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8. 황태자의 친위대? (3)
한동안 궁에만 박혀 있었던 황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을 사람들은 다 잡아들인 상태라 서서히 마무리되어 간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위 귀족들까지 잡아들이는가?”
“칼을 갈고 오셨군.”
감찰부를 찾은 카리엘을 멀리서 지켜보는 지식인들이 무섭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상황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하자 귀신같이 나와서 감찰부의 사기를 다시 끌어 올리는 모습에 전율을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고위 귀족들을 상대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 가던 감찰부가 황태자의 등장에 다시금 눈을 빛내며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고위 귀족 명단 가져와.”
“……전하께서 직접 가실 생각입니까?”
감찰총장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귀족파와 중립파가 전하를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뒷말이 나올 겁니다.”
감찰총장의 말처럼 분명 뒷말은 나올 것이다.
죄를 지었어도 같은 귀족들이기에 너무 과하게 움직이면 반발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명분이 완벽하니 한동안은 과격하게 움직여도 크게 반발은 하지 못할 터.
이때 모든 것을 끝내야 했다.
“상관없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감찰총장에 받은 명단을 타리온에게 던졌다.
“속전속결로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잡것들 때문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
카리엘의 의지를 느낀 감찰총장이 더는 염려 섞인 말을 하지 않고 금고에 보관해 둔 문서들을 꺼내 왔다.
“안내하겠습니다.”
“됐어. 바쁜 양반이 뭐 하러? 감찰부원 몇 명만 붙여.”
그렇게 말한 카리엘은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감찰총장의 명을 받은 고위 감찰부원 몇 명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
콰앙!
대문을 박살 내면서 들어간 한 백작의 저택.
“누가 감히! 헉! 저, 전하.”
“내 명으로 온 감찰부를 쫓아냈다지?”
“그, 그것이…….”
“황제의 명에 의해 집행된 체포 명령을 거부한 바. 죄는 더 가중될 것이니 알아 두도록.”
카리엘이 눈짓하자 뒤따라온 감찰부원들이 백작의 양팔을 잡았다.
“반항하는 이들은 다 죽여.”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싸늘하게 저택을 바라보았다.
강제로 백작을 붙잡고, 저택 안에 숨겨 둔 비리 문서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어떤 이도 반항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이려고 한다면 황궁 기사들의 검이 검집에서 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운 좋게 소각하다 멈춘 문서들을 찾아내 감찰부에 넘겼고,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반항하려고 해도 황태자가 직접 행차한 터라 얌전히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몇몇 반항하는 이들은 황궁 기사들이 직접 제압해 버리니 답이 없는 것이다.
“수도에 남은 건 죄다 쭉정이들뿐이네.”
백작급이라도 한때 이름을 날렸을 뿐, 지금은 별반 볼 일 없는 놈들.
그런 주제에 고위 귀족들이라는 신분을 들먹이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놈들뿐이었다.
“진짜는 죄다 근교에 숨었군.”
자신의 영지로 내려갔다간 자칫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적당히 근교에 마련된 저택으로 피신한 이들.
고위 백작이 아니더라도 힘 좀 쓰는 남작이나 자작도 죄다 수도의 근교나 중앙 지역에 피신해 있었다.
이대로 버티면서 황태자의 시야에서 벗어나 이 사태가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이다.
“직접 잡으러 가야겠어.”
“전하, 위험하옵니다.”
타리온의 말에 근처에 있던 괴짜들 역시 그렇게 말했다.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은 조심할 때였다.
게다가 카리엘에게 칼을 갈고 있을 귀족들이 몰래 습격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중적인 의미를 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뒤를 바라보았다.
“황궁 기사단은 폼으로 달고 다니냐?”
“하오나…….”
타리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궁에서도 황제를 보필하는 기사를 제외하곤 최정예만을 모아 나왔고, 따르는 시종들 역시 전부 그림자 출신들이다.
거기다 괴짜들 역시 이름깨나 날리는 이들.
이런 이들이라면 웬만한 백작가 기사단 전체가 달라붙어도 승리할 것이다.
“중앙 지역 정도는 박살 내 줘야 지방에서도 속도가 붙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빛냈다.
애초에 황궁 밖으로 나오면서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긴 했다.
“하오나 지금 전하를 노리는 이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파벌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얻어맞은 귀족들이 카리엘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황제파의 병사들로 둔갑한 귀족파나 중립파의 병력이 카리엘을 암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준비해 둬야지.”
말을 마친 카리엘은 시종 하나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내가 가려는 곳이다. 감찰부에게 전해. 그리고 군부에 연락해서 만약을 대비하라고 해라.”
“위험하다는 것을 아시면서…….”
타리온이 그렇게 말하면서 시종을 막아섰다.
“군부에 간자가 있을 것이옵니다. 전하께서 움직이는 곳에 암살자가 매복할지도 모를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원 요청해야지.”
군부뿐만 아니라, 황궁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황태자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지들이 안 오고 배기겠어?
결국 타리온이 카리엘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근교로 움직였다.
괴짜들과 타리온은 마차에 태우고 나머지는 말에 올라타 빠르게 움직인 덕분인지, 순식간에 수도에서 벗어났다.
“별거 없네요.”
