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9. 황궁의 비밀 (2)
타리온에게 명령을 내린 카리엘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라…….”
전생의 자신은 이 시기에 골골대면서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기에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큰 줄기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면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놓친 것이 뭐지?”
카리엘은 찜찜한 기분에, 표정을 한껏 일그러뜨리면서 생각했다.
그는 큰 줄기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회귀한 이후 줄곧 적어 왔던 노트를 뒤적거렸다.
“정계에 참여한 시기가 너무 늦었어.”
몸이 회복된 후에 참여했던 전생을 생각하며 혀를 찼다.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또 무슨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니 추측조차 쉽지 않았다.
그래도 파벌을 가리지 않고 박살 낸 덕분에 공작가들과 변경백들의 드러난 전력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범죄 조직들을 박살 내면서 이어진 끈들도 전부 확인을 끝냈다.
물론 끝내 알 수 없었던 조직들도 있었는데, 타국이 끊어 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니란 건가?”
-복잡해졌군.
어느새 나타난 수르트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왔냐?”
-그래.
“오늘은 닦달 안 하네?”
평소처럼 수련하라고 말하지 않는 수르트를, 카리엘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네가 수련할 때가 아니란 것쯤은 알겠다.
수르트의 불길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본 카리엘은 피식 웃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한 수르트가 질색할 정도로 카리엘이 안고 있는 문제는 심각했다.
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데, 황제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연관되어 있는 상황.
어쩌면 제국의 중심부가 무너질 수 있는 이 상황에서 카리엘이 할 수 있는 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문제는 골치 아프다고 이걸 그냥 덮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반드시 문제가 된다.’
황제로 있으면서 숱한 위기를 넘긴 카리엘의 감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이걸 억지로 덮고 은퇴하면 카리엘의 욜로 라이프는 얼마 못 가서 끝장날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쩌면 귀족파의 반란이나 인접 국가의 침공, 흑마법사들의 난 같은 큼직한 것들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해결하고 가야 하나…….”
카리엘이 보기에 적어도 셋 중 하나에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해결할 수 있겠냐?
수르트의 매서운 질문에 카리엘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걸 잘못 건들었다간 감당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대충 매듭짓고 동생들한테 넘기는 게 제일 좋은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동생들은 지금 자신의 습격 사건만으로도 멘탈이 터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더 일을 얹어 줬다간 감당이 안 될 것이 뻔하므로 자신이 해야만 했다.
-황제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상태가 메롱한 놈이라 도움은 안 되겠군.
수르트의 신랄한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암군들 때문에 제국의 국력이 끝도 없이 추락했는데, 현 황제의 대에서도 멈추는 것 없이 계속해서 추락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타리온이 준 자료들을 봐야 뭐라도 추측해 볼 수 있겠어. 지금 상황에선 답이 없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 굴리는 것을 포기하고 수련을 시작했다.
머리가 복잡할 땐 운동하는 것이 최고였기에 토토와 이리스를 불러서 수련을 시작했다.
물론 그 생각을 후회하기까지는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분명 머리를 식히려고 단순한 패턴의 운동을 하려고 했건만, 어느새 자신의 몸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살 좀 해!”
-좋아! 좋아! 더 시켜!
강도 높은 강체술 수련 때문인지 온몸에 흡수되는 화기의 양이 확 늘어났다.
수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처자는 굉장히 마음에 드는군.
“닥쳐.”
수르트가 이리스를 칭찬하며 만족스럽게 웃자 카리엘이 표정을 구기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 좀만 쉬자.”
“예.”
카리엘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생각에 잠기자 이리스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었다.
바닥에 앉아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에게 타리온이 조용히 다가왔다.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생각보다 얇은 뭉치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추가로 발견된 것이 많지 않습니다.”
이미 재상과 연관된 것 대부분은 감찰부에서 털어 갔기에, 카리엘이 이미 직접 확인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청렴한 이미지를 구축했던 재상이라 범죄 조직과 연관된 것조차 몇 단계를 건너서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마저도 극소수에 불과했으니 추가로 발견되었다고 해 봐야 얼마 되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별거 없네.”
카리엘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다시 한번 훑어본 타리온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런데 이건 뭐야?”
익숙한 이름을 본 카리엘은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재상이 그와 정기적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마약쟁이를?”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하위 귀족에 불과한 이를 재상이 만난 것으로도 신기할진대, 권력 서열에서도 밀려나 마약에 빠져든 패배자를 정기적으로 만났다?
“냄새가 나네.”
“저도 수상해서 더 파 보았습니다만 나온 건 없었습니다.”
“찾기 어렵겠지.”
여우 같은 재상이 증거를 남겨 놨을 리가 없다.
“마약쟁이들 위주로 찾아봐. 한미한 귀족들이나 평민도 상관없어.”
“예.”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고개를 숙이고 다급히 사라졌다.
“마약이라…….”
자신이 보기에 재상이 직접 마약을 할 타입은 아니었다.
마약쟁이들이라면 전생에 수도 없이 보아 왔다.
망해 가는 나라와 연이어서 몰려오는 전란 속에서 마약에 기대는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상은 그런 느낌이 안 들었다.
그렇다는 건 재상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마약쟁이와 접선할 터.
“폐하인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봤자 마약에 불과한데……. 재상이 감추고 있는 비밀치고는 너무 약해.”
황제가 마약을 한다?
그건 분명 문제가 되긴 할 테지만 그래 봤자 잠시 말만 나오고 끝날 하찮은 문제다.
