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62화 (62/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1. 드디어 은퇴다! (2)

기사의 발검과 함께 꽃가루가 뿌려지고 황태자의 마차가 지나가는 길 위로 폭죽이 터졌다.

개선식이라도 하는 것 같은 화려함.

평소 황태자 궁에서 화려하게 사는 카리엘조차 질릴 정도로 크게 하는 은퇴식.

“이거…… 뭔가 이상한데?”

카리엘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이내 지워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은퇴식이다.

자신의 심장이 지금은 즐겨야 할 때라고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었기에 그는 말없이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에 한해 일시적으로 개방한 황궁의 문.

그 때문인지 수많은 인파가 카리엘이 가는 길을 따라 몰려들었다.

“태자 전하! 아쉽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사람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카리엘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과 최근 1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안다.

그렇기에 그가 얼마나 은퇴하고 싶어 하는지도 잘 알았다.

뛰어난 모습을 보였기에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은퇴를 원하는 게 진심이라는 것 또한 알기에 아쉬워하면서도 카리엘을 놓아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편히 쉬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향해 카리엘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여느 때보다 환하게 웃은 카리엘이 모두의 환호를 받으며 그랜드 홀에 도착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황궁 기사단의 부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군례를 올리는 순간, 그림자들이 황궁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중앙 기사단과 수도 방위 기사단이 일제히 오러를 발현하며 환영해 주었다.

제국의 영웅에게 해 주는 의전을 받으며 그랜드 홀에 들어선 카리엘.

모든 대신들과 고위 귀족들이 모여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손에 꼽는다는 변경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각국의 정상들이 자리했다.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인사들이었다.

“은퇴식을 거행하라!”

황제의 명령과 함께 그랜드 홀에서의 은퇴식이 시작되었다.

붉은 카펫을 따라 걸어간 카리엘이 황제 앞에 도달하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태자는 은퇴함에 있어 조금의 아쉬움도 없는가!”

“그렇습니다.”

카리엘의 단호한 대답에 근방에 있던 귀족들이 아쉬운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서로 상반되는 반응 속에서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황태자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부패한 귀족들을 벌하고, 흑마법사들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점을 높이 사 제국의 최고 훈장인 태양 훈장을 하사하려 한다.”

“……폐하.”

“큰 공을 세웠음에도 동생들을 위해 태자 자리를 내려놓고자 하는 갸륵한 마음을 보상하고자 하는 것이니 태자는 거절치 말라!”

황제의 명령에 카리엘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의 은혜에 감읍 또 감읍하옵니다.”

그리고 황제가 직접 건네는 손을 잡고 일어나 그가 훈장을 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국의 최고 훈장인 태양 훈장은 황제 개인이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들 과반수가 찬성하고 대신들과 변경백들의 동의까지 얻어야만 가능한 훈장이었다.

그런 훈장을 황제가 직접 주는 것이니,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은퇴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느껴지는 묘한 느낌.

하지만 카리엘은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훈장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훈장을 받은 카리엘은 황제를 향해 다시 무릎을 꿇으며 품속에서 황금 패를 꺼내 들었다.

“소자가 감당하기엔 무거웠던 황태자 자리를 이제 내려놓고자 하옵니다. 받아 주시옵소서.”

황태자를 상징하는 패를 반납하는 것.

이 절차만 끝나면 정식으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카리엘에게 한껏 뜸을 들인 황제가 조용히 패를 거둬들였다.

“태자의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을 이제 거둬들이노라. 이제 편히 쉬거라.”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끝났다.

공식적으로 황제가 선포했으니 지금부터 카리엘은 1황자의 신분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의 황태자 직위를 공식적으로 거둬들이겠노라. 또한 임시로 겸임하던 재상의 직위 역시 거둠으로 태자가 건강 회복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니 모든 대신들은 짐의 명령을 반박치 말라!”

