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0. 마지막 가르침? (3)
황태자의 부름에 아이론의 사신 중 하나가 황급히 궁으로 움직였다.
그 역시 상인 출신으로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강심장이었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현재 대륙 회의장에 아이론의 사신단의 고위직이 죄다 몰려가 있었다.
자신은 실무자 협상을 위해 따라온 것일 뿐, 황태자와 대담하면서 무언가를 결정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온갖 생각을 하는 동안 황태자의 궁에 도착해 버렸다.
“전하, 아이론 연맹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한 시종이 근엄하게 도착 사실을 알리고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엔 제국의 황태자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군.”
카리엘이 사신의 인사를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듣고 왔겠지만 그대의 나라와 아직 정리할 게 많이 남아서 말이야. 폐하께서 황태자인 나에게 직접 명하신 일이라 은퇴 전에 마무리 짓기 위해 급히 불렀네.”
“그…… 그러시옵니까.”
“그래. 나도 웬만하면 원만하게 합의했으면 하니 그리 긴장하지 말게. 서로 절충안만 잘 맞추면 금방 끝날 거다.”
카리엘은 편하게 있으라고 말했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사신은 묵직한 긴장감 속에서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마시려 했지만 카리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시작하지.”
“……예.”
갑자기 기세가 바뀐 카리엘이 싸늘한 음성으로 시작을 알리면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일단 배상금은 그대들이 보내온 것보다 적어도 3배는 더 늘려야 할 것 같군.”
“전하, 그건 너무 많사옵니다. 이미 저희들이 적어 보낸 것도 한계까지 쥐어짜 낸 것이옵니다.”
“……그래?”
카리엘이 사신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타리온을 불렀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자 사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연맹과 제국 간의 무역량이다. 그리고 이건 자체적으로 조사한 연맹 내 주요 상단들의 자금 흐름이지. 드러난 것만 이 정도이니 연맹 내 움직이는 자금 흐름은 이것의 몇 배에 해당할 터.”
“하…… 하오나 전하.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금액을 움직일 수는 없사옵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유예 기간을 아주 넉넉하게 줄 생각이네.”
카리엘의 말에 사신의 표정이 바뀌었다.
처음엔 부담감 때문에 한 방 먹었지만 배상금의 액수가 커지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제 정신 차렸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본격적으로 놀아 보자고 사신과 입씨름을 시작했다.
“전하, 이 사안들은 연맹과 아무런 연관이 없사옵니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안들까지 배상금을 청구하시면 연맹 입장에선 매우 억울하옵니다.”
확실히 실무자로 온 사신답게 카리엘이 건네준 자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하며 항의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사신을 보는 카리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리 그가 회귀했다고는 하지만 실무자들보다 이 사안에 대해서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직접 나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난 그대를 존중하지만 제국 입장에선 말장난 따위를 할 겨를이 없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소신은 잘…….”
“정황증거뿐이라고 했나?”
“그…… 예. 이런 정황증거뿐인 것으로 배상금을 낼 수는…….”
사신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이깟 정황증거들은 그저 명분뿐이라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그…….”
카리엘의 말에 사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실무자 입장으로 온 그는 그저 자료를 보고 배상금에 대해 논할 뿐, 그 이상은 그의 영역 밖이었다.
그러나 카리엘은 이 부분을 물고 늘어졌다.
“이건 그동안 제국에 막대한 이득을 불법적으로 취해 온 그대들의 죄에 대한 배상금일세. 물론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그동안 처먹은 게 있으니 앞으로 그대들의 이권 중 일부도 돌려줘야 할 테고 무역로에 대한 협상 역시 시작해야 할 거야.”
“…….”
“자네도 잘 아는 듯싶으니 다시 얘기해 보지.”
반쯤 협박한 후 협상을 재개했음에도 아이론의 사신은 최대한 입을 다물면서 저항했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넘겨서 고위층이 이 자리에 앉게끔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자 카리엘의 2차 협박이 이어졌다.
“자네는 이것들을 정황증거라고 우기고 있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카리엘은 타리온에게 명해 감찰부에서 받은 자료들을 보여 주었다.
