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9. 황궁의 비밀
카리엘이 혈태자라 불리며 황제파 귀족들을 때려잡는 동안, 두 황자 역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2황자가 마탑과 제국의 마법 관련 기관들을 모두 컨트롤하며 흑마법사와 신관에 관련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황자가 군권을 이용해 첩자들을 색출해 내고, 습격자들을 도운 귀족들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 제국 특수 정보기관과 데이비어 공작의 정보기관 둘을 동시에 운용해 첩자 색출에 들어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제국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흉흉해졌다.
신기한 건 분위기는 흉흉해졌지만 반대로 치안은 더욱 안정화되었다는 점이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잘못 걸리면 죽어.”
“한동안은 일용직이라도 알아봐야겠어.”
“후, 그럼 난 용병으로 뛰어야 하나?”
각 지역에 있는 범죄 조직들은 전부 활동을 멈추고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 잘못 걸렸다간 곧바로 목이 뎅겅 잘릴 판국이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진 다른 일이라도 해서 입에 풀칠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직원들이 살기 위해 일반적인 일을 구하게 된 원흉인 카리엘은 오늘도 황제파의 비밀 거점 하나를 박살 내는 중이었다.
“많기도 하네.”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폭 쉬었다.
수도의 거점들을 대부분 박살 냈을 때만 하더라도 금방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오만이었다.
3대에 걸쳐 해 먹은 황제파의 저력은 엄청났다.
하나를 박살 내면 또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고, 또 찾아내서 박살 내면 또 다른 곳이 튀어나왔다.
결국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며 중앙 지역 전체를 이 잡듯 뒤지는 중이었다.
“전하, 편안하시옵니까?”
오늘도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돌아온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네.”
“그러시옵니까?”
타리온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묻자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카리엘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쉬는 게 불만이냐?”
표정이 썩어 있는 타리온을 보면서 카리엘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자 뒤이어 온 괴짜들 역시 썩은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카리엘이 안 보는 사이 불만 어린 표정을 짓는 괴짜들을 본 카리엘은 혀를 찼다.
“쯧! 그거 좀 했다고 투덜거리기는…….”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괴짜들을 다독이기 위해 말을 이었다.
“직접 움직이는 건 오늘로 끝이야.”
그의 말에 타리온과 괴짜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말입니까?”
“그럼 이런 걸로 거짓을 말할까?”
타리온의 물음에 카리엘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택을 박살 내다시피 하며 기어코 비밀 거점을 찾아내 그 안에 든 재물들을 죄다 빼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동안 중앙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황제파의 거점을 죄다 박살 내서 그런지, 적어도 수도 근방에는 흔한 잡범들조차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얻을 건 진즉에 다 얻었잖아.”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의아함을 가득 담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과 괴짜들은 왜 고생한 것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
감찰부와 치안대는 서로 교대로 움직였고, 카리엘을 호위하는 황궁 기사마저 며칠에 한 번씩은 바뀌었다.
반면 타리온과 괴짜들은 주야장천 카리엘과 함께했다.
게다가 황제파를 직접적으로 조지는 것도 그들이 했다.
즉, 황제파의 비밀 거점을 터는 과정에서 가장 고생한 게 붉은 친위대라 불리는 자신들이었던 것이다.
“헛고생한 거 아니니까 표정들 풀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의아함이 가득 담긴 친위대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사실 수도의 비밀 거점을 털면서 황제파 소속의 고위 귀족들의 비리 증거들은 전부 확보했다.
그런데 왜 중앙 지역 전체를 털러 다녔느냐?
저들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타국과 붙어먹은 새끼들 혹은 수면 아래에 있는 조직과 연관된 놈들을 걸러 내기 위함이었다.”
카리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봤던 재상은 끝내 걸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황제파 귀족들 중에 타국과 붙어먹은 놈들이 몰래 출국하려고 하더군.”
“……예?”
타리온이 ‘왜 나는 몰랐지?’라는 표정으로 뒤에 시종들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볼 거 없어. 내가 너한테 보고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에게 카리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그거 입는다며.”
“이거…… 말입니까?”
“어. 내가 친위대를 부려 귀족들을 족치는 데 집중한다고 하는데 핵심인 네가 사라지면 저들이 의심할 거 아니야.”
“아…….”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미리 알려 주시지…….”
“너 표정 연기 못 하잖아.”
“연기 하면 소신이…….”
“아, 됐어. 어쨌든 일은 끝났으니 이제 수도로 가서 잡아 족치는 것만 남았어. 운 좋게도 황제파 귀족들 일부가 흑마법사에 연관된 신전과 엮여 있더라고.”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 보고받은 따끈따끈한 쪽지를 타리온에게 보여 주었다.
“황제파는 끝났군요.”
한 놈이 걸렸을 뿐이지만, 그에게 뇌물을 받은 자들은 다수였다. 황제파 귀족들 중에 그에게 뇌물을 안 받은 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폐하가 더 이상 미적거리시지 못할 정도의 명분을 찾았으니 청소해야지.”
‘그리고 은퇴다!’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킨 카리엘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친위대와 함께 황궁으로 복귀했다.
