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4. 마무리를 지어 봅시다!
마침내 황제파와 무솔리니가 죽었다.
제국민들은 환호했으며, 혹시나 하고 기대감을 품었던 지방 귀족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곧 은퇴한다며 힘 빠진 황태자 취급을 하던 신진 귀족들 역시 다시금 숨어들었다.
반면에 중앙 귀족들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현 황태자인 카리엘이 은퇴한다면 귀족파는 갈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만이 제국이 뭉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중립파 귀족들마저 황태자를 지지하며 뜻대로 움직여 주었다.
“오래 걸렸소.”
대전 회의에 참석한 카리엘이 귀족들을 보면서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황제파를 쓸어버리는 데 오래 걸렸다는 의미와 서부로 움직이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그동안 카리엘은 처음 자신이 주관했던 회의에서 약속한 바를 지켰다.
각 부처를 닦달해서 능률을 끌어올렸고, 지지부진하던 사안들을 빠르게 처리해 버렸다.
또한 제국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예산안을 빠르게 통과시키기도 했다.
귀족파와 중립파 모두가 카리엘의 뜻에 따라 주겠다고 마음먹은 상황에서 가능했던 기적적인 일이었다.
덕분에 은퇴하기 전 제국의 내실을 다지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뤄 두었던 마지막 일인 벨푸르스 정벌을 하러 갈 시간이 된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황태자의 의견을 따라 주어서 고맙소.”
카리엘이 앉아 있던 계단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대전의 공기가 축 늘어졌다.
분명 약속한 대로 황태자는 은퇴하는 것뿐일 텐데 묘하게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다.
귀족파 귀족들 입장에선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어째서인지 아쉬움만 들었다.
이런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카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 서부로 갈 준비는 끝나셨소?”
“예, 소신이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갈 생각이옵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데이비어 공작이 고개를 숙이면서 답했다.
“월크셔 공작도 끝나셨소?”
“그렇습니다. 2황자 저하께서 직접 마법 병단을 이끌 것이옵니다.”
월크셔 공작이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카리엘을 보며 말했다.
사실 그도 이번 원정에 참여하고 싶었다.
비록 데이비어 공작처럼 지고한 경지에 닿지는 못했지만 마도사의 경지에 한 발자국 정도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 공작 중 한 명은 이곳에 남아야 했다.
무엇보다 제국 전체에 숨어든 흑마법사를 잡기 위해서라도 중앙에 자리를 잡은 고위 귀족이 진두지휘를 해야만 했다.
“감찰부는 어떻소?”
“모든 준비를 끝내 놨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이제 출발하는 일만 남았군. 출발은 3일 뒤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시오?”
“뜻대로 하시옵소서.”
카리엘의 물음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후,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안건이 끝냈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모든 귀족들이 카리엘을 바라보며 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어떤 이는 아쉬움을, 어떤 이는 후련함을, 어떤 이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카리엘은 그런 귀족들에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대전 회의의 끝을 알렸다.
“이것으로 대전 회의를 파하겠소. 앞으로 대전 회의에서 나를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니 표정들 푸시오.”
카리엘이 대전에서의 마지막 회의를 웃으면서 끝내고자 했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귀족들 중에 웃는 자는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카리엘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흠! 다들 부족한 황태자를 이끌어 주느라 고생하시었소. 조심들 돌아가시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내려와 천천히 대전을 나섰다.
그렇게 대전 회의를 주관하던 황태자가 나갔음에도 귀족들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고요함을 깬 것은 월크셔 공작이었다.
“앞으로 황태자의 기준점은 카리엘 전하가 되시겠군.”
월크셔 공작의 말에 모든 귀족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약했던 황태자였지만 짧은 시간 보여 준 역량은 역대 황태자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위대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미래의 황제를 위해 모든 기반을 닦고 물러나는 모습은 귀족들 사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동안 암군들 때문에 부족한 능력에도 탐욕만 가득했던 황족들만 만나다가 이런 황태자를 보니 적응이 잘되지 않았다.
특히 심한 건 귀족파였다.
2황자와 3황자의 재능 중 누가 더 뛰어나냐고 싸우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가 되었든 황태자가 되는 순간 부담감이 크겠어.”
데이비어 공작이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월크셔 공작도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나가 버렸다.
그렇게 공작 둘이 빠져나가자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전 안에는 묘한 아쉬움만 남긴 채 모든 귀족들이 나갔다.
쿵!
거대한 대전 문이 닫히면서 현 황태자의 마지막 대전 회의가 끝나는 순간, 황궁 안에 있는 관료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수도에 있는 모든 기관들이 원정을 위한 준비를 돕기 위해 움직일 때, 카리엘 역시 개인적인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해 친위대를 불러 모았다.
“완성되었다고?”
“그렇습니다.”
토토가 조심스레 다가와 함께 만든 무서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그것을 가만히 살펴본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내가 직접 가다듬는 수밖에 없겠네.”
카리엘의 말에 친위대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높은 무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딱 맞는 무술은 만들 수 없다.
높은 단계에 올라설수록 스스로 자신에 맞는 검술이나 무술로 만들어 나가야 하기에 이들이 한 것은 카리엘의 몸에 맞게 기초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만약 카리엘이 4단계나 5단계의 경지에 올라선다면 스스로 강체술을 개조해야 할 것이다.
