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11. 다시 만난 최강의 기사 (2)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카리엘은 은퇴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잠드는 그 순간까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실 카리엘은 이렇게까지 빠르게 은퇴 각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미적거리다간 고생길이 훤히 보였기에 마음이 다급해진 것이다.
마침 대공가를 불러들일 기회까지 잡게 되자 더는 미루지 않고 은퇴 각을 잡을 생각을 했다.
-계획보다 빠른데?
“운이 좋았어.”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은 행운이 겹쳐서 일어난 일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일이 카리엘의 의도대로 흘러갔기에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은퇴 각이 잡힌 것이다.
-복잡한 상황을 이렇게 풀다니……. 역시 머리 하나는 영악하다니까.
수르트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 칠 정도로 복잡했던 상황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서 결국 그토록 바라던 은퇴 각을 잡게 되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머리는 내가 너보단 한 수 위지.”
카리엘이 한껏 턱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복잡한 상황을 잘 정리하기만 해도 다행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을 넘어 은퇴 각까지 잡아 버린 자신이 대견했다.
-야, 나도 한때는 거인을 다스리는 왕이었어. 정치라면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았다고.
“그럼 지금은 왜 그 모양인데?”
카리엘이 수르트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만 복잡한 상황이 나와도 진저리 치면서 뽀르르 사라지는 수르트.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가 왕이었던 시절이 빤히 보였다.
-흠흠!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다 보니 격이 낮아져서…….
“머리 굴리는 거랑 격이 뭔 상관이야?”
-영혼이 줄어드니 생각하는 게 좀 어려워져서 그래. 정말이다? 진짜야.
믿지 않는 카리엘을 보면서 수르트가 과거에 무스펠헤임을 다스렸던 당시의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의심스러운 카리엘의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헛소리 말고, 글렌은 어때? 보고 싶다고 징징거렸잖아.”
카리엘의 물음에 변명하던 수르트가 잠시 입을 다물더니 앙증맞은 팔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잘 모르겠다.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보지 않는 이상은 뭔가를 알 순 없겠어.
한때 대륙 최강의 반열에 올랐던 제국의 검, 글렌.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경지는커녕 마스터의 경지에도 오르지 못했기에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
수르트 역시 격이 한없이 깎여 나가 기생하는 처지이니 지금 단계에선 알 수가 없긴 했다.
-그래도 제법 괜찮긴 했어.
아직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는 글렌의 마력을 느끼면서 수르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마력을 갈무리한 수준이 놀랍긴 했지. 그 녀석, 네 동생들과 같은 나이 아냐?
“맞아.”
-괴물이긴 하네. 확실히 젊은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가 된 것도 이상하진 않아.
수르트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봤자 아직 각성하기 전이지만.”
카리엘은 아직도 전생에 목격했던 한 광경을 잊지 못했다.
글렌이 초대 대공의 무서를 완벽하게 복원하고 자신에 맞게 변형시키면서 나타난 모습.
깨달음을 보여 준다면서 하늘을 향해 검을 그었을 때 보았던 구름이 갈라졌던 광경을 광경은 지금 회상해도 전율이 돋을 정도였다.
“이번엔 더 빨라질지도 모르겠네.”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세 명의 마스터가 있는 현 상황에 그랜드 마스터가 된 글렌까지 포함된다면?
장담컨대 흑마법사들의 침공이나 인접 국가의 공격 따위론 제국에 피해를 입히기 어려울 것이다.
-확실히 걱정은 없겠어.
그랜드 마스터와 마스터의 격의 차이를 알고 있는 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히려 제국을 잘못 건드렸다간 명분을 잡고 영토를 확장시킬 수 있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만약 자신이 황제일 때 그런 상황이 왔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며 미소를 그렸다가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황급히 고개를 젓는 카리엘을 향해 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너 사실은 황제가 되고 싶은…….
“역소환되고 싶냐?”
-……생각을 했을 리가 없지.
카리엘이 정색하며 말하자 얼른 말을 바꾼 수르트가 헛기침했다.
-흠흠! 그보다 대공 그 양반도 괜찮아 보이던걸.
“그래?”
카리엘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공가의 현 가주 역시 선대 대공처럼 검술에 큰 재능은 없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래. 글렌이란 놈보다 완벽하게 마력을 제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 타리온이 못 알아챌 리가…….”
-그 녀석과 비슷한 경지니 그러겠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두 눈이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나도 처음엔 약한 놈인 줄 착각했다니까? 너한테 무릎 꿇을 때 감정이 격해졌는지 잠시 제어가 흔들렸는데 그때 겨우 알아챘지.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찼다.
“정말 타리온 수준이야?”
-데이비어인가? 그 공작 놈에 비하면 보잘것없긴 하지만 확실히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완벽하게 숨기는 걸 보면 네 시종 놈이랑 비슷한 수준은 되어 보이는데?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은 있었지.
“이상한 점?”
-뭔가 어긋났다고 해야 하나?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서 확실하진 않군.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워낙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 버렸으니 확실히 알 순 없었을 것이다.
“뭐,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은퇴할 몸이니 남은 것은 저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다.
막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초대 대공의 무서까지 제공해 줬으니 카리엘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었다.
“잠깐, 수르트. 대공가의 다른 기사들의 수준은 어때?”
-같이 따라온 녀석들? 글쎄…… 자세한 건 몰라. 다만 드러난 기세로만 따지면 황궁 기사보다 좀 달리는 정도?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면서 확실하진 않다고 했다.
높은 경지에 이를수록 드러낸 기세의 양을 조절할 수 있기에 대공처럼 일부러 약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수르트의 말을 듣던 카리엘이 다급하게 타리온을 불러 확인했다.
