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9. 대륙 회의 (2)
제국이 대륙 회의에 부른 국가는 딱 5개 국가였다.
서부 상인 연맹 국가 아이론.
남부 양강 탈로스와 로테온.
북부의 신성 왕국 세인트리아.
동부 루미너스 공국.
외교적 서신임에도 분노를 가득 눌러 담아 쓴 필체.
미적거리지 말고 미리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는 말을 돌려서 쓴 서신에 각국의 수장들은 분노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제국을 잘못 건드렸다간 모든 분노가 그들에게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는 법.
그러자 성국이 반항하듯 교황이 직접 대륙 회의에 참가하고자 했다.
거기다 성국 최강의 검이자 차기 마스터로 예상되는 태양검까지 대동하겠다고 전했다.
몇 년 안에 마스터가 될 거라고 여겨지는 태양검까지 같이 움직이며 제국의 압박을 조금이라도 견뎌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남부의 두 국가 역시 빠르게 두 마스터를 소환했다.
탈로스와 로테온도 성국과 발맞춰서 제국의 압박에 견뎌 볼 심산인 것이다.
그러자 그로 인해 난감해진 것은 클레타 공작과 피레스 공작이었다.
“그대도 왔소?”
“그렇소.”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탈로스와 로테온의 두 마스터가 한숨을 쉬었다.
남부 왕국들 입장에선 성국과 발맞춰서 제국의 압박을 견뎌 볼 심산이겠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의미가 없었다.
세 명의 마스터를 견제하고자 하는 것이면 나름 훌륭한 전략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마스터가 보기에 제국에서 가장 경계해야 될 자는 그들이 아니었다.
클레타 공작과 피레스 공작이 말없이 화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
“…….”
두 공작이 침묵한 채 바라본 정상에서는 붉은 빛이 마력 파장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마스터가 보기에도 경이로운 현상을 만들어 낸 이 현상의 주체가 황태자라는 것.
두 공작이 제국을 돕겠다는 핑계로 정상까지 가서 확인한 현상.
지금 산 정상에서 붉은 빛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체가 황태자라는 것을 확인한 순간 대륙 회의가 시작하기 전부터 보이는 이 기 싸움이 얼마나 의미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이그니트 제국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나타났던 초대 황제의 불을 품은 자들.
그 불을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가 품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가 가진 재능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불까지 품었다는 건 타국에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얌전히 엎드리면 살 수 있겠소?’
‘어려울 것이오.’
클레타 공작의 눈빛에 피레스 공작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착잡한 마음에 한동안 말이 없던 클레타 공작이 피레스 공작에게 말했다.
“후…… 어쩌면 이번 대륙 회의는 단순히 배상금이나 죄인들을 넘겨주는 선에서 끝날 것 같지 않소.”
클레타 공작의 말에 피레스 공작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회의라고 하면 모든 국가를 부를 줄 알았지만 이렇게 다섯 군데만 특정해서 부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서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이그니트 제국으로부터 국가라 불릴 만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곳.
그곳이 딱 다섯 곳이라는 얘기였다.
나머지는?
소국이라 칭하기에도 애매한 국가들.
그런 주제에 감히 제국의 이권을 기생충처럼 갉아먹었다.
즉, 제국은 더 이상 이러한 소국을 놔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섯 국가만 초청하면서 드러낸 것이다.
“이걸 방관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의미군.”
“후…….”
두 공작이 깊은 한숨을 쉬며 고민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차피 결정은 왕이 하는 것.
자신들은 그저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쿵!
한숨을 쉬던 두 마스터가 갑자기 흔들리는 지반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다급히 화산을 바라보았다.
묘한 마력 파장을 일으키던 화산의 정상에서 붉은 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왕국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온 것 같소.”
“그런 것 같소. 후…… 이그니트의 수도에서 봅시다.”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하늘로 솟구치면서 폭발했어야 할 화산의 힘이 빠르게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즉, 이곳에서의 일이 거의 끝나 간다는 의미였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들의 왕을 모시고 제국의 수도로 향하는 것뿐.
그것을 위해 남부 연합군이 자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할 때, 제국의 남부 변경백과 동부 변경백 역시 병력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카푸르 화산에서의 일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이그니트의 황궁은 성국의 결정에 고민에 빠졌다.
“이제 와서 순방이라고?”
“예, 제국의 북쪽 지역을 순례하며 수도로 온다고 하옵니다.”
외무대신의 말에 3황자 세리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2황자 루피엘 역시 황당한 표정이었다.
“이유는?”
“흑마법사를 제대로 막지 못한 성국의 죄를 사죄드리기 위함이라 하옵니다.”
외무대신의 설명에 루피엘이 표정을 찡그렸다.
“숨겨진 뜻은?”
“아무래도 신전이 흑마법사와 결탁했다는 것을 덮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이미 성국에서는 흑마법사들과 결탁한 신전들을 이단으로 선포한 상태입니다.”
외무대신의 설명에 두 황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단이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예, 이단 심문관들을 대동해서 흑마법사와 결탁한 신전들을 정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또한 교황이 직접 피해 지역에 사죄하러 다니면서 분노한 신도들을 다독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미 제국에도 흑마법사와 연관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교섭 없이 제국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전해 왔습니다.”
성국이 이 정도까지 물러섰다는 것에 두 황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콧대 높은 성국에게 이런 굴욕을 안겨다 줬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했고, 실제로 외무대신 역시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여겼다.