아르슈나의 말에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과는 다르게 위험한 움직임은 없었고, 수도에서처럼 무난하게 하나하나 잡아들여 갔다. 그러자 긴장했던 이들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이가 아르슈나였다.
마법사라서 그런지 재미없다는 표정을 풀풀 풍기면서 마차에 올라탄 아르슈나.
“하암~.”
아르슈나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하품하자 카리엘이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루해할 거면 뭐 하러 왔어?”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어제 야근했거든요.”
자신을 타박하는 카리엘에게 아르슈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런데 뭐 하러 따라와? 잠이나 잘 것이지.”
“지근거리에서 전하를 살펴 화기의 움직임을…….”
“아, 됐어.”
“치!”
복잡한 말이 나올 각이 보이자 칼같이 차단한 카리엘.
“이게 다 전하를 위해서 한 것인데…….”
섭섭해하는 아르슈나에게 카리엘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 예산이나 좀 아껴 써라.”
돈 얘기가 나오자마자 입술을 삐죽이던 아르슈나가 귀신같이 눈을 돌려 카리엘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카리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번엔 브리온을 바라봤다.
“브리온, 너도 예산을 은근히 많이 쓰던데?”
“크흠! 앞으로는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진짜야?”
“예! 믿어 주십쇼.”
브리온이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고개를 숙이면서 말하자 카리엘이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이리스는 나았다.
몬스터와 투술에 관련된 고서적을 원해서 가끔 황궁 도서관을 직접 가야 하는 귀찮음이 있지만 예산을 물처럼 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전하.”
“왜.”
이리스의 부름에 카리엘이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평소 무표정이거나 뚱한 표정을 짓는 게 대부분인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카리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나온 김에 경매장을 들렀다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천천히 궁으로 돌아와.”
생각보다 별거 아닌 요청에 카리엘이 흔쾌히 허락하자 이리스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돈이 조금 필요합니다.”
“뭐? 갑자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노려보던 카리엘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하, 그래서 뭘 구하려고 돈을 달라는 건데?”
카리엘의 물음에 이리스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빠르게 설명했다.
“그게, 용병들의 투술들을 모아 놓은 고서라고 합니다.”
“용병?”
카리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쓰레기 같은 잡서에 돈을 쓴다는 생각이 들자 카리엘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러자 움찔한 이리스가 황급히 설명했다.
“정말 중요한 고서입니다. 최소 10만 골드 이상으로 책정될 것으로…….”
“뭐?”
“정말 중요한 겁니다. 전하의 강체술에도 도움이 될 만한 것입니다. 웬만하면 제 돈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너무 비싸서…….”
이리스의 말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10만 골드라는 말에 카리엘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자 이리스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작은 영지 몇 개는 살 수 있을 엄청난 돈이 용병들의 잡기술이 적힌 고서의 예상 가치라는 게 어이가 없었다.
“용병들의 투술이라고 해 봐야 잡기 수준 아니야?”
카리엘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리스가 카리엘의 귓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용병왕 그렉과 그 제자들의 투술이 담겨 있다 하옵니다.”
“뭐? 진짜?”
카리엘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직도 용병계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었고, 투술에 관해선 전설처럼 여겨지는 인물이었기에 전생에 마나 숙성법을 연구하던 카리엘도 수십 차례나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렉의 투술서가 거의 확실하다고 합니다.”
“……넌 그걸 어디서 들은 거냐?”
“용병들의 정보망에서 들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존재다 보니 벌써 용병계에는 싹 퍼져 있습니다.”
이리스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토토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이건 꼭 구하셔야 하옵니다.”
토토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간청하자 이리스도 옆에서 제발 사 달라는 듯 눈을 빛냈다.
인간 출신으로 투술을 통해 마스터가 되었던 고대의 강자.
그런 그였기에 이리스가 애가 타는 건 잘 알았다.
인간의 몸에 맞는 투술을 익혔기에 카리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토토는 왜?
“넌 또 왜 그래?”
“그분은 현대 운동의 시초이옵니다.”
토토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초?”
“체계적인 운동법과 근육의 단련법의 기틀을 마련하신 입지전적인…….”
“하! 알았으니까 닥쳐.”
카리엘이 짜증 나는 표정으로 괴짜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자신의 몸을 위해서라지만, 하는 일에 비해 쓰는 예산이 너무 많았다.
그나마 나아 보였던 이리스와 토토마저 브리온과 아르슈나가 쓰는 돈보다 몇 배는 많은 돈을 일시불로 지를 생각을 하자 카리엘이 머리가 아파졌다.
‘얌전한 놈들이 더 위험하다더니…….’
카리엘이 머리를 짚으며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할 때, 갑자기 타리온이 입가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자 밖에 있는 기사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황급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습격이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살짝 긴장한 카리엘이 조용히 타리온에게 물었다.
그러자 타리온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한 행동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해 온 카리엘이기에 그의 표정만 보고도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친놈들이네.”
혹시나 했다.
자신이 틈을 보이면 귀신같이 미끼를 물고 습격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진짜로 물지는 몰랐다.
“황궁 기사단과 그림자들을 뚫고 나를 암살할 생각이라……. 진짜 미친놈들이야.”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마차 안과 주변 기사들의 긴장감은 더욱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