 것이라는 카리엘의 경고.
이 이상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면 각오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총사령관직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음에도 군을 움직여 동부로 이동하는 이유는 여차하면 중앙으로 쳐들어가 황궁을 박살 낼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흠흠! 모두 얼른 움직이거라.”
헛기침하면서 명령하는 시카리오 후작을 보고, 모여 있던 지휘관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공왕과의 독대만 끝나면 곧바로 분쟁 지역으로 가야겠어.”
제국의 요구 조건을 전하고 겸사겸사 별장 하나를 받아 그곳에 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아이사르만의 바다가 그렇게 예쁘다는데…….”
에메랄드 빛깔이 나는 바다는 지구에서도 사진으로만 봤기에 개인적으로 기대되었다.
“휴양지라…….”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휴양지를 영지로 받았지만 그곳에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공국에 들어선 순간 카리엘의 인생에서 제국의 영토를 밟을 날은 손에 꼽을 것이다.
“일이 마무리된다면 미리엘에게도 놀러 오라고 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