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7. 화산에서의 혈전 (3)
벨푸르스와 화산 폭발로 관심을 끌어 서부에 제국군의 주력군이 몰려들었다.
거기다 더해서 성국마저 주력군을 이끌고 서부로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북부군 역시 그에 발맞춰서 서부로 올 수밖에 없었다.
‘북동부가 비었다.’
카리엘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만약 자신들의 이목을 이곳으로 집중시키고, 다른 곳에서 일을 벌인다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1. 카루프 화산을 터뜨리기 위해 라플라 화산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것.
만약 이런 계획이라면 진짜는 그곳에서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건 북동부가 비어 버린 상황에서 확률이 낮아진다.
2. 대륙의 이목을 서부로 집중시키고, 흑마법사들의 주요 전력은 제국에서 빠져나간다.
현재 성국과 제국 북부의 주요 전력이 서부로 넘어왔으니 동북부의 경계가 약해졌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흑마법사들이 제국을 빠져나가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단순히 제국을 빠져나가는 것을 넘어 동대륙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
전생에서도 그랜드 마스터에 오른 글렌에게 썰려 나가는 마계의 군대를 보고 동대륙으로 튄 전적이 있는 놈들이었다.
문제는 현재의 제국은 그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현 시점에서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곳은 딱 두 군데였다.
바로 거인의 길과 혹한의 협곡.
공국이 틀어막고 있는 협곡과 성국 옆에 있는 협곡인 이 두 곳은 신화 시대에 생겼다고 전해지는 동대륙과 연결된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중 혹한의 협곡은 이름처럼 춥고 산세가 험해서 상인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미친놈들은 동료가 죽어도 기어코 넘어갈 놈들이었다.
‘지금 상황에 흑마법사가 도망가는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웬만하면 흑마법사들을 완전히 소탕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적의 주력을 이곳에서 깎아 내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들이 동대륙으로 넘어간다면 그곳에서 문제 일으킬 것이 자명했으나, 카리엘의 입장에선 그렇게 해 주면 더 좋았다.
‘이참에 동대륙 놈들도 흑마법사들의 매운맛 좀 봐야지.’
그렇게 마음을 정한 카리엘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잘만 이용하면…….’
이걸 잘만 이용하면 제국 입장에서도 굉장히 이득이 될 것 같자 카리엘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지어졌다.
거기다 명분만 잘만 쌓는다면 자신의 은퇴를 막는 수작질까지 확실하게 차단할 수 있을 듯했다.
카리엘이 음흉한 미소와 함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타리온이 황급히 다가왔다.
“전하.”
“적들이야?”
“그렇습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
“성국군인가?”
“예.”
“얼마나 남았지?”
“1시간 이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보고에 카리엘이 고민하고 있을 때, 까마귀가 나타나 그의 앞에 부복했다.
“전하, 보고드립니다. 동쪽 지역 7천 보가량 떨어진 곳에 흑마법사로 추정되는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까마귀의 보고에 카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의 대계를 위해서라면 동료를 사지로 보내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는 흑마법사들의 지독함에 치가 떨렸다.
분명 지금도 이곳이 사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시간을 벌기 위해 주저 없이 병력을 보낸 것이었다.
바로 그때 카리엘의 앞에 반투명한 창이 나타났다.
[정령왕의 파편이 깨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벽히 깨어나지 않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가서 계약을 시도하세요]
[3시간이 지날 때마다 계약할 확률이 하락합니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화산 폭발의 위력이 강해집니다.]
반투명한 창이 나타나자 카리엘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 그는 타리온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곳으로 직접 가야겠다.”
“전하.”
“차라리 저기가 안전할 거야. 해야 할 일도 있고.”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궁 기사들에게 임무를 전달하려 했다.
바로 그때, 그림자 하나가 황급히 소식을 전하러 왔다.
전서구가 전달한 쪽지를 넘겨받은 카리엘은 그것을 읽다가 표정을 굳혔다.
