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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55화 (55/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9. 대륙 회의

흑마법사에 의해 찢긴 파편들은 화산의 정상에 용암을 빨아들이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요동치기 시작하는 거대한 불덩이였지만 붉은 기운으로 공명을 일으키는 카리엘에겐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았다.

“……전하.”

타리온이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거대한 불덩이가 카리엘을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오히려 방해되는 다른 인간들을 위협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항했을 마스터들이지만, 카리엘이 보이는 기적적인 일에 얌전히 뒤로 물러나 주었다.

정령왕의 파편과 카리엘이 교감을 시작할 때, 마침내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 용암들이 전부 거대한 불덩이 주위로 몰려들더니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이루어 나간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때, 타리온의 앞에 불덩이가 생겨나며 허공에 글자가 쓰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릴 듯싶다.」

불로 이루어진 글자를 멍하니 보던 타리온은 카리엘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글자가 사라지면서 카리엘도 불의 장막 안으로 사라졌다.

“오래 걸리시겠군.”

멀리서 불로 이루어진 글자를 본 아켈리오가 타리온에게 다가와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볼일을 마치시기 전까지 그 누구도 접근하게 두지 마라.”

“예!”

아켈리오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본 아켈리오 역시 움직였다.

서북부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마스터 세 명이 세 방위를 점하고 기사들이 두텁게 화산의 정상부를 둘러쌌다.

* * *

철벽과도 같은 진형이 갖춰지는 동안 밑에서는 남부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자 몇몇 이들이 살기 위해서 도망치려 했지만 그들 역시 아래에 포위망을 깔고 대기하고 있던 제국의 남부군과 동부군에 의해 잡히거나 죽어 나갔다.

서북부에서 일어난 전투처럼 격렬하게 저항하는 흑마법사들이지만 압도적인 군세는 그들의 저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모든 전투가 끝난 후, 상황을 정리하는 남부 연합군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피레스 공작은 화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저것 때문인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흔들리던 지축이 점차 안정되어 갔다.

거기다 산의 정상쯤에서 일어나던 심상치 않은 마력 흐름 사라졌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원인에 황태자가 관여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제국의 비밀 중 하나인가?”

대륙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은 수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은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에 저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은퇴라…….”

피레스 공작이 정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를 맞이했을 때 제국의 마스터들이 보인 행동을 보면 현 황태자에 대한 존중이 은연중에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군부 역시 황태자에 대한 신뢰가 눈빛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퇴라……. 혹시 황태자의 은퇴에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불과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럴듯했다.

현재 제국에서 황태자에 대한 제국민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암군들로 인해 피폐해진 제국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고 평가될 정도였다.

그런 이가 갑자기 은퇴를 한다?

‘암중에서 휘어잡을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했을 땐 이유를 찾아야 하는 법.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자유로워진 상황을 이용해 제국의 그림자 속에 숨어 통치한다.

제국의 정보부, 그림자 같은 비밀 조직들을 은퇴한 황태자가 지휘하면서 암중에서 타국을 견제할 거대한 세력을 만들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국의 숨겨진 칼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물러나는 황태자.

‘무섭군.’

아직 어린 황태자가 이런 심계를 품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피레스 공작이 살짝 몸을 떨었다.

조금만 삐끗해도 몇몇 국가들이 역사 속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드러난 칼보다 숨겨진 암기가 무서운 법이었다.

“제국의 부활이라…….”

이제 겨우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날아오르는 꿈을 꾸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금 제국이 부활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피레스 공작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건 남부의 또 다른 마스터 클레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일수록 제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이 힘을 모아야 하건만, 성국와 아이론은 자신들의 손해를 메꾸기 위해서 남부를 함께 치는 것을 선택했다.

“……이 상황을 전하께 전하게.”

“예.”

클레타 공작은 카푸르 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전령에게 전했다.

이 정보가 대륙 회의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대륙 회의가 그들에게 재앙이 될 것임을…….

* * *

클레타 공작과 피레스 공작이 예견한 재앙인 대륙 회의를 주관하는 제국의 수도에서는 한창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황태자가 판을 깔아 주고 스푼까지 들려 줬는데 떠먹지도 못하는 건 관료들에게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관료들 대부분이 밤낮없이 일하며 회의에 참석할 타국들을 조금이라도 더 박살 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귀족들 역시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바쁘게 지냈다.

회의를 주관하게 될 황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린 황녀 미리엘조차 회의에서 입을 옷이나 파티에 참가하기 위한 공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수도에서 유일하게 한가로운 자가 있었다.

“……폐하.”

기존에 있던 시종장을 밀어내고 새로이 들인 늙은 시종장이 황제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시종장의 시선 끝에서 황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방금 손수건에 토해 낸 검은 핏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약을 끊을수록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약을 많이 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사가 수도에서 사라지면서 기존의 마약을 구할 방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약을 하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도 자꾸만 황태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은퇴하려고 발버둥 치는 자식조차 의심하게 만든다라…….”