“전하, 꼭 직접 가셔야 하겠습니까?”
타리온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카리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을 낚으려면 그만한 미끼를 던져 줘야 하는 법.”
단호하게 말한 카리엘은 친위대를 돌아보았다.
“이제 너희들에게 했던 의뢰도 끝났다.”
카리엘의 말에 친위대의 눈동자가 커졌다.
“다들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지.”
그의 말에 모든 친위대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들이 괴짜가 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전생에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판단한 결과 이들은 그냥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그저 나름의 사정으로 괴짜가 되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일 뿐.
“들었겠지만 난 이번 일을 끝으로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니 더 이상 이런 지원을 해 줄 수가 없다.”
“…….”
카리엘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러니 이제 본래의 삶으로 돌아들 가거라.”
“……소신은 전하의 원정에 따라가고 싶사옵니다.”
토토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겠나?”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타리온에게 언뜻 듣기로 토토에게는 괴짜 취급을 받으면서도 황궁에 남아 운동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랬기에 수도 인근 지역도 아닌 먼 서부 지역으로 가는 여정인 데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토토가 따라오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예.”
토토의 말에 다른 친위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에 다른 괴짜들도 토토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챈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출정까진 시간이 있으니 당일까지 고민해 봐.”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친위대와 타리온을 물렸다.
그리고 그들이 사력을 다해 만들어 준 강체술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제법이네.
“그렇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친위대가 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화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인지 밖으로 흘러나오는 화기가 뭉치며 붉은 마력으로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동안일 뿐, 어느새 흩어져서 다시금 연기처럼 변해 버렸다.
-수련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3단계냐?
“이게 뭔 3단계야?”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투덜거렸다.
진짜 3단계의 마력 방출은 훨씬 안정적이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배부른 소리 하는군.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코웃음 쳤다.
남들은 마력을 각성하고 체내의 마력을 운용하는 것조차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데, 카리엘은 벌써 그 단계를 뛰어넘었다.
강체술을 수련할 때부터 이미 2단계에 있었으니 말 다 한 것이다.
단지 엄청난 양의 화기 때문에 빛을 못 봤을 뿐.
-어쩌면 이 녀석도 재능이 있을지 모르겠군.
“뭐?”
수련에 정신이 팔려 있어 그 말을 듣지 못한 카리엘이 뒤늦게 돌아보자 불덩이는 고개를 저으며 하던 거나 마저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투덜거리면서 다시금 수련에 집중하는 카리엘.
***
3일 동안 밤낮없이 수련했음에도 결국 친위대가 만들어 준 무서는 전부 익히진 못했다.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화기의 통제력이 많이 상승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가끔가다 화기가 통제력을 잃고 날뛰었으나 이젠 그런 시간이 대부분 사라졌다.
“후, 현재는 이 정도인가?”
카리엘이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화기란 녀석과는 평생을 같이 가야 하기에 은퇴 후에 천천히 다듬으면 그만이다.
“천천히 하자. 은퇴 후엔 남는 게 시간일 테니…….”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황태자궁을 나서려고 했다.
대기 중인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친위대 전원이 일렬로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결정은 끝났나?”
“예, 전원 전하와 서부까지 함께하기로 했사옵니다.”
토토가 대표로 말하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겠나?”
“예, 나중에 헤어지더라도 서부까지는 함께하고자 하옵니다.”
토토의 말에 다른 친위대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체념한 말투로 말한 카리엘은 마차에 올라탔다.
배려해 줘도 알아먹지 못하는 괴짜들이라며 혀를 차자 밖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친위대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매일 툴툴대면서 불만이 많은 황태자였지만 은근히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웃으면서 뒤따랐다.
그렇게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붉은 제복을 입은 친위대와, 그것이 부럽다는 듯 붉은 휘장을 두른 황태자궁의 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하며 데이비어 공작과 중앙군이 기다리고 있는 광장으로 향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모든 군인들이 군례를 올리고 데이비어 공작 역시 검집째 들어 올려 가슴에 붙였다.
사실상 서부 원정을 이끄는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카리엘에게 보인 예였다.
그런 그들의 예를 익숙하게 받아 준 카리엘이 광장에 모인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하지. 그곳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더라도 절대 헛된 희생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
카리엘의 말에 병사들의 눈에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믿어라, 비록 곧 은퇴하는 황태자지만 그대들의 희생만큼은 마땅히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짧은 연설.
그렇지만 어느 때보다 묵직한 연설에 모든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뱉으며 사기를 끌어 올렸다.
바로 그때, 황궁에서 내관 하나가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인접 국가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옵니다. 지방에서도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내관의 말에 근처에서 듣고 있던 데이비어 공작과 타리온의 표정이 굳어졌다.
“……전하.”
데이비어 공작의 부름에 카리엘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중심부가 와해되면 끝날 일이오. 속전속결로 끝냅시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카리엘의 뜻이 확고함을 느낀 데이비어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을 근처에서 바라보던 3황자 세리엘의 눈에 경외심이 담겼다.
어느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고함.
고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아직은 미숙한 자신에게선 볼 수 없는 연륜과 완고함이 느껴졌다.
‘언젠가는 나도…….’
세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고는 말없이 카리엘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