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6. 배신자를 처단하라!
방어선을 구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몬스터들에게 길을 터 준 군부.
물론 서북부의 모든 군부가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서북부의 군대 전체가 카리엘을 죽이는 데에 동원되었어야 했다.
즉, 배신자는 군부 중 일부였고, 카리엘이 움직이는 길목에 있던 배신자가 방어선을 연 것이다.
-아직 그들에게선 연락이 없소?
-그렇소.
-아직은 없는 듯싶소.
제국을 배신한 자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흑마법사들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다면…….
-이젠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소.
-후, 각자 살길을 찾아야겠군.
결국 실패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자 모두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흑마법사가 실패한 것을 대비해서 각자 살길을 터놓았기에 지금부터는 사력을 다해 황태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각자 흩어져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애초부터 이 모임은 흑마법사에 의해 급조된 빈약하기 그지없는 것에 불과했으니 도와줄 의리 따윈 없었다.
-모두 살아서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배신자들이 검은 수정구에서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흑마법사가 비밀리에 건네준 연락용 수정구에서 모두의 모습이 사라지자 가만히 수정구를 보고 있던 남자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가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이상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만 죽겠군.”
실질적으로 몬스터에게 길을 열어 준 이는 마지막까지 남은 남자 하나였기에 자신만 독박 쓰고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까지 흑마법사가 성공하기를 희망했지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다.
“무조건 죽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자신을 포함해 배신자들이 흑마법사와 손잡은 이유가 뭐였던가?
그들이 준비한 것이 그만큼 치밀했고, 성공했을 시에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컸기 때문이다.
처음엔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제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거절했지만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그들에게 결국 넘어가 버렸고, 여기까지 와 버렸다.
‘그래도 살길을 찾아봐야지.’
죽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바늘구멍만큼 작은 살길이라도 찾기 위해 방도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살아야 다음 기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밀 거점에서 나와 몰래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옷을 갈아입었다.
바로 그때,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급보입니다.”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에 방금 일어난 것처럼 연기하며 문을 열었다.
“몬스터의 습격이냐?”
“아닙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흑마법사에게 습격받았다 하옵니다.”
부하의 보고에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지휘부로 향했다.
‘결국 실패했군.’
흑마법사들이 실패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아직 기회는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위기만 넘기면 황태자를 죽이고 다시금 기존의 계획을 진행시킬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만 넘기면 살 수 있다.’
살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지휘부로 향했다.
“왔나?”
중앙에 앉은 한 어린 청년.
그리고 그 옆에는 방어선을 총지휘하고 있는 군단장이 옆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앉아 있는 자가 누군지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 남자에게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늦었군.”
“소, 송구하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고개를 숙인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그런 그에게 군단장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네가 마지막일세.”
“예?”
딱딱해도 언제나 자신에겐 따뜻한 말을 해 주었던 군단장이 냉기가 철철 넘치는 음성으로 말하자 남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순간 황태자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어딜 그렇게 갔다 왔지? 매우 바빠 보이던데?”
“그, 그건…….”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위함이었나?”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남자는 이 자리가 사지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끝났군.’
눈을 질끈 감으며 그렇게 생각한 남자에게 군단장이 말했다.
“메르헨 부대장.”
“……예.”
“능력이 있음에도 진급에서 밀려났던 그대를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군단장의 말에 메르헨 부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아카데미를 상위권으로 수료하고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맥에 밀려 부대장에서 더 올라가지 못한 남자.
그가 바로 메르헨이었다.
이 자리도 다른 장교들과 다르게 밑바닥에서 겨우 기어 올라온 것이었다.
“제국을 배신하다니…….”
“……송구합니다.”
메르헨을 향해 고함치는 군단장을 제지한 카리엘.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메르헨을 보며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수도에서 겪어 본 바에 의하면 제국을 배신한 쓰레기들이 상당히 많더군.”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의 표정이 굳어졌다.
“억울하지 않나?”
“…….”
“그대만 독박 쓰고 죽기는 억울할 것 같은데…….”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의 표정이 떨리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마치 독심술이라도 쓰는 것같이 정확히 메르헨의 속마음을 대신 말해 주는 카리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르헨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제국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카리엘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다른 배신자들과 달리 자신은 가족도 없었다.
그렇기에 잠시 고민했던 메르헨이지만 다시금 입술을 깨물며 카리엘의 달콤한 유혹을 이겨 냈다.
‘……가족도 없는 홀몸이다. 나 혼자 죽는 게 맞아. 후회는 없다.’
메르헨이 이렇게 생각할 때, 카리엘이 말했다.
“귀족의 숨겨진 사생아 출신이라 능력이 있어도 출셋길에는 한계가 있었지. 그런 현실에 괴로워하며 가족조차 만들지 않았어.”
