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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51화 (51/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7. 화산에서의 혈전 (4)

불의 거인과 카리엘 간의 공명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시간이 오버되지도 않았고, 큰 문제도 없었으니 계약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정령이 문제였다.

정령왕의 파편에서 강제로 만들어진 정령은 불안정했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 동안 카리엘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고, 중간에서 힘을 조율하는 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는 즉, 카리엘이 계약을 완전히 끝낼 때까지는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전하를 지켜라.”

“예!”

아켈리오의 명령에 중앙 기사단이 화산의 꼭대기를 중심으로 방어 진형을 갖췄다.

그러자 타리온 역시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그림자들이 쓰는 전서구를 이용해서 아래에 현재의 상황을 알린 후, 친위대와 함께 카리엘을 호위하는 데 힘을 보탰다.

“적들입니다.”

“저들이 전하를 조금이라도 방해하게 둬선 안 될 것이네.”

타리온의 말을 들은 아켈리오가 그렇게 말하곤 검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일제히 발검을 하면서 마력을 발현했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습격자들로부터 카리엘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끌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아래쪽도 마찬가지였다.

북부군과 서부군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이들이 황궁 기사들과 대공가 기사단을 두드리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들의 가장 앞에 선 것이 글렌이라는 점이었다.

가장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전에 들어가자 선두에 서서 활약하는 천재.

지금까지 가장 부족했던 ‘실전’이라는 부분이 채워지기 시작하자 싸우는 와중에도 실력이 상승했다.

무아지경으로 싸우면서 실시간으로 성장하는 천재를 중심으로 병력이 사력을 다해 화산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을 막아섰다.

“막아라! 전하께 가게 두어선 안 된다!”

카리엘이 올라간 후, 요동치는 마력이 안정화되면서 뿜어지는 붉은 빛.

이 현상이 화산 폭발을 막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군단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전하께서 내려오실 때까진 버텨야 한다.’

목숨을 걸고 그 임무를 사수할 것을 다짐하면서 병력을 지휘하며 직접 검을 뽑아 들어 적들을 베어 나갔다.

하지만 연이은 전투로 지친 상황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니 점점 밀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화산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넓게 진형을 펼쳐 둔 상태였기에 피해는 점점 더 누적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이를 악물고 막았다.

“군단장님! 뚫리는 곳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이상 안으로 들여보내면 아니 된다! 위로 올라가 주요 길목을 차단해라!”

“예!”

군단장의 명령에 모든 이들이 화산에 오르며 적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 냈다.

하지만 그것도 곧 한계에 직면했다.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뚫리는 방어선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 시간이 지나면 전열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어?”

병사 중 하나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바보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인영들이 수직 낙하하면서 검은 로브를 쓴 자들을 일제히 베어 죽여 버렸다.

“……오셨군.”

군단장이 구사일생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순간, 검은 인영들이 불어나면서 적들을 죽여 나갔다.

그러자 피투성이가 된 채 싸우던 글렌이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순간도 그 광경을 놓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글렌.

아켈리오가 거대한 검으로 무쌍을 찍는 형태라면, 지금의 검은 셀 수도 없이 많은 환영이 정교한 검격으로 적들을 죽여 나가는 것이었다.

극한의 빠르기와 정교함을 갖춰야만 가능한 완벽에 가까운 환검.

“늦어서 미안하네.”

“……딱 맞게 오셨습니다.”

군단장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자 모든 군인들이 경례를 올렸다.

제국의 기둥에게 표하는 예의에 북부를 지키는 사령관이 짧게 고개를 끄덕여 받아 주었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위에 계십니다. 폭발을 막고 계시는 걸로 보입니다.”

군단장의 보고에 시카리오 후작이 화산의 꼭대기에서 빛나는 붉은 빛을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막고 계신다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시카리오 후작이 군단장을 보면서 말했다.

“난 전하께 가야겠군. 곧 북부군이 올 테니 막는 데에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예.”

시카리오 후작이 걱정 말라는 듯 말하면서 올라가려고 할 때였다.

산 아래쪽에서 거대한 섬광이 번뜩이면서 숲을 갈라 버렸다.

“문제없겠군.”

“데이비어 공작이 오셨군요.”

군단장은 섬광처럼 뻗어 나가는 오러를 보고서야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지었다.

“북부군의 지휘도 그에게 맡긴다고 전해 두게.”

“예.”

