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5. 눈치 게임! (2)
거대한 마수를 향해 다가가는 한 청년.
모두가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 묵묵히 걸어간 그 청년이 마수를 감싸는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사방으로 퍼지는 붉은 파장.
화산을 잠재웠을 때와 같은 파장이 퍼지면서 방금 전까지 날뛰던 마수가 불의 장막 안에서 얌전히 청년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절로 경외심이 들 정도의 광경이었다.
일반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평소 그 청년에게 호감이 있던 제국민들은 어떻겠는가?
“전하…….”
“전하!”
이미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를 울부짖는 제국민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있었던 현 황자들을 지지하는 세력과 데릭을 황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격렬한 싸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싸웠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모두가 ‘카리엘 전하’를 외쳤다.
한 귀족이 이젠 ‘전하’가 아닌 ‘저하’라고 말했다가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기에 누구도 카리엘 전하라고 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도 참지 못하겠는지 몇몇 귀족들이 나섰다.
“전하가 아니라 저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오!”
그러자 한 남자가 불쑥 물었다.
“야, 너 어느 파벌이냐?”
앞으로 나섰던 한 귀족이 우물쭈물했다.
“2황자 파? 3황자 파? 아니면 저 새끼 파벌이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물어보는 남자의 질문에 다른 이들도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새끼, 분위기 파악을 못 하네. 지금 호칭이 중요해?”
“쯧! 어떤 가문 자식이야?”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같은 귀족들에게도 손가락질받는 처지가 된 젊은 귀족.
2황자를 따르는 세력의 한 젊은 귀족이 이대로 카리엘이 다시금 황태자가 될까 봐 불안함에 나서 보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3황자를 미는 젊은 귀족들도 분개하며 나서려다 슬그머니 들어갔다.
2황자나 3황자나 훌륭한 황자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제국의 영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황태자가 되겠다고 하면 지지해 줄 사람들이 넘쳐 났지만 카리엘 본인이 태자 자리를 원치 않았기에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지지하는 사람이 권력에서 멀어지고자 하니 더 애가 탔다.
그러던 차에 오랜만에 전 황태자가 영웅적 행보를 보여 감동하며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옆에서 초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
회색 로브를 쓴 남자가 이 장면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그는 2황자 파와 3황자 파 세력으로 보이는 젊은 귀족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몰매 맞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이미 이들의 머릿속에서 ‘데릭’이라는 이름은 잊힌 지 오래였다.
오로지 광적으로 황태자만을 연호하는 제국민을 보면서 남자는 혀를 찼다.
“……역시 그자가 문제군.”
“실패입니까?”
회색 로브를 쓴 남자의 말에 데릭이라 불리는 남자가 로브를 쓴 채 조용히 말했다.
“그래. 1황자가 있는 한 수도에서 뭔가를 더 하는 건 어렵겠어.”
동부에 혼란을 야기하고 수도로 올라온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문란한 황제의 과거를 들춰서 사생아 이슈를 만들었으나 전 황태자의 활약 한 번에 계획 자체가 망가졌다.
“아직 좀 더 밀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데릭의 말에 회색 로브를 쓴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들여서 다시금 사람들을 모으고 황가 입적을 요구한다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상을 논할 수 없게 된다.
1황자의 활약으로 과거 그가 수도에서 했던 일들이 다시금 회자될 것이고, 그럴수록 2황자와 3황자의 기반만 더 탄탄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황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약아빠진 황제가 기회를 잡았다. 사실상 우리의 계획은 끝난 것이야.”
현 황제는 자신이 불리할 때는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파벌 싸움을 유도하려 하는 전형적인 암군.
하지만 기회를 잡았을 때는 다르다.
지독할 정도로 몰아붙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물러서면서 자비를 베푸는 척 연기한다.
“1황자를 통해 우리를 몰아낼 기회를 잡았으니 직접 나설 것이다.”
“수도에서 물러나야 합니까?”
“……아니. 나와 함께 여기에 남는다.”
회색 로브를 쓴 남자의 말에 데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벨푸르스도 전부 남는 겁니까?”
“그래. 대계를 이어 갈 씨앗이 넘어갈 수 있도록 우리가 시선을 끈다.”
“……대모님도 찬성하신 것입니까?”
“그래. 어머님도 나와 같이 이곳에서 뼈를 묻기로 결정했다.”
남자의 말에 데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데릭의 대답에 회색 로브를 쓴 남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목숨 따윈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다만 대계가 실패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었음에도 고작해야 시간을 버는 역할밖에 못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아쉬워 마라, 대계는 이어질 것이니…….”
“예, 한데 실행은 언제 하는 겁니까?”
데릭의 물음에 회색 로브를 쓴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제가 움직인 순간.”
“……준비하겠습니다.”
데릭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자 회색 로브를 쓴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많이 살아 나가야 할 텐데…….”
자신은 고작 시간을 끄는 역할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북동부에 있을 또 다른 친우 역시 마찬가지일 터.
“……아쉽군.”