하지만 황태자였다면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
‘태자 전하께선 이걸로 만족하시지 않을 테지.’
이미 황태자의 성정을 파악한 외무대신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두 황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님이라면 이걸로 만족하진 않았을 거야.’
‘뭘 더 뜯어내지?’
두 황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성국을 압박할 생각을 했다.
“대신에겐 저들의 의도가 무엇으로 보이나?”
2황자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제국 내에서 성국의 입지를 유지시켜 보려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 때문이라고?”
2황자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고개를 저었다.
“향후 교섭을 위한 발판인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굴욕을 감내하면서 대륙 회의에서의 명분을 쌓을 것 같습니다.”
“어떤 걸 위해서?”
“이단 심문관이 따라오는 것을 보니 현재 구금된 신관들을 자신들이 처벌하기 위해 데려갈 가능성도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작 그것?”
2황자의 물음에 외무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굴욕적이라고 하더라도 미래를 생각하면 할 법합니다.”
이단 심문관에 의해 죄지은 신관들이 성국으로 복귀하는 것.
그곳에서 사형을 당할지라도 성국의 손에 처벌받는 것은 서대륙의 사람들에게 아직 성국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을 넘기고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지난날의 위세를 다시금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교황은 미래를 내다보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일단 난 흑마법사들을 더 캐 보는 수밖에 없겠네. 일단 신관들을 더 조져야겠어.”
“그럼 난 신관의 비리를 깊숙이 파야겠네.”
그렇게 두 황자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교황을 조질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어린 두 황자가 늙은 여우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교황이 북부에서 사죄의 순례를 마치고 수도로 돌아온다면 성국에 대한 여론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여우 같은 그가 간교한 입을 놀린다면?
외무대신이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교황을 상대하려면 누군가 중심을 잡고 각 부처를 통솔하며 성국을 압박해야 한다.
하지만 두 황자는 자신들이 가진 권한 내에서 일을 처리하려 했다.
‘두 분 저하께선 아직 미숙하시다.’
외무대신이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게 맞다.
아직 한참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걸 감안하면 두 황자들이 못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역대 황제들과 황족들을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미 황태자가 했던 것을 보아 왔던 외무대신에게 두 황자들의 대처는 많이 미숙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무부와 감찰부를 불러서 확신한 대책을 마련하시는 게 어떨는지요.”
외무대신의 제안에 두 황자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교황이다.
그런 이를 상대로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역공을 맞기 십상이다.
성국을 엿 먹일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기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결국 두 황자의 결정에 감찰부와 내무부, 군부까지 불러들여서 비밀리에 성국에 대해 논했다.
하지만 쉽게 결론이 날 리 만무했다.
각 부처의 입장이 있고, 전문분야가 다른 만큼 접근 방식도 전부 달랐다.
게다가 황자들 역시 생각이 달랐기에 중재될 리 없었다.
‘개판이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외무대신은 한숨을 쉬며 비밀리에 황제한테 이 사실을 전했다.
결국 황제 직권으로 대전 회의가 열리며 교황의 북부 사죄의 순례와 관련된 안건이 상정되었다.
그래도 황좌에 있었던 경험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두 황자들이 보인 미숙한 모습과는 상반되게 정상적으로 회의가 진행되어 갔다.
물론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각 부처가 얘기했던 것들이 가다듬어지고 서로 간의 의견을 어느 정도 중재해서 쓸 만한 대처 방안을 만든 것일 뿐.
‘전하였다면…… 달랐을까?’
대전 회의를 지켜보던 외무대신은 남동부에 있는 카리엘을 떠올렸다.
카리엘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 교황을 압박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행적을 생각하면, 교황이 대륙 회의에 참가하겠다고 밝힌 그 순간부터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 밤샘 작업을 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외무대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분명 몸은 지금이 훨씬 편했다.
황태자가 있을 시절에는 매일같이 불안감에 탈모 증세가 생기고 밤샘 작업을 며칠씩 자주 했을 만큼 피곤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황태자가 그리운 것은 왜일까?
“후…… 늙은 여우가 골치 아프게 하는군.”
황제의 말에 대전에 있는 귀족들이 허리를 굽혔다.
이미 제국에는 교황이 직접 온다는 것과, 각국의 왕들이 참석한다는 것, 각국의 지도자들이 마스터들을 대동한다는 것이 소문으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성국이라는 소문도 돌았는데, 뒤이어 교황이 사죄의 뜻으로 순례한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하면 모든 이목이 교황에게 집중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수도에 와서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카리엘이 힘들게 깔아 둔 판이 망가질 수도 있다.
“황태자의 은퇴식 날짜를 잡아 준비하라.”
이 상황을 예상하고 카리엘이 준비한 한 수가 황제의 입 밖으로 나왔다.
교황이 이슈를 통해 수를 쓰려 한다면 더 큰 이슈로 덮어 버리면 되는 법.
황제가 직접 황태자의 은퇴식을 주관하겠다는 말과 함께 누구보다 성대한 은퇴식을 만들라는 명이 떨어졌다.
마치 대륙 회의가 황태자의 은퇴식을 위해 각국의 수장들을 모이게 하려는 명분이라는 것처럼 모든 일정이 은퇴식을 중심으로 돌아가게끔 스케줄을 짰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제국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그 전에 있던 모든 소식들은 힘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