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37화 (37/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2. 은퇴 각을 잡는 카리엘

황제의 명으로 대전으로 이동하는 내내 찜찜한 기분을 풀 수 없었던 카리엘.

그런 그를, 타리온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

“이미 문제야.”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미 그의 감이 대전에 도착하는 순간 엿 될 것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셨잖습니까.”

“후, 그래. 근데 일이 터졌잖아.”

“전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최선을 다하셨으니 남은 건 신하들이 처리해야 할 일이지요.”

타리온의 위로에 카리엘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은퇴가 미뤄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타리온의 위로는 의미가 없었다.

이번에 터진 일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황제가 자신을 부를 정도라면 예삿일이 아니라는 거다.

‘흑마법사와 연관되었거나 벨푸르스에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높다.’

대전으로 자신을 부를 정도의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었기에 카리엘의 안색은 더더욱 어두워졌다.

‘전생엔 없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아.’

전생의 이 시기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고 하더라도 큰일이 터졌다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즉, 자신으로 인해 전생에 겪었던 미래가 변했다는 것이다.

‘뭔 일이 생기든지 무조건 은퇴한다!’

카리엘은 혹시나 해서 품속에 챙겨 온 퇴위서를 손으로 두드리면서 다짐했다.

자칫 어영부영하다가는 황궁에 붙잡혀 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무조건 은퇴 각을 잡을 거라고 되뇌며 대전 앞에 멈춘 마차에서 내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고해라.”

카리엘의 명령에 시종이 카리엘이 왔음을 고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대전에는 엄청난 숫자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변경백을 제외한 주요 귀족들은 다 모였군.’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황제에게 걸어갔다.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 폐하를 뵙습니다.”

카리엘의 인사에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래, 도서관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들었다만 사안이 급해서 부를 수밖에 없었구나.”

카리엘이 피곤한 티를 내자 황제가 그렇게 말하면서 위로하고는 내관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내관 하나가 카리엘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서북부 산맥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정찰되었습니다.”

“서북부?”

내관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전하. 현재 서북부 지역의 산맥에서 화산이 터질 위험이 있다고 하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인해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남하할 가능성이…….”

“이런 미친!”

카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몬스터 웨이브라고? 게다가 화산 폭발?’

전생에선 없었던 일에 카리엘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태자는 언동에 주의하라.”

“송구합니다.”

카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머리를 굴렸다.

한동안 침묵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리엘을 보며 황제가 헛기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리엘.

맹렬히 돌아가는 머리는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느라 바빴기에 주변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카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대책은 정해진 것이옵니까?”

“논의 중이었다.”

황제의 대답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안이 급하오니 일단 병력부터 보내시옵소서.”

“그걸 논의 중이었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앙군 일부를 빼서 지원하면 될 일을 왜 미적거리냐는 표정을 짓자 군부대신이 앞으로 나섰다.

“현재 중앙군의 상당수가 이미 서부로 이동한 상태이옵니다. 여기서 더 빼면 중앙군의 치안이 위험해지옵니다.”

군부대신 하워드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치안을 따지는 하워드를 죽여 버릴 듯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가 헛기침을 했다.

황제파 대부분이 물갈이되면서 밑에 있던 하워드가 군부대신의 자리를 차지했다.

문제는 이 양반도 무능하다는 것이다.

황제파만 아닐 뿐, 줄타기를 통해 중앙 관료 체제에 입성한 인물이었다.

이 무능한 인물이 지금 군부대신 자리를 차지한 이유는 어떤 파벌에도 발을 깊숙하게 담그지 않은 덕이었다.

한마디로 무능하지만 큰 사건들을 해결하고 파벌끼리의 협상이 끝날 때까지 임시로 자리할 존재.

그게 현재의 군부대신이었다.

“후, 폐하, 사안의 심각성은 알겠사오나 어째서 소자가 대전에 와야 했는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아직 어린 황태자가 이 정도 중대한 사안에 참여하는 건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했다.

그렇기에 카리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자 턱을 괴고 있는 황제가 말했다.

“태자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다.”

“소자한테 말이옵니까?”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황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군부대신의 의견으로는 서부로 향했던 군 일부를 서북부로 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구나.”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표정이 일그러지면서 하워드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황제였다면 저 새끼부터 잘라 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긴 눈빛에 군부대신이 움찔거리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른 귀족들도 똑같은 생각이옵니까?”

“데이비어 공작은 반대하더군.”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데이비어 공작을 바라보다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소자의 의견에 의미가 있사옵니까?”

카리엘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문제는 태자의 습격 사건과도 연관된바, 짐은 태자의 의견을 중히 생각할 것이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황제가 한 말은 자신에게 결정권을 주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반대하고 중앙군 일부를 서북부로 보내 버리고 싶었다.

문제는 그렇게 했다간 자신의 은퇴 계획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점이다.