“우리가 왜 정황증거들로 그대들과 배상금 협상을 하려 했는지 아나?”
“그건…….”
“다 그대들을 배려해서 그런 것일세.”
감찰부에서 보내온 자료에는 벨푸르스와 엮인 상단들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과 교역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서부를 지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면 서부의 명문가 중 하나인 벨푸르스와 엮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아이론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다.
‘그럼 교역을 하지 말라는 거냐!’라고 항의할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무려 흑마법사, 반역자와 손잡은 가문이 엮여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그동안 지은 죄가 있으니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어려웠다.
“알다시피 이 가문은 제국의 반역자이자 흑마법사와 손잡은 대륙의 범죄자들이네.”
“그건…….”
“아! 물론 그대들이 흑마법사와 내통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닐세. 다만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위험한 자료들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자 아이론의 사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국은 그대들을 최대한 배려해 주고 있네. 꼭 아이론에 보답을 바라고 이러는 것은 아니네만 그래도 제국이 체면을 차릴 정도니 양보해 주었으면 좋겠군.”
카리엘의 말에 아이론의 사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외통수였다.
여기까지 몰린 상황에서 칼같이 차단했다간 웃고 있는 카리엘의 미소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면서 아이론을 몰아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다고 혼자 인정하기엔 하나하나가 심각한 사안들이었다.
실무자인 자신의 입장에선 하나같이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그런 그의 입장을 헤아려 카리엘은 일단 대충 입만 맞춰 보는 선에서 끝내자고 했다.
사신 경력 20년인 그의 입장에선 이게 개소리라는 걸 잘 알았다.
이걸 토대로 후에 있을 협상에 우위를 가져갈 심산이라는 게 눈에 보였지만 힘이 없는 자신의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힘이 달리는 자신의 입장에선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최선이었다.
“좋은 협상이었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간신히 목숨만 살려 주는 선에서 마무리한 협상.
돌아가서 어느 정도 변명할 수 있는 구실을 남겨 주는 수준에서 협상을 끝냈다.
결국 차 한 잔도 마시지 못하고 반쯤 영혼이 가출한 표정을 지은 사신.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가는 아이론의 사신을 보며 타리온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끝나셨습니까?”
“그럼.”
“많이 몰아치시진 않은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실무자로 따라온 저자가 무슨 죄겠어? 진짜 협상은 고위급 인사들과 해야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분이 이런 식으로 불러다 조지십니까?’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입술을 꾹 닫고 버텼다.
“자! 그럼 다음 인물들을 불러 볼까?”
모두가 대륙 회의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에만 가능한 절호의 기회.
가장 중요한 첫 회의이기에 가능한 소중한 기회를 카리엘은 알뜰하게 써먹었다.
아이론과의 협상으로 기준점을 만든 후라서 그런 걸까?
다른 국가들과의 협상은 굉장히 순조롭게 이어졌다.
“아…… 아이론이 정말 이 협의안에…… 찬성한 것이옵니까?”
“구두 협약은 끝났네.”
카리엘은 로테온의 사신을 바라보았다.
“그대도 알다시피 아이론보다 그대들의 죄가 더 무거움은 잘 알겠지?”
“그건…….”
“자! 이 사안에 대해서 다시 논해 볼까?”
카리엘이 웃으면서 아까 반쯤 끝내 놓았던 사안들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러자 로테온의 사신이 긴 한숨을 토해 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건 탈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반쯤 기울어진 판이었는데 거기에 깐깐하기로 유명한 아이론이 엄청난 배상금을 내기로 약속해 버렸으니 남부 왕국들로선 도리가 없었다.
자신들의 선에선 답이 없으니 일단 후에 있을 협상에 여지라도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공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대륙과의 교역으로 장난질을 해 왔던 공국이기에 카리엘의 칼날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나마 이들은 나았다.
“장난하나?”
“하…… 하오나 전하, 이것은 너무 불합리한…….”
“성국 안에 제국에서 장난질을 한 신관과 연관된 자가 있는데 그대로 넘어가 달라?”
“배…… 배상금을…….”