“역시 이 새끼들은 뭐든 진심이라니까.”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쪽지를 바라보았다.
「벨푸르스 잔당 일부가 서북부로 향하고 있습니다.
일부는 전하의 예상대로 바다로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서부 변경백에게 가로막혔습니다.
소신과 서부 주력군 일부가 서북부에 합류할 예정이니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에비드 디 데이비어 글로든-」
“……서부군까지 오는 겁니까?”
타리온이 쪽지를 읽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자 카리엘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상황은 아니야.”
카리엘은 서부로 모이는 제국의 기둥들을 생각했다.
제국을 지탱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 개의 기둥.
데이비어 공작.
베르시오 후작.
아켈리오 후작.
세 명의 마스터가 서부에 전부 모였다.
그렇다는 건 이곳 서북부에 제국의 중심 전력이 죄다 모여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즉, 서북부에 흑마법사들이 어떤 함정을 파 놨어도 힘으로 박살 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흑마법들의 주 계획이 동대륙으로 튀는 것이라 할지라도 화산 폭발을 일으켜 제국의 전력을 깎아먹는 것도 주요 계획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카리엘이 직접 박살 낼 생각이다.
동시에 흑마법사들의 주 계획 역시 훼방을 놓을 생각을 했다.
“이 서신을 서부로 보내. 이건 중앙으로 보내고.”
“예.”
카리엘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그림자.
“타리온.”
“예, 전하.”
“너와 친위대만 이끌고 화산을 오를 생각이다. 남은 이들은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이 못 올라오도록 막아.”
“전하, 아니 되옵니다!”
황궁 기사들의 황급히 부복하면서 아니 된다 했지만 이번만큼은 카리엘도 단호하게 말했다.
“적들이 못 올라오도록 막는 것, 그것이 곧 나를 지키는 길이다. 황궁 기사들은 나의 명령을 따라 적들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
“명을 받듭니다!”
단호한 카리엘의 명령에 황궁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가자.”
“예, 전하.”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은 황급히 그를 업고 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친위대가 뒤따라 움직였다.
“하온데 전하, 서신은 무슨 내용입니까?”
“동대륙으로 튀려는 흑마법사들을 그냥 보내면 아쉽잖아. 그래서 수를 좀 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뻥 뚫린 북동부를 통해 도망치려는 놈들을, 성국을 압박해 귀찮게 한다.
동시에 동부군을 움직여서 녀석들을 압박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흑마법사들을 귀찮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거인의 산맥에 자리를 잡은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로 하여금 흑마법사들이 거인의 산맥을 쉬이 넘을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성국-제국-공국으로 이어지는 연합.
흑마법사들을 막으려면 바로 이런 다국적 연합이 필요했다.
본래라면 서북부의 일이 끝나고 천천히 진행되었을 대륙 회의를 앞당겼다.
흑마법사가 예상보다 큰 혼란을 가져왔고, 이제는 아이론 연맹과 성국, 그리고 공국마저도 무관한 일이 아니게 되었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대륙 회의가 빠르게 진행될 거야. 그러면 주관할 실무자가 필요할 터. 폐하께서 직접 하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여기에 묶여 있지.”
“설마 두 황자 저하들을?”
“그래, 황태자를 위한 마지막 시험. 그게 대륙 회의가 될 거야.”
카리엘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회의를 주관할 두 황자에게 힘이 실리려면 내가 은퇴해야 해.”
“혹…….”
“그래, 정식으로 나의 은퇴를 윤허하고 두 황자에게 대륙 회의를 주관하게끔 해 달라고 적었다.”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게 바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마법사는 카리엘을 괴롭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카리엘은 지금 이 상황이 오히려 좋았다.
‘은퇴가 앞당겨졌군.’
황제와 대신들도 더는 미루지 못할 터.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카리엘의 황태자 퇴위를 확정 짓고 대륙 회의를 주관할 것이다.