시카리오 후작의 당부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군단장.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시카리오 후작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저 멀리 화산의 정상을 향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섬광과 함께 또 한 명의 마스터가 군단장 앞에 나타났다.

“데이비어 공작을 뵙습니다.”

“전하께선 위에 계시는가?”

“그렇습니다.”

“이곳의 방어는 자네한테 맡기겠네.”

데이비어 공작이 그 말과 함께 올라가자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글렌이 부럽다는 눈빛을 보였다.

“언젠가는 나도…….”

마스터에 오른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보이는 경외심.

그 모든 것이 탐났다.

오랫동안 뚫지 못한 마스터라는 벽.

짧은 시간 동안 세 명의 마스터를 전부 만나 본 글렌의 눈이 불타올랐다.

‘반드시 도달한다.’

실전을 통해 급격한 성장을 이룬 글렌은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했으나 다시금 고요함을 찾은 눈동자는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주변을 정찰했다.

현재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이 길목을 사수하는 것.

그것을 위해 끓어오르는 마력을 진정시키고 기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글렌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공가의 기사단은 주먹을 꽉 쥐며 응원했다.

언젠가 자신들의 주군도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 줄 것이라 믿으며…….

* * *

그렇게 북부군, 서부군과 함께 힘을 합쳐 화산의 길목을 안전하게 틀어막는 동안 화산의 꼭대기 역시 정리되어 갔다.

어느새 도착한 시키리오 후작에게 근방의 습격자들은 모조리 정리되었고, 멀리서 광역 마법을 사용하려는 흑마법사들은 데이비어 공작의 섬광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건.”

“굉장하군.”

뒤늦게 합류한 두 명의 마스터가 불의 거인과 공명하고 있는 카리엘을 보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냉정하기로 유명한 두 마스터조차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로 경이로운 광경.

“저 작은 불덩이가 화산에서 뿜어지는 막대한 화기를 제어하고 있군.”

“저 거인이 내포한 힘 역시 상당하네.”

두 마스터가 불의 거인과 수르트를 보면서 감탄할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다시 기어 나오는 습격자들.

자신들의 감상을 방해받았기 때문일까?

두 마스터는 분노한 표정으로 나서서 그들을 쓸어버렸다.

“좀 불쾌하군.”

“동의하오. 잡것들 때문에 이곳이 오염되는 기분이군.”

시카리오 후작의 말에 데이비어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아켈리오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 명의 눈이 마주친 순간, 화산의 가장자리로 각 마스터들이 방위를 점하며 섰다.

꼭대기로 올라오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각 방위를 점한 마스터들이 올라오는 족족 죽여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방어진이 만들어졌군.”

세 명의 마스터가 만든 호위 진형을 보며 타리온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중앙군의 기사들과 친위대조차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들이 뿜어낸 오러들이 서로 공명하면서 화산 주위에 단단한 결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신기한 건 결계가 카리엘이 있는 곳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야말로 조금도 방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구현된 결계 속에서 마침내 공명을 하던 카리엘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바로 그 순간, 붉은 빛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거대한 크기의 불의 거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기 정령과 계약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불안정했던 화기가 안정되며 화산 폭발을 저지하셨습니다.]

[정령왕의 파편 하나가 잠들면서 또 하나의 파편이 깨어났습니다. 카푸르 화산의 폭발을 저지하세요.]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는 순간, 무너졌던 거인의 힘이 카리엘의 앞에서 한데 뭉치면서 서서히 심장 부근에 스며들었다.

붉은 기운에 의해 허공에 뜬 채로 힘을 받아들이게 된 카리엘.

거인의 몸을 이루던 막대한 양의 힘이 스며들었지만, 수르트가 그 길목에 서서 힘을 조율했기에 그리 버겁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힘을 받아들이던 카리엘이 지상에 착지하자 수르트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드럽게 힘드네. 좀 자야겠다.

수르트는 말이 끝나는 순간 팍, 하고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아기 정령 역시 수르트처럼 작은 불덩이로 변해 모습을 감췄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황급히 달려온 타리온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카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래로 가자.”

“좀 쉬었다…….”

“그럴 시간이 없어.”

파편 중 하나가 카리엘과 계약하면서 깨어난 또 다른 파편.

그것을 막기 위해서 빠르게 이동해야 했다.

카리엘의 재촉에 타리온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재빨리 화산 아래로 향했다.