“음, 확실히 그림자에 비하면 부족하오나 정예 황궁 기사들의 수준과는 엇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정도 전력을 가진 곳을 멸문시켰다고?’
전생에 글렌 하나만 남고 모두 전멸한 대공가.
그렇다는 건 벨푸르스의 저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카리엘이 예상한 것처럼 벨푸르스의 저력이 강하다면 이렇게 얌전히 있는 게 말이 안 되었다.
아무리 변경백과 중앙군이 포위한다 하더라도 예정된 멸망을 기다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전생에 대공가를 무너뜨릴 때와는 다르게 몇 년 앞당겼다지만 그래도 가진 전력이 있을진대 이렇게 얌전히 있는다?
“느낌이 싸하군.”
“뭔가 걸리시는 점이 있사옵니까?”
“벨푸르스가 너무 얌전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포위당한 상황이라 그런 것 아니옵니까?”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의 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떠나기 전에 수를 써 놔야겠어.”
“방도가 있으십니까?”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이미 중앙군과 서부 변경백까지 동원했으니 군사적으로는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북부는 성국을 견제하기 바빴고, 남부군은 남부 연합과 인접국들을 감시해야 했다.
동부군 역시 해협을 타고 오는 해적들과 공국을 뚫고 오는 동대륙의 범죄 집단을 잡기 바빴다.
남은 건 귀족파였지만 그들 역시 두 황자를 따라 움직이느라 바빴다.
“벨푸르스를 황궁에 불러야겠어.”
“가능하겠습니까?”
“와서 해명하라고 해야지. 자신들이 암상인들과 흑마법사랑은 관련이 없다는 걸 해명하라고 판을 깔아 주는 거야.”
“외통수군요.”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오지 않는다면 그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야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다급함이 느껴졌지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서부 연합군과 중앙군을 동시에 감당하긴 어렵겠지요.”
“무슨 소리야? 두 공작가도 참전시켜야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들까지 말입니까?”
“흑마법사와 암상인이라면 나를 습격한 자들과 연관되었을 수 있으니 두 공작가를 움직일 명분이 되잖아.”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타리온이 너무 과한 것 같다고 말하자 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해야지. 괜히 대충 처리하려 했다가 피 볼 수 있어.”
전생에 대충 처리했다가 피똥 싼 경험이 있기에 확실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괜히 벨푸르스를 남겨 두었다간 은퇴한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으니 완전히 박살 내야 했다.
게다가 은퇴 각을 잡기 전에 흑마법사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서, 적어도 이쪽 서대륙에서는 완전히 쫓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의 욜로 라이프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으리라.
“마스터까지 있으니 만약의 사태에도 대비할 수는 있겠지.”
데이비어 공작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으니 뭔 수를 쓰든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
황태자를 은퇴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기자 갑자기 바빠졌다.
1. 황제에게 직접 초대 대공의 무서 사본과 황궁 보고에서 대공가의 무구 하나를 주게끔 설득해 대공가의 힘을 강화한다.
2. 벨푸르스를 황궁으로 불러들인다.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서 두 공작가를 서쪽으로 이동시킬 준비를 한다.
3. 흑마법사와의 연관성이 의심된다는 것을 빌미로 성국과 남부 연합을 압박해 제국으로 사신을 보내도록 한다.
4. 대륙 회의를 개최해 흑마법사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해 서대륙에서 몰아낸다.
순식간에 할 일을 정리한 카리엘이 곧바로 움직였다.
1번과 2번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사전 작업에 들어갔다.
3번과 4번 같은 경우 자신이 밑바탕을 만들어 두고 남은 건 동생들에게 떠넘기면 될 일이다.
아마 흑마법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황태자 자리를 손에 쥐느냐 마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미래의 일은 동생들에게! 난 내 할 일만 하고 튄다.”
그렇게 다짐하며 곧장 황제궁으로 찾아갔다.
“폐하.”
“후, 마음대로 하거라.”
황제가 질렸다는 듯 카리엘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런 황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 카리엘이 절을 올리고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들었지? 황궁 도서관에 전달해 놔.”
“예, 전하.”
황제궁의 시종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는 황급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본 카리엘은 이 소식을 들을 글렌을 생각하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카리엘이 황제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했기에 결과가 나오자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
그가 글렌을 위해 한 일은 매일같이 황제에게 찾아가는 것.
문안 인사를 핑계로 아침부터 찾아가 은근슬쩍 대공가를 지원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다.
그러고는 저녁쯤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고 찾아갔다.
바쁘다고 안 된다면 다음 날 문안 인사를 드릴 겸 찾아가고, 점심까지 뭉개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 나왔다.
그러는 동안 은근히 대공가의 지원에 대해 얘기를 꺼내니 나중에는 황제가 질려 버렸다는 듯 질색하며 닥치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결과 고작 며칠을 못 버티고 황제가 질렸다는 듯 허락을 해 버린 것이다.
“타리온!”
“예, 전하.”
카리엘의 부름에 타리온이 황급히 달려왔다.
“법무부에 가서 벨푸르스 백작과 전대 백작 부인을 소환하라고 해. 내무부는 폐하의 정식으로 폐하의 재가를 청하고. 귀족회에도 알려.”
“알겠습니다.”
“감찰부에도 알려서 벨푸르스를 조사할 조사단을 꾸리라고 전하고. 법무부 허가 떨어지면 강제집행 하라고 해.”
“예!”
타리온이 대답과 동시에 사라지자 카리엘은 만족스레 웃었다.
“이걸로 2번 끝. 남은 건 1번인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급히 글렌을 찾아갔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느낌이 좋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