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2. 은퇴 각을 잡는 카리엘 (2)
황제와 귀족들에게 낚인 카리엘은 잠시 멍한 상태로 지금의 상황을 부정했다.
하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태자가 재상의 빈자리를 임시로 채우는 것에 다들 찬성하는가?”
“예, 폐하!”
황제의 물음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찬성해 버렸다.
그러자 카리엘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인생을 조질 수는 없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느냐?”
다급하게 황제를 불렀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멍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카리엘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었다.
승자의 여유를 보인 황제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던 카리엘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리 급하게 결정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좀 더 심사숙고해 보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 그동안 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태자의 능력은 충분할 터.”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한발 물러섰다.
이미 함정에 빠진 이상 설득은 어림도 없으니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소자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승자의 미소를 보인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흠, 그래. 당혹스러울 수 있지.”
황제다 이해한다는 듯 말하면서 일어나 카리엘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짐과 귀족들이 찬성했으니 태자가 재상의 직위를 겸하는 것은 가결된 것으로 하자꾸나.”
“현명하신 결정이시옵니다!”
황제가 카리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하자 모든 귀족들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결국 카리엘이 비어 있는 재상의 자리를 임시로 채우는 것이 ‘임시’로 가결되어 버리면서 사실상 황태자 신분으로 재상까지 되어 버렸다.
대전 회의에서 가결되었으니 후에 정식으로 칙령만 내린다면 카리엘은 재상이 되는 것이다.
‘시간은 벌었다.’
칙령은 나중에 받는 것으로 재상직에 오르는 것을 유예한 카리엘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여기선 답이 없다. 일단 궁으로 가자.’
철저하게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여기서 반박해 봤자 자신에게 불리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고개를 조아리고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전 회의가 끝나자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왔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궁으로 가자.”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타리온이 황급히 뒤따랐다.
***
궁으로 돌아온 카리엘이 품속에 가지고 있던 퇴위서를 거칠게 던져 버렸다.
“전하.”
타리온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카리엘이 분노를 참아 냈다.
강체술을 통해 화기를 많이 다스렸지만 아직 완벽한 건 아니었다.
뼈대를 구축한 강체술에 근육과 살이 붙고 그것을 익혀 나갈 때까진 조심해야 했다.
“은퇴 계획이 박살 나게 생겼어.”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헛기침했다.
내심 기뻐하는 그였지만 열받은 카리엘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런 타리온의 속내를 눈치챈 카리엘은 혀를 찼다.
‘내 편은 아무도 없네.’
카리엘은 툴툴거리면서 은퇴 계획을 수정했다.
황제파가 박살 난 이후 황제궁에서 박혀 있던 황제가 이리 나서는 걸 보면 카리엘의 은퇴를 순순히 들어줄 가능성이 낮았다.
이런 카리엘의 예상처럼 현재 황제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두 황자 중에 한 명이 새로이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 되자 귀족파가 황제에게 항의하는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거기다 굵직한 일들은 그동안 황태자가 대부분 처리해 왔으니 황제 입장에선 마음이 편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황태자가 황위를 노린다고 불안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리엘이 은퇴하고자 하는 마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황제 입장에선 지금의 상황이 좀 더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건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싸우더라도 제국의 상황이 안정된 후에나 싸우고 싶어 했고, 중립파 역시 제국이 지금 상황에서 분열되기는 바라지 않았기에 카리엘이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미루면서 마침 비어 있는 재상의 자리에 앉혀 국정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거기다 제국민들까지 카리엘을 지지하는 상황.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최악이네.”
카리엘이 투덜거리면서 은퇴 계획을 수정했다.
지금 당장 퇴위서를 들고 찾아가 봐야 반려될 확률이 높았기에 일단 여론을 조성해야 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동생들을 띄워 주는 것이었다.
“이대로 진행해.”
“굳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잠시 반항했던 타리온이었지만 카리엘이 째려보자 곧바로 깨갱 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비록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정신 못 차리고 당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여론전은 자신 있지.”
카리엘이 전생을 떠올리면서 씨익 웃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평가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 외의 다른 여론을 만드는 것은 잘했다.
전쟁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
이들이 왜 적인지 제국민들을 납득시키는 것.
어째서 일시적이나마 세율을 더 올려야 하는지를 납득시켜 가면서 정국을 이끌었다.
반란과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귀족들과 반목하면서 그에게 믿을 건 그랜드 마스터라는 제국의 검과 여론뿐이었다.
제국민들과 귀족들을 이간질하며 폭발하지 않는 선을 찾아 아슬아슬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그 경험을 지금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다음 날부터 카리엘의 여론전이 시작되었다.
「흑마법사의 잔당을 추적하는 2황자!」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군부를 수월하게 통솔하는 3황자!」
「은퇴를 하고 싶다고 밝힌 황태자. 차기 황태자는 2황자와 3황자의 이파전으로?」
타리온을 통해 여론전을 시작한 카리엘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거지. 제국민들의 눈을 동생들에게 돌리고 황태자의 은퇴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리면 돼.”
2황자와 3황자의 공을 치켜세우면서 카리엘이 은퇴가 곧 다가올 것처럼 포석을 깔아 두는 것.
이것으로 카리엘은 제국민들이 황태자의 은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타리온이 보기에 카리엘의 여론전은 실패할 것 같았다.
카리엘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열심히 여론전을 펼치는 카리엘.
며칠 후, 그런 그의 희망을 산산이 부수는 일이 발생했다.
“전하…….”
타리온이 안타깝다는 듯,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현실을 외면하며 마지막 발악을 해 보던 카리엘에게 황제의 칙령이 떨어졌다.