“폐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황제의 명에 모든 대신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찬성했고, 그 순간 그랜드 홀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것을 시작으로 홀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박수를 보내면서 그동안 고생한 카리엘의 은퇴식을 축하해 주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난 카리엘이 자신을 축하해 주러 온 두 남동생과 여동생인 미리엘의 꽃다발을 받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각국의 수장들이 하나둘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하오!”

유난히 눈을 빛내면서 말하는 제이슨 연맹장과 남부의 두 국왕, 공왕이 선물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교황이 다가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물러나시는 것이 실로 아쉽습니다.”

“부족한 능력으로 너무 오래 앉아 있었소. 지금이라도 물러나서 천만다행이오.”

카리엘의 말에 교황의 눈에서 순간적으로 싸늘함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그것을 느낀 카리엘이지만 이제 와서 어쩔 건가? 그는 이제 황태자가 아닌 것을.

한적한 곳에서 욜로 라이프를 즐길 것이기에 사실상 교황과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부디 대륙의 평화를 위해 힘써 주길 바라오.”

“……저하의 앞길에도 평안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애써 웃으면서 물러나는 교황.

그렇게 각국의 수장들의 선물 증정식이 끝나자 카리엘은 변경백을 비롯한 대신들과 고위 관료들, 귀족들을 하나하나 만나며 축하를 받았다.

예전이었다면 귀찮다며 주요 인사 몇몇만 만났겠지만 은퇴하는 기분 좋은 날이니 전부 받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국민들과 인사하고선 파티가 시작되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여길 떠야겠어.”

“그리 급하게 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뭔가 이상해.”

타리온을 불러서 명령을 전달한 카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만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 느낌이 좋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불안감에 미간을 찌푸리던 카리엘에게 황제가 다가왔다.

“카리엘.”

“예! 폐하.”

“표정이 좋지 않군. 은퇴하기 싫었던 것이냐?”

“제가 태자로 있는 동안 잘 해냈었는지 걱정되었을 뿐이옵니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카리엘에게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가 원했던 한적한 영지를 정했다.”

“아!”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대신들에게 명해 최대한 빨리 황궁에서 나갈 수 있도록 전부 조치해 두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 정도는 해 주어야 짐의 마음도 편할 것 같군.”

황제는 시종장을 시켜서 카리엘에게 무언가를 전해 주었다.

“아트멧?”

“휴양지로 유명한 영지이옵니다. 폭포로 유명한 영지이옵니다.”

타리온이 들어 본 적 있다는 듯 말하자 카리엘도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가…….”

“북부에 위치한 곳이다. 경관이 아름다워 성국에서도 자주 찾는다는군.”

“아…….”

“앞으로 좋은 풍경을 보면서 몸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리 정했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런 카리엘에게 황제가 넌지시 말했다.

“한데 대신들이 황태자 자리가 공석인 점과 재상이 공석인 점으로 인해 제국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군.”

“음…… 동생들이 잘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건재하시니 잠시간의 혼란쯤이야…….”

“안타깝게도 짐의 몸 상태가 더욱 나빠졌느니라.”

황제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더 나빠지신 것이옵니까?”

“그래. 주요 회의는 앞으로도 두 황자에게 맡겨야 할 것 같은데…… 혼란이 예상되는구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카리엘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동생들이라면 잘 해낼 것이옵니다.”

“음……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대신들은 그렇지 않더구나. 귀족들은 향후 예정된 혼란을 축소시키기 위해선 대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변경백들 역시 같은 의견이더군.”

황제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거였어.’

계속해서 불안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카리엘이 자신의 의도를 알아챘음을 느낀 황제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대신들의 의견으로는 전 황태자인 네가 황태자의 권한 일부를 좀 더 갖고 있으면 어떻겠느냐고 말하더구나.”

“폐하! 그건 말이 안 되옵니다. 태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면 권한 역시 폐하께 온전히 돌아가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사옵니다.”

자칫 황권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카리엘.