황제가 마약이 담겨 있던 봉지를 바라보며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마저 조종하려 했던 흑마법사를 생각하면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흑마법사의 마약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사들이 제조한 마약은 자신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의심병을 부풀린 것밖에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이러한 놈인 것이다.

능력 있는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못 하고 황제 자리에 앉아 정쟁만 일삼던 무능한 황제.

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죽음이 다가오니 겨우 보이는군.”

그동안 가려져 있던 자신의 무능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폐하.”

“저게 아니었으면 난 또다시 녀석을 의심했겠지.”

또다시 도지기 시작한 의심병.

그런 자신을 아는 것일까?

카리엘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에는 은퇴 후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어떠한 세력도 필요 없으니 시골 영지 하나만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자신의 은퇴식을 이용해 타국을 압박할 방법과 은퇴 후 제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어 놨다.

“큭큭큭…… 동생 놈이 반란을 준비할 만하군.”

겨우 맑아진 머리로 자신을 평가한 황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

비상하는 제국의 날개, 제국의 패황, 제국의 황금 기둥 같은 별명이 생긴 황태자에게 질투심을 느끼며 은퇴하려는 아들을 견제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아들이 그런 아비의 마음을 눈치채고 선수를 친 것이다.

의심병이 더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 내려는 듯 빠르게 은퇴식을 제안하며 지방의 영지에 자신을 가두려 했다.

‘아비조차 믿지 못하는 아들이라.’

“막장이군.”

황제가 그렇게 자조하며 카리엘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재능 있는 동생들을 위해 물러날 때이옵니다. 더 이상 미루지 마시옵소서.」

“능력 있는 동생들을 위해 양보한다라…….”

자신이 못한 것을 너무나도 쉽게 하는 아들을 보면서 황제의 마음속에 부러움이 싹텄다.

또다시 질투심이 싹트기 시작하자 황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심병에 이어서 질투심까지 일어나자 쓰레기 같은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남았나?”

“……길어야 3년이옵니다.”

“2년 이내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군.”

황제의 말에 새로이 나타난 늙은 시종장은 허리를 굽힐 뿐이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이 늙은 시종은 유능했다.

시종이라기엔 지나치게 풍부한 경험과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 처음엔 의심했으나 옆에 두었다.

선황에게 들은 제국의 비밀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내 앞에 비밀을 지키는 자들이 나타났다는 건 아직은 내가 필요하다는 것이겠지.’

황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데이비어 공작이 돌아오는 대로 모든 변경백들을 불러 모으게.”

“그리 전하겠습니다. 다만 변경백들은…….”

“황태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전하게. 제국의 미래를 위한 나의 마지막 결정이 될 것이야.”

황제의 ‘마지막 결정’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뜬 늙은 시종장이 허리를 굽히고는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아들이 스스로 유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제국의 썩은 뿌리 중 가장 굵은 것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자라나지 못한 뿌리였기에 썩은 뿌리라도 그들이 자라기까지는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나에게 남은 소임이 이것인가?”

방해하지 않고 미래를 짊어질 기둥들이 자라날 시간을 벌어 주는 것.

그것을 위해 제국의 비밀을 지키는 자들이 자신에게 나타난 것이리라.

지금도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질투심을 애써 누르며 황제는 다시 찬란하게 빛날 제국을 머릿속에 그렸다.

다시 비상할 제국에 발판으로라도 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짐은 황제이니라.”

황제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다시금 좀먹기 시작하는 불순한 생각들을 몰아내려 했다.

* * *

황제가 그렇게 스스로의 싸움을 시작하면서 황제의 궁에 박혀 있는 사이, 시종장에 의해 모든 변경백들에게 황제의 서신이 전해졌다.

그리고 대륙 회의에 참여할 예정인 주요 국가의 수장들이 제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성하께서 직접 가신단 말씀입니까?”

“위험하옵니다! 분노에 찬 제국이 성하께 어떤 위험을 가해 올지 알 수 없사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제국의 대륙 회의에 직접 참여하고자 하는 교황.

그런 그를 말리기 위해 추기경들이 무릎을 꿇고 앞을 막아섰다.

그런 그들에게 교황이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가야 합니다. 지금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제국 내에서 하나둘 사라져 가는 신전들.

그로 인해 다른 국가들에도 그 여파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성국의 위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서대륙에서 견고히 자리 잡아 왔던 신에 대한 믿음 자체가 사라질 판국이었다.

그렇기에 교황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제국으로 가야 했다.

“제국에 다시금 신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잡지 못하면 성국의 역사는 이대로 끝일 겁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하며 아직 어린 황태자를 생각했다.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

그가 진짜 이 사태를 만든 것인지,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교황이 직접 제국의 수도로 간다는 소식이 대륙 전체에 퍼지자 주요 국가들의 지도자들 역시 대륙 회의에 참가하겠다는 서신을 황궁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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