“…….”
“자식을 너처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결혼조차 하지 않은 것이지.”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중년이 다 되었음에도 결혼조차 하지 않고 버틴 정확한 이유를 카리엘의 입에서 듣자 단단했던 결심에 다시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후회는 없을 거다. 너 혼자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카리엘이 말끝을 흐리면서 손을 들어 고개를 숙인 메르헨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하면서 카리엘이 말했다.
“너를 이렇게 만든 이들에게 복수하고 싶지는 않나?”
카리엘의 물음에 메르헨의 눈이 사정없어 떨리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너의 본가는 상당히 쓰레기더군. 너와 같은 사생아도 많고, 그들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도……. 무엇보다 더 역겨운 것은 온갖 더러운 짓을 하면서도 직계가 저지른 범죄를 전부 사생아들에게 떠넘겨 왔다는 것.”
“…….”
“너도 그것을 알기에 일찍부터 연을 끊고 혼자 힘으로 지내 왔겠지. 하지만 사생아라도 혈연은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결국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이용당하고 출셋길이 제한됐지.”
카리엘은 메르헨에게 다시 물었다.
“복수하고 싶지 않나?”
“……가능하옵니까?”
“네 목숨을 살려 주는 건 어렵지. 하지만 그들을 멸문시키는 건 가능하다.”
카리엘의 말에 떨렸던 메르헨의 눈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원했던 것.
그것은 흑마법사들이 속삭였던 것처럼 출세가 아니었다.
출세는 자신의 진짜 목적을 위한 무기가 되어 줄 뿐.
“정말 복수해 주실 수 있사옵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묻는 메르헨.
그런 메르헨을 이해한다는 듯 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생아로 살며 수없이 휘둘려 왔을 그의 입장에선 지금도 자신을 이용만 하고 버릴 것이라는 의심이 남아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말했다.
“그대처럼 의심하는 재상에게 약속했다. 그대는 죽고 가문도 망하겠지만, 그대의 가족에게만큼은 살길을 열어 주겠다고. 그리고 난 실제로 그리했다.”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의 눈에 서렸던 의심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그대의 목숨을 살리는 것은 약속할 수 없다. 하지만 그대가 복수하고자 하는 가문만큼은 확실히 멸문시켜 주지.”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은 눈에 깃든 한 줌의 의심마저 사라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하문하십시오. 제가 아는 모든 것은 지금부터 전하의 것이옵니다.”
메르헨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메르헨을 일으켜 세웠다.
“배고프군. 일단 뭐라도 좀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볼까?”
다정한 표정으로 운을 뗀 카리엘은 메르헨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작했던 이야기는 아침을 지나 정오가 되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먼저 흑마법사에 관한 정보였다.
이 부분은 메르헨도 아는 게 많지는 않았다.
흑마법사들이 일방적으로 다가와서 손잡자고 한 것이기에 많은 부분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쓸 만한 정보는 있었다.
“재밌군. 화산에 수작질을 부렸다라…….”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메르헨의 다음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는 메르헨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본가는 벨푸르스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서부에서도 악명이 높을 정도로 쓰레기 짓을 많이 하는 가문이라 벨푸르스조차 그들과 손잡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메르헨 자체가 오래전에 연을 끊다시피 했던 터라 많은 정보를 아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벨푸르스를 잡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었다.
암상인, 범죄 조직과 연관되었기에 서부의 어둠 속에 숨어든 벨푸르스의 자금줄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배신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후. 이 부분은 자네에게 사과해야겠군. 미안하다.”
카리엘은 메르헨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타리온과 군단장, 아켈리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인 메르헨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전하…….”
“제국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이 부분만큼은 사과해야지. 이 모든 게 제국의 중앙이 썩었기에 벌어진 일이니까.”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메르헨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문제를 방치한 황실의 잘못이 크다. 그로 인해 너와 같은 이들이 만들어져 이 사달이 났군.”
“…….”
카리엘의 사과에 메르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래도 앞으로는 다를 거다. 아직 미진하지만 중앙의 썩은 부분은 상당히 도려낸 상태고, 지방 역시 천천히 바뀌어 나갈 테니까.”
두 황자 중 누가 차기 황태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만큼은 이뤄질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이미 제국 내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가장 먼저 할 일은 내실을 다지는 것이 될 테니.
마침 흑마법사라는 명분도 있으니 카리엘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서부 정도는 은퇴하기 전에 내가 직접 청소해 주지.”
“……저승에서나마 전하를 응원하겠습니다.”
메르헨의 말에 카리엘이 그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처형당하기 전에 이뤄질 것이니 죽기 전에 보고 먼 길을 떠나도록.”
카리엘의 말에 메르헨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 감사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르헨의 어깨를 두드려 준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후, 서북부의 지휘관급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