“짐의 몸이 온전했다면 일리가 있겠으나 아쉽게도…… 이 상태구나.”

일부러 과장되게 병약한 모습을 보이는 황제.

그 모습을 보면서도 카리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 그래도 아니 됩니다.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향후 악용될 여지가 있습니다.”

“음…….”

황제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자 카리엘이 서둘러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맹렬히 머리를 굴리며 온갖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자신을 황궁으로 불러들일 여지를 주어선 안 되었다.

완벽한 은퇴.

그것만이 욜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너의 의견이 이리 강경하니 알겠다. 대신들에게 안 된다고 말해 두마.”

“부족한 소자의 의견을 들어주어 감사드립니다.”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인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카리엘을 향해 황제가 말했다.

“황태자의 권한이야 완전히 회수한다 치고, 그럼 특수 감찰권은 어떠냐?”

“……예?”

“황제파를 잡아들일 때보니 꽤 잘하더구나.”

황제는 멍청한 소리로 ‘예?’라고 대답하는 카리엘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귀족들이 너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으니 한동안 네가 특수 감찰권을 쥐고 있으면 큰 혼란은 없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황태자를 은퇴했는데 특수 감찰권이라니…… 너무 무거운…….”

“그냥 갖고만 있거라. 사태가 진정되면 바로 회수할 것이다. 네 입장에서도 그 정도는 갖고 있어야 주변 귀족들이 얕보지 않을 거 아니냐.”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은근한 어조로 말하는 황제였지만, 눈빛은 내가 하나 물러 줬으니 이 정도는 받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앞서 태양 훈장을 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제 와서 눈치챈들 이미 늦었다.

제국 역사상 수여받은 자가 몇 명 없다는 최고 훈장.

그것을 받은 전 황태자라면 특수 감찰권을 임시로 사용하는 것쯤은 용납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황제의 얼굴에 교황의 여우 같은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은 착각일가?

너무 크게 맞아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은 카리엘이 간신히 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나도 대신들에게 면이 좀 서겠어.”

황제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웃으면서 카리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다 걸음을 멈추고 카리엘에게 말했다.

“이왕 가져간 감에 외교 권한도 가져가려무나.”

“……예?”

“괜히 교황이나 성국에서 너한테 시비 걸 수도 있지 않느냐. 당한 게 있으니 해코지할 수도 있고……. 못난 아비라도 멀리 떠나는 아들이 걱정되는구나.”

아들이 걱정되는 아비의 마음으로 주는 것처럼 말하는 황제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카리엘은 이를 바득 갈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미 주변에서 전부 황제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먼 길 떠나는 아들을 걱정하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카리엘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파티를 즐기라고 말하고는 연회장을 떠나는 황제.

그러자 카리엘이 다급히 타리온에게 자신의 영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했다.

얼마 후, 황급히 밖으로 나갔던 타리온이 연회장으로 돌아와 카리엘에게 지도를 건넸다.

카리엘은 귀족들을 상대하다 말고 지도를 살펴보았다.

“이런 개…….”

카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을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북동부에 위치한 작은 영지.

소문대로 정말 관광 명소가 맞았고, 접경 지역에서 먼 곳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현재 흑마법사들의 도주 루트로 추정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전하.”

타리온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자 입술을 깨물며 부들거리던 카리엘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초승달처럼 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마스터들이 보였다.

‘종신 노예들 짓이었어!’

단번에 제국의 종신 노예들이 수를 썼음을 눈치챈 카리엘은 이를 바득 갈았다.

‘언젠간 복수한다.’

자신에게 크게 한 방 날린 종신 노예들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 카리엘.

그리고 그런 그를 조롱하는 마스터들과 대신들.

이런 모습을 재밌다는 듯 지켜보는 타국의 사신단.

그렇게 제국 역사를 뒤져 봐도 드문 묘한 연회장의 풍경 속에서 카리엘이 그토록 원했던 은퇴식이 끝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