올라올 때처럼 타리온의 등에 업힌 카리엘이 마스터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자 군단장이 임시로 지휘하던 병력이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그들의 주위로 보이는 엄청난 숫자의 시신들과 부상을 입은 자들의 모습이 이곳에서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려 주었다.

“모두 고생했다.”

카리엘의 말에 군례를 올린 이들의 눈동자가 떨렸다.

황태자가 진심을 담아 말하는 말에 감동한 이들이 힘차게 카리엘의 이름을 연호하자 머쓱한 표정으로 그들의 환호를 들어 준 카리엘.

모두와 함께 승전의 기쁨을 나누며 화산을 내려와 서북부의 방어선으로 이동할 때였다.

한 기의 전령이 다급히 카리엘 쪽으로 달려왔다.

“전하! 급보이옵니다.”

“급보?”

“예! 현재 남부 연합에서 대규모 군을 움직이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유는?”

아무리 남부 연합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순 없다.

흑마법사들이 활개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했다간 피해를 입은 아이론, 제국, 성국이 연합해서 그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명분이 중요했다.

“카푸르 화산이 폭발하려는 조짐이 있습니다. 흑마법사들이 했을 거라 추정되어 그들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움직인 듯싶습니다.”

“병력 규모는?”

“탈로스와 로테온의 마스터들이 전부 포함된 7개 군단의 연합군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뒤에 있는 마스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로테온과 탈로스 모두 각각 한 명씩만 보유하고 있어 애지중지하는 마스터들을 보냈다?

이건 제국을 압박하려는, 혹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제국의 영토 일부를 먹어 보겠다는 심보였다.

“시카리오 후작.”

“예, 전하.”

카리엘의 부름에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시카리오 후작.

“한 달 정도만 나와 함께 움직입시다.”

“전하, 그는 북부를…….”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곤 말했다.

“북부군은 돌려보내도 상관없소. 그대만 잠시 합류하면 되오.”

“남부를 압박하시려는 것이군요.”

시카리오 후작이 단번에 카리엘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사를 막는다는 핑계로 제국의 끝자락 영토에 발을 들이밀려는 남부 연합군.

이후 대치 상황이 마무리돼도 군을 물리는 조건으로 대륙 회의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심산인 게 분명했다.

카리엘은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해 북부 변경백까지 포함된 마스터 셋을 이끌고 남부로 가려는 것이었다.

자칫 북부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북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성국 입장에서도 남부 연합만 이득을 보는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을 테니 침묵할 터였다.

아이론과 성국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남부 연합군에 대한 압박.

그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생각해 낸 것이다.

‘아직 어리신데…….’

시키리오 후작이 속으로 감탄하며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리엘은 당연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데이비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두 명의 마스터가 왔다면 우린 세 명의 마스터가 가면 될 일. 이참에 동생들에게 좋은 선물을 갖고 가는 것이 좋을 듯싶소만?”

마치 ‘난 은퇴하니 상관없지만, 동생들을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카리엘.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아켈리오 후작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은 황궁으로 복귀할 때까진 전하의 검일 것이옵니다.”

아켈리오 공작 역시 상관없다는 듯 답하자 글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소신과 대공가의 기사단도 전하를 돕고 싶사옵니다.”

글렌의 말에 카리엘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을 통해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의 합류를 기꺼이 허락했다.

‘전생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겠군.’

초대 대공의 무서에 실전까지 빠르게 치렀으니 글렌의 성장은 더 빨라질 것이다.

이렇게 세 명의 마스터와 미래의 마스터까지 대동한 황태자군이 완성되었다.

병력 규모는 좀 부족하지만 그건 남부 변경백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중요한 건 전원 기사단장급 이상의 실력을 보유한 친위대에 마스터 셋이 포함된 전력이 남부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중앙에 알려라. 시급을 요하는 일이니 마법 통신을 사용하도록.”

“예!”

감청당해도 상관없다는 듯 마법 통신을 사용하라는 카리엘의 명에 전령이 황급히 뒤돌아 달려갔다.

카리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전령 덕분일까?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제국 수도에 황태자군이 남부로 향한다는 소식이 쫙 깔렸다.

그러자 기세 좋게 진군하던 남부 연합군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컥 멈춰 버렸다.

동시에 연합군 특유의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개개인의 이득에 따라 분열하는 특징.

그것이 남부 연합군에 독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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