본래 대계를 위해 실행되어야 할 모든 작전들이 고작 동료들을 동대륙으로 도망치게끔 시간을 버는 데에만 사용되게 생겼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것이라면 시간만큼은 확실히 벌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서대륙에서 일어나는 동시다발적인 혼란은 각국에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둔 욕망을 드러나게 해 줄 것이다.
그러면 동대륙에서 동료들이 다시금 세력을 만들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어디 한번 이것도 막아 보시게.”
영상구 속에서 북동부에서 마수를 길들이고 있는 1황자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 남자는 조용히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렇게 흑마법사의 계획 중 하나가 카리엘의 활약으로 박살 났다. 하지만 제국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일이 터졌다.
동부의 상황이 악화되어 가자 제국의 근방에 있는 국가들이 아예 연합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중립 국가 연합체가 만들어지다!」
제국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단체.
그러자 분쟁 지역 근처에 자리 잡은 연합군이 조금씩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제국과 대화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했던 연합군이 서대륙이 혼란에 빠지자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발단이 된 것은 성국이었다.
“성국이 공국의 일에 간섭하려 한다고?”
“그래.”
3황자의 물음에 2황자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러자 까마귀를 통해 보고받은 3황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궁 최하층에 흑마법사들의 연구실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은 게 고작 어제였다.
그런데 성국은 곧바로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며 거인의 산맥 전체를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공국의 영토에 있는 산맥들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켜 버렸다.
예전이었다면 공국이 성국에 항의하며 저항했겠으나, 현재의 공국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미치겠군.”
“형님은 아직도?”
“어.”
두 황자가 한숨을 쉬면서 잠시 침묵하다가, 모든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데 악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탈로스도 움직인다고?”
3황자의 말에 보고하던 그림자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대전 회의를 진행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들려온 보고에 대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성국이 움직였는데 탈로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지요.”
외무대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망가진 공국에 발을 들이민 성국이기에, 탈로스도 가만있지 않고 움직인 것이다.
공국의 힘이 약해진 것을 증명하듯, 서대륙 동부에 있는 마적이나 산적, 해적이 모조리 공국 근방에 몰려들어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국이 움직였으니, 탈로스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제국을 견제하려 했다면 어려웠겠으나 성국이 움직여 줬으니 탈로스도 충분히 움직일 만했다.
“누가 더 많이 공국을 돕느냐의 싸움인가?”
외무대신의 중얼거림에 다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국이 공국을 돕고 있는 상황에서 성국과 탈로스도 움직였다.
흑마법사들을 무사히 막아 내고 로만을 밀어낸다고 하더라도 공국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전쟁이 끝나고 혼란이 진정되면 도와준 국가들에게 그만큼 베푸는 게 당연했다.
제국에는 동부의 바닷길을 열어 줘야 할지도 모르고, 다른 국가들에게 관세장벽을 낮추거나 영토 일부를 떼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국토 규모는 소국보다 조금 큰 규모일지라도, 공국이 갖고 있는 이권은 웬만한 서대륙의 강국만큼 많았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는 게 어떨까?”
2황자의 말에 3황자가 고민에 빠졌다.
다른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국과 탈로스가 움직였다고 제국도 발맞춰 더 많은 병력을 보낸다면 오히려 공국이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진짜 우리를 먹으려고 하나?’
이런 의심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동부군과 서부군, 남부군이 근방에 깔려 있기에 지원군이 적정선을 넘은 지는 오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막대한 병력으로 공국을 점령하려 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때, 군부대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의 상황에 대응하기엔 현재 모인 병력으로도 충분하옵니다.”
“그렇소?”
“예, 하오니 동부보다는 내정부터 안정을 도모하는 게 어떠실는지요.”
군부대신이 자신의 할 말은 끝났다는 듯 고개를 숙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1황자의 활약상을 보인 것으로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공국에서 아직 답은 없소?”
“예, 하지만 서신이 당도하긴 했을 것입니다.”
3황자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혹시나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해서 준비한 방법.
“형님을 팔아먹게 된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잘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지.”
공국과 혈맹만 된다면야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고민 따윈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
그들이 공국에 전한 서신.
그것은 1황자와 공국의 공녀와 혼인 동맹을 하자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은퇴한 1황자기에 타국의 반발을 줄일 수 있었고, 혈맹이기에 지원군을 파견하는 데에도 제한이 없었다.
공국 입장에서도 카리엘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로 보았기에 만족할 만한 제안이었다.
문제는…….
“하온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외무대신의 물음에 두 황자의 몸이 멈칫하면서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황자들을 본 대신들은 애써 헛기침하면서 눈을 돌렸다.
“……형님께 허락은 받았소.”
“흠흠! 제국의 위기이니 이해하실 것이오.”
두 황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대전 안에 모인 모든 귀족들은 들었다.
덜덜 떨리는 두 황자의 목소리를.
나중에 분노한 카리엘이 황궁에 와서 두 황자를 쥐 잡듯 잡을 것이 예상되었지만 애써 모른 체하면서 황급히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문제는 그 안건 역시 카리엘이 돌아오면 분노할 안건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