은퇴냐, 벨푸르스를 조지느냐로 고민하던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 소자의 생각은 반대이옵니다. 현재 나오는 벨푸르스에 관한 정황증거들은 미래의 제국에 큰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지금 뿌리 뽑지 않을 경우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옵니다.”

카리엘의 답에 군부대신이 다급히 말했다.

“전하, 그리되면 중앙군을 서북부로 보낼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리되면 치안에 문제가…….”

하워드의 말에 카리엘이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비어 있는 공백은 수도 방위군이 담당하면 될 일이다!”

“그, 그렇게 되면 수도가…….”

“그 비어 있는 곳은 황궁의 병력이 일부 지원하면 되지 않나! 잉여 병력을 보내 지원하고, 부족하면 휴가 나가 있는 병력을 불러들여서 임시로 채우면 될 일이다! 강제 복귀한 인원은 나중에 보상해 주면 될 일이고!”

노성을 터뜨리는 카리엘의 말에 한 귀족이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언제 수도를 습격할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한 귀족의 말에 카리엘이 어째서 중앙의 치안을 들먹이면서 중앙군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는지 알았다.

불안한 표정을 보이는 몇몇 귀족들.

그들은 흑마법사들이 중앙의 공백을 뚫고 또다시 누군가를 습격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것이었다.

황태자조차 습격했는데 다른 귀족들이라고 안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서북부는 버리자는 것인가?”

카리엘의 싸늘한 물음에 앞으로 나섰던 귀족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서부로 향하는 병력 일부만 돌리시고 귀족들의 사병들을…….”

“전하, 국가의 위기이옵니다. 일단 서북부를 우선하여…….”

“국가 위기 상황에서 중앙군의 치안 공백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귀족들이 앞다투어 카리엘을 설득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을 황제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자신이 당했어야 할 일을 카리엘이 대신 감당해 주고 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귀족들이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리엘이 싸늘한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보자, 열심히 앞으로 나섰던 귀족들이 하나둘 입을 닫으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카리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조짐은 분명 국가 위기 상태가 맞소. 거기다 흑마법사나 암중에 숨어 있는 조직의 위협 때문에 중앙군의 치안 공백도 위험한 것은 맞지.”

다 인정한다는 듯한 카리엘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자신들이 이겼다는 듯한 미소를, 카리엘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벨푸르스의 위험성은 크오. 다들 잊었나 본데 벨푸르스는 황궁에 끄나풀을 심고 나를 습격했소.”

“그러니 더더욱 중앙의 치안을…….”

“그럼 병력을 빼서 저들을 놔두면?”

카리엘의 말에 앞으로 나섰던 귀족의 입이 다물렸다.

“지금의 위기를 넘기자고 더 큰 적을 놔둔다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카리엘의 신랄한 비판에 앞으로 나섰던 귀족의 표정이 구겨졌다.

“전하, 중앙군 일부가 서북부로 간다 한들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면 부족할 것이옵니다.”

그래도 군부에서 짬밥도 드셨다고 자신의 식견을 말하는 하워드.

확실히 그의 말처럼 중앙군 좀 더해진다고 대륙 서북부의 몬스터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이상하군. 서북부의 일이라면 우리만의 일이 아닐 텐데?”

카리엘의 의문에 몇몇 귀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머리 좀 돌아가는 귀족들은 단번에 무슨 의미인지 파악했다.

“서부의 연맹과 성국을 끌어들이시려는 것이옵니까?”

“대륙의 위기는 같이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겠소?”

데이비어 공작의 물음에 카리엘이 말했다.

“혹, 생각하신 바가 있으시옵니까?”

데이비어 공작의 말에 카리엘이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었다.

자신이 몸을 사린다면 판세가 이상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론 연맹과 성국에 사신을 보내 이 문제를 같이 해결하고자 논의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 추가적으로 성국은 흑마법사에 관련된 사안을 논하도록 하면 될 일이고. 아이론 연맹은 제국의 사정을 설명하며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하고 서부 연맹군을 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카리엘의 말에 데이비어 공작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월크셔 공작 역시 그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립파 귀족 대다수가 카리엘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의 표정을 본 카리엘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훌륭하구나.”

황제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낚였다!’

그렇게 생각한 카리엘이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렸어도 자신을 시험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하워드가 줄타기로 군부대신이 되었어도 머리는 돌아가는 양반일 텐데 이런 멍청한 짓거리를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파였다면 얘기가 달랐을 테지만 하워드는 황제파가 아니었다.

“그 정도 식견이라면 잠시나마 재상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겠구나.”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재빨리 생각했다.

‘미적거리다가는 × 된다!’

생각과 동시에 카리엘의 몸이 움직였다.

황급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소자 아직 어리고 미진하여 재상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사옵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카리엘의 말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황제 역시 말없이 그런 카리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니다. 태자는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황제의 표정을 확인한 카리엘은 ×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황제는 카리엘에게 복잡한 일을 떠넘길 마음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그저 그 자질을 확인하기 위한 최종 시험장이나 다름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