재상이 황제의 명예를 생각하는 타입은 아닐 게 분명하니 좀 더 내밀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재상을 떠보지그래?
“대답해 주겠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는지 수르트가 말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러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가서 묻더라도 뭔가 떠볼 수 있는 무기 하나쯤은 들고 가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고?
갑작스러운 카리엘의 행동에 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딱히 더 수련할 것 같지도 않은데 뭐 하러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재상에게 떠보라며?”
-진짜 갈 생각이냐?
“일단 사전 작업 좀 해 놔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답한 후 빠르게 몸을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재상이 답할 확률은 한없이 낮겠지만 그 낮은 확률을 쥐꼬리만큼이라도 높이려면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그가 찾은 곳은 바로 감찰부.
“재상과 연관된 모든 정보들을 가져와.”
“예!”
카리엘의 명령에 가뜩이나 바쁜 감찰부원들이 재상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기 시작했다.
다크서클로 가득한 그들을 보면 안쓰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별게 없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하지만 별거 없는 정보들이라도 이용하기에 따라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총장.”
“예, 전하.”
“이거 가지고 파 봐.”
카리엘이 던져 준 종이 뭉치를 받아 든 포돌스키가 훑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이것은…….”
“폐하와 연관된 것 같다.”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 폐하의 흠을 찾자는 게 아니야.”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재상이 감추고 있는 비밀, 그게 뭔지 알아야겠다.”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상을 압박할 작업을 시작했다.
***
카리엘은 타리온이 가져온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찰부를 통해 공개적으로 수사하기 시작했다.
공개적인 수사와 비공식적인 조사가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수면 밑에서 꽁꽁 숨겨 두었던 진실들이 조금이지만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약쟁이들을 많이도 만났군.”
“그런 듯싶습니다.”
타리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을 구길 때였다.
포돌스키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왜? 뭐 건진 것이라도 있어?”
“새롭게 건진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수상한 점 하나는 발견했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공개적인 수사로 발견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포돌스키는 그동안 타리온이 가져온 정보들을 면밀히 분석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건?”
“전부는 아니오나 마약쟁이들 중에 신관들과 연관된 자들이 있사옵니다.”
“마약쟁이가 신전과 친하다라……. 혹시?”
카리엘이 ‘혹시?’ 하는 표정으로 포돌스키를 바라보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흑마법사와 연관됐다고 추정되는 신전들입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이 커지겠어.”
“……그럴 것 같사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타리온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번 사건은 황태자의 습격 사건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타리온은 언론에 재상이 마약했다고 흘려. 마약상이랑 연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예.”
“감찰총장은 언론이 물어뜯으면 공개적으로 발표하고.”
“그리하겠습니다.”
카리엘은 자신의 명령을 받고 황급히 나가는 둘을 보면서 다시 머리를 굴렸다.
모아 온 정보들을 보면 재상은 마약쟁이들을 여럿이나 만나 왔고, 그들이 흑마법사와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았다.
“신전이라…….”
어쩌면 성국과도 연관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카리엘의 고심은 더 깊어져 갔다.
내부와 외부 모두 연관된 상황이라 자칫 양쪽과 전쟁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만들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이 단순하게 황제파와 성국만 연관되었을지, 아니면 다른 파벌도 연관되었을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더욱 문제였다.
“포돌스키를 보면 중립파는 큰 관련은 없는 듯하기도 하고…….”
카리엘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턱을 괴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적인지 명확하지 않은 지금이 제일 답답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카리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멈칫거린 카리엘이 황급히 마약쟁이들과 연관된 신전들을 살펴보았다.
“중앙…… 동남부…… 남부…… 중앙…….”
지도가 펼쳐져 있는 곳에 압정을 하나씩 꽂으면서 표시했다.
“이상하군.”
서부만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깨끗했다.
북부도 없었지만 애초에 북쪽은 마약에 관해선 칼 같은 곳이라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마약으로 북부 전체가 붕괴될 뻔한 이후로 마약에 관해선 법이 굉장히 엄해졌기 때문이다.
“서부만 깨끗하다라…….”
서부가 마약과 연관될 여지가 아주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륙에서 1, 2위를 다투는 항구 밀집 지역이라 엄청난 양의 마약들이 밀수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신전과 연관된 마약쟁이들이 없는 상황이라 명확하다 보긴 어려웠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 카리엘은 곧바로 감찰부원을 불러 마약쟁이들의 출신지와 활동 지역에 대한 자료를 가져오라 명했고, 얼마 후 가져온 자료들을 토대로 지도에 압정을 박았다.
“확실히 이상해.”
서부가 지나치게 깨끗했다.
카리엘이 이상함을 느끼며 타리온과 포돌스키를 급히 불러들여 자세한 조사를 시작했다.
“확실히 서부가 수상합니다.”
“그래.”
서부가 수상하다 느끼면서 면밀히 조사한 결과, 이상한 결과가 나왔다.
유명한 마약쟁이나 마약상은 죄다 남부와 동남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그들의 출신지는 서부와 남부 경계선 출신이 많았다.
“서부 끝자락 출신이 활동은 동남부와 남부 접경 지역에서만 한다라…….”
“특이한 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흑마법사와 연관된 신전들 전체를 조사해 보았는데 서부만 깨끗합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서부에 유명한 가문이…….”
“대공가, 변경백, 벨푸르스 백작가가 있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생각에 잠겼다.
‘대공가의 문제가 단순 반란으로 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카리엘은 혀를 찼다.
‘전생의 황궁 기사단장을 빨리 볼지도 모르겠어.’
머릿속을 정리한 카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상을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