“배상금은 당연한 것이네. 그동안 성국이 비리로 착복한 돈이 이것의 수십 배일 터! 그대는 지금 나의 인내를 시험하는가!”
카리엘의 호통에 신관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관의 입에서 쉽사리 그러겠다는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성국 내에 있는 신관들에 대해 제국 감찰부가 조사할 권한을 달라는 요구는 성국에 내정간섭을 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인 것이다.
하지만 명분은 제국이 쥐고 있었다.
“전하, 배상금은 더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좋게 말했더니 내가 우습나?”
“그것이 아니옵니다. 이는 성국이 가진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제국이 분노하는 것은 이해하는 바이나 이 사안만큼은…….”
신관의 말에 카리엘이 속으로 웃었다.
이미 낚였다.
사실 카리엘도 제국의 감찰부가 성국의 신관들을 조사할 수는 없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저 반쯤 협박할 용도로 사용한 것뿐.
신분의 차이, 분위기, 기울어진 판, 명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사용할 수 있었던 방법일 뿐, 진짜로 이 사안이 용납될 수는 없었다.
만약 제국이 정말로 내정간섭을 하려 한다면 성국은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할 것이다.
“쯧! 일단 이 정도로 마무리 짓지. 마무리하지 못한 사안은 후에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예, 전하.”
일부러 화난 척 연기하면서 협상을 마무리한 카리엘은 신관이 나간 후 웃음을 터뜨렸다.
“……불쌍하군요.”
“뭐가? 원래 협상이란 게 이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야.”
“음…….”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자신이 아는 협상과는 매우 다르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협상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며 외교적 수사 등을 사용해 돌려 말하거나 어느 정도 정해진 선에서 싸우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카리엘은 그런 게 없었다.
일단 신분발로 강제로 찍어 누르고 큼지막한 명분으로 협박했다.
“그나마 나였기에 이 정도로 끝난 거야. 적어도 저들이 살길은 터 줬잖아?”
돌아가서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준 것.
그것만으로도 카리엘은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라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타리온의 눈에는 딱 그 정도만 남겨 두고 죄다 털어먹은 카리엘이 딱히 자비롭다고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각국의 사신단은 지금쯤 난리가 났겠군요.”
“어쩌겠어. 방심한 지들 탓이지.”
그렇게 말하며 카리엘은 빙그레 웃었다.
* * *
만족스러운 성과에 웃음꽃이 핀 황태자 궁과 달리 각국의 사신단이 묵고 있는 궁은 혼란에 빠졌다.
“이걸 이렇게 해 오면 어떡하나!”
“그럼 자네가 가지 그랬나! 황태자의 협박을 자네가 받아 보든가!”
그 말에 속옷까지 털려서 온 동료에게 향해 화내던 아이론의 사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만.”
사신단의 싸움에 연맹 회장인 제이론이 그들의 싸움을 멈추었다.
“방심한 우리 탓입니다. 황태자가 빈틈을 잘 찔러 온 겁니다.”
제이론이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면서 말했다.
“다음 협상엔 확실한 일정을 잡도록 하죠.”
“대륙 회의와 병행하실 생각입니까?”
아이론의 마스터인 살바토르의 물음에 제이론 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체력적으로 힘드실 겁니다.”
“황태자가 이런 판을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지요. 이 판 안에서 최대한 버텨 내는 게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제이론의 말에 살바토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동시에 2개나 준비한다는 것은 체력적으로 매우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일반 실무자들로는 황태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각국의 정상들은 늦은 밤까지 회담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곧 회의 기간 내내 체력적인 부담을 안고 회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곧 대륙 회의에서 두 황자들의 부담을 덜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 * *
동생들이 수장들을 묶어 두는 동안 탈탈 털어 낸 카리엘은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한 후 의자에 늘어졌다.
“드디어 마지막 선물도 끝이 났군.”
카리엘은 밤이 내려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부족한 동생들에게 주는 형의 마지막 선물도 완성되었다.
남은 건 은퇴식뿐.
황제도 카리엘이 노력했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동생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자마자 은퇴식의 날짜가 잡혔다.
그토록 바라던 은퇴일이 잡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