「황태자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를 임시 재상에 임명한다.」
황제의 칙령이 내려지고, 이 사실이 제국 수도에 퍼지면서 카리엘이 며칠간 했던 여론전은 쓸모없는 게 되어 버렸다.
2황자와 3황자를 치켜세운 것조차 의미가 없었다.
귀족파 진영의 신문사에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위해 황태자의 은퇴를 좀 더 미루는 게 좋다는 의견을 밀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2황자와 3황자의 황태자 경쟁을 밀었던 소수의 제국민들 역시 납득해 버렸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타리온의 물음에도 카리엘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였다.
-힘내라.
수르트마저 앙증맞은 팔로 카리엘의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서 카리엘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 동생들에게 서신을 보내 봤다.
황태자 자리를 놓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싶다 폐하께 상소를 올려 달라는 요구였다.
해 주기만 하면 카리엘이 직접 황제한테 가서 상소를 올린 황자를 밀어준다고 꼬셔 보았지만 두 동생은 단호했다.
「지금도 뒈질 것 같습니다!」
「혼자만 튈 생각입니까? 같이 죽읍시다!」
2황자와 3황자의 서신.
딱 한 문장씩만 적은, 아주 짧은 답장들이었지만 카리엘의 희망을 박살 내기엔 충분했다.
“…….”
황제가 직접 보낸 칙령.
재상을 상징하는 패.
거기다 동생들의 서신까지.
책상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실시간으로 카리엘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정신없이 얻어맞은 카리엘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 가야겠다.”
“……전하.”
타리온이 이미 늦었다며 만류하려 하자 카리엘이 이를 갈며 말했다.
“거래라도 해야겠어.”
“예?”
“서북부가 안정화되면 바로 물러날 거다. 그거라도 확답을 받아야겠어.”
그러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차마 말리지 못한 타리온이 조용히 마차를 준비시켰다.
***
최고 속도로 황제궁에 도착한 카리엘이 곧바로 알현을 청했다.
“바쁠 터인데 어찌 왔느냐?”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황제를 보면서 속으로 이를 간 카리엘.
스트레스로 마약까지 하던 양반이 요즘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비록 완벽하게 끊지는 못했지만 마약을 하는 양 자체는 많이 줄어든 것 같았다.
반대로 카리엘의 스트레스는 늘어만 갔다.
“폐하, 소자 이번 일이 끝나면 은퇴하겠다 말씀드렸었습니다.”
“그건 짐도 알고 있다만 상황이 좋지 못하구나.”
“예, 그렇기에 딱 ‘서북부 사건’만 끝내고 은퇴할까 합니다.”
카리엘이 그 이상은 못 하겠다는 듯 말하자 황제가 가만히 카리엘을 눈을 바라보았다.
불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본 황제는 혀를 찼다.
딱 봐도 이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면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벨푸르스까진 해결하거라. 너를 습격했던 배후일지 모르니 직접 해결하는 게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대전 회의도 짐을 대신하여 진행하거라.”
“폐하!”
“최근 짐이 몸이 좋지 않아 회의를 이끌기엔 무리가 있었노라.”
황제가 그렇게 말하면서 팔을 걷었다.
흑마법사가 조제한 마약 때문인지 팔 이곳저곳에 검은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언제부터 이리되신 것이옵니까?”
“약을 끊으려고 하자 이리되더군.”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약을 끊은 게 독이 되었나?’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어의는 뭐라 하옵니까?”
“자신의 지식으로는 전부 알기엔 무리가 있다는군. 신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흑마법사를 잡아야 하는 것이옵니까?”
카리엘의 물음에 황제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일반 흑마법사로는 안 될 것 같다는구나. 이 마약을 조제한 녀석을 잡지 않는 이상 완벽한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군.”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마약을 막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혹시나 걸릴 때를 대비해서 이중 삼중으로 마약에 장치를 해 놓은 것이다.
‘마약이 생명 유지까지 시켜 주는 것이었나?’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대전 회의를 소자가 주관하는 것은 아니 되옵니다. 자칫 대리청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회의 주기를 늘리시지요.”
“황태자인데 무에 문제일까. 태자는 걱정이 너무 많군.”
“귀족들이 반발할 것이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그 말이 나올 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두 공작의 동의를 받아 놓았다. 중립파 역시 모두 동의했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전 회의 때부터 지금까지 완벽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다.
덫에 걸린 토끼가 발버둥 친다 한들 빠져나갈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여론전을 펼치고 동생들을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의미 없는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폐하께서 주관하시기 힘들 때만 소자가 대신하겠사옵니다.”
“그리하거라.”
마지막까지 발악해 봤지만 의미가 없었다.
황제가 매일 아프다고 하면 결국 대전 회의를 주관하는 건 카리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곤하실 텐데 소자가 폐하를 귀찮게 해 드렸군요.”
“허허, 괜찮다. 오랜만에 즐거웠느니라.”
황제의 웃음에 속으로 이를 간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자,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부디 복잡한 일은 잊고 옥체를 회복하시는 데만 전념하시옵소서.”
“그리하겠다.”
카리엘이 웃으면서 대답하는 황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곧장 황제궁을 빠져나왔다.
“타리온.”
“예, 전하.”
“지금 당장 각 부처에 알려서 서북부 관련 자료들 다 긁어 와.”
분노로 불타는 눈빛으로 명령을 내린 카리엘.
그러자 곧장 시종들을 시켜서 각 부처로 보낸 타리온이 재빨리 마차의 문을 열었다.
“6개월. 그 안에 다 끝내고 은퇴한다.”
새로운 은퇴 계획을 설정한 카리엘은 서부의 일까지 마친 후 은퇴 각을 그려 보았다.
“할 수 있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지워 버리며 다짐한 카리엘.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타리온은 자신의 주군을 안쓰럽게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