“화산 폭발만 잘 막아 내면 자유인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말리고 싶었다.
제국의 많은 이들이 카리엘을 인정하고 있기에 황태자 자리에 남아 주었으면 했지만, 은퇴할 생각에 신난 카리엘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가자.”
“……예.”
타리온이 카리엘과 잡담을 나누면서 올라가는 동안에도 화산 꼭대기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카리엘을 업고 있는 타리온이 속도를 높였다.
카리엘은 마치 지구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처럼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켈리오를 막기 위해 나타났던 모든 이들이 피 떡이 되어 흩어져 있는 모습이 살벌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마스터가 카리엘을 위해 만들어 둔 피의 길.
그 길을 타리온이 빠르게 올라갔다.
“더 빨리 가야겠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타리온이 걱정스레 물었다.
자신이 힘든 것보다 몸이 약한 카리엘이 빠른 속도에 무리할까 걱정된 것이다.
그러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빨리.”
“예. 최고 속도로 간다. 잘 따라와.”
타리온은 뒤에서 따라오는 친위대에게 짤막하게 말을 남기고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토토가 다급한 표정으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이런!”
6단계에 이른 무인, 그것도 속도에 특화된 자가 전력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전원 5단계 무인인 친위대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카리엘을 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위대가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의 속도로 화산에 오르자 순식간에 산 정상 부근에 도착해 버렸다.
“전하.”
“화산은 어떻소?”
자신을 마중 나온 아켈리오에게 묻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죽어 있었다.
“장로급이었소?”
“그렇습니다.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제가 올라오는 순간 마법을 끝마쳤는지…….”
아켈리오가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막지 못했습니다.”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만든 피의 길만 바라보아도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은 건 자신이 할 일뿐.
그워어어어어!
용암 아래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
“저것인가?”
카리엘이 화산 중심부에 가서 아래를 바라보았다.
“드래곤이라도 잠든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아켈리오와 기사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것 같은데?”
“예?”
“저 소리가 무슨 드래곤이야?”
카리엘의 말에 아켈리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성에 실린 마력을 볼 때 드래곤 피어와도 흡사합니다. 적어도 그에 준하는 존재가 아닐는지요?”
“아니…….”
아켈리오의 말에 카리엘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어느새 나타난 수르트가 웃으면서 나타났다.
-애새낀가 본데?
“너도 그렇게 들리지?”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에겐 괴성처럼 들리는 울음소리.
하지만 카리엘과 수르트에겐 괴성이 아닌 전혀 다른 소리로 들려왔다.
-으아아아앙!
마치 아기 울음소리와도 같은 거대한 울음소리.
다른 이들과는 상반된 소리에 카리엘이 혼란스러워할 때, 갑자기 반투명한 창이 다시금 나타났다.
[아기 정령이 흑마법사에 의해 강제로 깨어나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서 달래 주세요.]
“이런 미친…….”
카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는 순간, 용암이 요동치면서 그 안에서 거대한 불의 거인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타리온이 황급히 카리엘을 붙잡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아켈리오 역시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를 만들어 대응하려 했다.
그런데 카리엘은 오히려 태연하게 불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의 거인 역시 그런 카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음?”
-우으?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리엘과 불의 거인.
어느새 둘 사이는 붉은 기운이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작은 불덩이 모습을 한 수르트가 들어가 공명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에 아켈리오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가만히 물러나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마치…… 역사책에 기록된 초대 황제 폐하를 뵙는 것 같군.”
아켈리오의 중얼거림에 모든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의 주인이라 불렸던 초대 황제가 생각날 정도로 경이로운 모습에 모두가 숨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여 방해가 될까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카리엘과 불의 거인 간에 공명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다리는 이들.
그런 그들의 바람을 들어준 것일까?
흔들렸던 붉은 마력 간의 공명이 서서히 안정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