***
황궁으로 향하는 길.
은퇴의 순간이 목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내심 들떠 있던 카리엘은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황궁으로 가면서 도적이나 좀 잡으려고 했는데, 그 흔한 도적 떼가 단 한 명도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도적이 원래 이렇게 없었냐?”
“한동안 수도 근방에서는 안 보일 겁니다.”
카리엘의 물음에 함께 마차에 탄 타리온이 ‘네가 다 잡았잖아요!’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흠, 심심한데.”
“안전이 최우선이옵니다. 정 심심하시면 잠시 멈춰서 운동이라도…….”
“……얼른 가자.”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타리온은 시종들에게 주기적으로 보고받은 것 중에서 중요한 점만을 간추려 카리엘에게 전했다.
그렇게 심심한 복귀 길을 거쳐 수도로 입성한 카리엘.
“와아아아아!”
카리엘의 마차를 보자마자 환호하는 이들을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들 저래? 축제라도 한대?”
“전하를 보고 환호하는 것이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혈태자라고 할 땐 언제고?”
“좋은 뜻으로 붙인 것이지 않습니까?”
“혈태자가?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다고 하는데?”
“흠흠! 그것도 다 좋은 뜻으로…….”
포장해 보려는 타리온을 향해 손을 내저어 입을 다물게 한 카리엘은 창틀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각보다 활기차 보였다.
전생에 자신들을 욕하던 자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기에 마음속 한편이 간질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난 이제 위정자가 아니다.’
은퇴할 자신이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널 좋아하는 것 같네.
카리엘에게만 보이게끔 반투명하게 나타난 수르트가 창밖의 어린아이들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그러자 카리엘도 수르트의 시선이 향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아이들에게 잠깐이나마 손을 흔들어 준 카리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순간 전생에 자신을 향해 절규한 한 어린아이와,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서둘러 가 줘.”
“예.”
평소의 카리엘답지 않은 모습에 타리온이 잠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지만 이내 창밖으로 속력을 높이라는 명을 전했다.
***
명을 받은 마부가 빠른 속도로 광장을 가로질러 황궁 안의 황태자의 궁에 들어섰다.
그러자 카리엘이 복귀했다는 소식을 들은 궁 내부의 사람들이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토록 오지 않기를 바랐던 순간이 다가온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끝인가?”
재상부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재상은 카리엘의 복귀 소식을 들으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수도의 모든 비밀 거점이 털릴 때부터 황제파는 끝장난 상태였다.
그런데 카리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타국으로 튀려는 자들까지 함정을 파 모조리 잡아들였고, 마지막엔 지방에 있는 주요 거점까지 파악한 것이다.
중앙 지역에 집중한 것처럼 이목을 속이고는 황제파 소속의 귀족들을 예의 주시하며 그들의 행선지를 파악했다.
일부러 수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놔두고는 그들이 향하는 지역으로 가서 비밀 거점을 찾아낸 것이다.
이로써 황제파는 잔당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오셨는가?”
재상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포돌스키 감찰총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어서는 재상을 보며 포돌스키는 말없이 체포 영장을 뒤에 있는 부관에게 전했다.
“재상이 범죄와 연관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습니다.”
“긴말이 필요하겠는가? 가세. 죗값을 받으러 가겠네.”
담담하게 말하는 재상을 향해 다가가는 감찰부원들을 손으로 제지한 포돌스키는 옆으로 비켜서며 그를 안내했다.
그러자 재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의 명이셨습니다.”
“전하께오서?”
“마지막 가는 길, 명예만큼은 지켜 주겠다 하셨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잠시 멈춰 서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재상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이거 참, 전하께 또 한 번 얻어맞았군.”
재상이 카리엘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단번에 이해하며 한참을 웃다가 포돌스키에게 말했다.
“이제 와서 명예를 지켜보았자 뭐 하겠냐마는……. 아쉽게도 전하께서 의도하신 바는 이뤄 드릴 수 없을 것 같네.”
재상의 말에 포돌스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재상은 오해 말라는 듯 말했다.
“같잖은 자존심이 아닐세.”
재상의 말에 포돌스키가 의아함을 담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감히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분의 비밀이 있다고 해 두지.”
재상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하던 포돌스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설마!”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세.”
그 말을 끝으로 재상은 양팔을 감찰부원에게 맡기고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포돌스키가 입술을 깨물더니 황급히 부하를 통해 황태자궁으로 서신을 보냈다.
***
재상이 감찰부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리고 한참 후, 포돌스키에게서 온 서신 하나가 카리엘의 손에 들렸다.
“중요한 분이라……. 역시 폐하와 관련된 뭔가가 있는 건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그의 머리에 최악의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애써 부정해 보았지만 이성은 그가 생각한 것이 맞을 거라며 압박해 왔다.
“타리온!”
“예.”
카리엘의 다급한 부름에 타리온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상을 좀 더 캐 봐.”
“어떤 부분을…….”
“폐하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야겠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의 몸이 굳어졌다.
그런 그를 향해 포돌스키가 보낸 서신을 보여 주었다.
“최대한 자세하게 조사해. 그래야 이걸 덮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