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7. 일이 점점 커진다? (3)
카리엘이 움직이자 침묵 속에 잠겨 있던 대전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숨죽이며 카리엘을 바라볼 때, 황태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폐하.”
황제를 부른 카리엘이 재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상의 말에는 어폐가 있사옵니다.”
“어폐?”
“그렇사옵니다.”
카리엘이 재상을 노려보았다.
“감히 황족의 일을 뒤로 미루고 타국의 일을 우선한다? 이것은 황족의 권위를 끌어내리고 기만하려는 행위이옵니다.”
카리엘의 주장에 황제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앞으로 나섰느냐는 듯 카리엘을 노려보았다.
재상 역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 카리엘이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떼쓰기’ 정도로 본 것이다.
중립파 귀족들 역시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으나, 오직 감찰총장만큼은 표정 변화 없이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본 두 공작은 가만히 서서 기존의 포지션을 유지했다.
그러자 몇몇 눈치 빠른 귀족들은 뭔가가 있음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그 때문인지 귀족들도 조금씩 입을 다물며 다시금 고요한 상태가 만들어졌다.
‘뭔가 있는 건가?’
숱한 정쟁을 통해 재상의 자리에 올라온 무솔리니답게 카리엘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신은 모든 패를 깠으니, 남은 방법은 상대가 숨긴 패를 드러내도 막을 수 있도록 몰아붙이는 것밖에 없었다.
“전하, 이번 일을 덮으려는 것이 아니옵니다. 일단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고 천천히 수사하자는 것이옵니다.”
재상이 어린애를 타이르듯, 말했으나 카리엘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범죄자는 입 다물게.”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재상에게 말하자 대전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공개석상에서 재상에게 이런 모욕을 주는 법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카리엘도 평소에는 하오체를 쓰면서 재상을 존중해 주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무시한다는 것은 완전히 범죄자 취급을 한다는 것이었다.
“저, 전하!”
재상이 당황한 표정으로 카리엘을 불렀지만 신기하게도 이번엔 황제의 입에서 노성이 나오지 않았다.
카리엘이 숨겨 둔 패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폐하, 성국이 주장하는 억울하다는 내용은 거짓이옵니다.”
“증거가 있느냐?”
“예.”
황제의 물음에 카리엘이 당당하게 답했다.
자신감 있는 그의 표정에 황제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리엘이 감찰총장에게 말했다.
“증거를 가져오게.”
“예, 전하.”
카리엘의 명령에 감찰총장이 부하들을 시켜서 증거들을 가져오게끔 했다.
“재상의 주장에 의하면 귀족파와 중립파 쪽에서 범죄가 연루되었고, 그래서 타국들이 분노하며 항의 서한을 보냈다는 것이 주된 내용 아닌가?”
재상을 바라보며 말하자 무솔리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 이건 뭔가?”
카리엘이 그에게 종이 뭉치를 툭 하고 던져 주었다.
황궁에 밀반입된 마약들을 황제파의 귀족들이 주도했다는 증거들이었다.
거기다 군사기밀뿐만 아니라 제국의 굵직한 사업들을 타국에 빼돌린 정황들도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 재상이 주장한 ‘억울한 성국’이 저지른 짓이었다.
“재상이 옹호한 성국이 사실은 제국의 비리 자금을 보관해 주던 창고였더군. 그것도 제국 전 지역에서 말이야. 그 대가로 막대한 자금과 이권을 성국이 가져갔지.”
“……정황뿐이옵니다.”
“그래? 아닐걸.”
부정하는 무솔리니를 보면서 카리엘이 감찰총장을 눈짓으로 불렀다.
“그럴 줄 알고 비밀리에 몇 군데 털어 봤네.”
“이건…….”
“큰 곳을 털면 바로 알 것 같아서 지방까지 가서 털었네.”
카리엘이 웃으면서 말하자 무솔리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왜 연락이 안 왔는지 궁금한가?”
카리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무솔리니에게 다가갔다.
“감찰부가 협박해서 거짓 보고를 올리게끔 했거든.”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무솔리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비리가 황제파에만 있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까?”
“아! 물론 아니지. 귀족파 중립파도 섞여 있더군.”
무솔리니의 말에 카리엘이 환하게 웃으면서 답했다.
황제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무솔리니의 주장에도 환하게 웃는 카리엘을 보면서 재상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한데 조사한 곳 전부 신전과의 연결점이 된 주체가 황제파더군.”
“그건…….”
“감찰부 입장에선 황제파와 신전의 연결점을 조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역시 정황뿐이옵니다.”
재상의 말에 카리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재상의 말처럼 정황뿐이야. 근데 재상이 한 가지 잊고 있군.”
카리엘의 말에 재상의 표정이 구겨지며 고개가 떨궈졌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며 돌려 보려는 사안을 카리엘이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전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 이건 변하지 않아.”
카리엘은 재상을 향해 웃었다.
“성국이 억울하다고 했나? 그 말이 얼마나 개소린지 말해 줄까?”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카리엘이 뒤돌아서서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첫째, 성국이 첩자를 보내지 않았다고? 애초에 신관들이 첩자나 다름없는데?”
손가락을 하나 펴면서 말하는 카리엘.
“둘째, 북부 귀족들이 연루되었다? 애초에 전국 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는 놈들인데 의미가 있을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재상을 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마약 밀반입? 그걸 왜 우리한테만 지랄하는 거지? 원흉은 남부 아닌가?”
“…….”
마침내 재상의 입이 다물렸다.
이제 그한테 남은 건 황제뿐이었다.
“이런 성국을 옹호하는 자네는 범죄자일 뿐.”
범죄자로 낙인찍은 카리엘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황태자의 말에 황제는 침음성을 터뜨리며 고민에 빠졌다.
사안이 심각했다.
신전을 건드린다는 것은 자칫 제국 내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었다.
제국민들 중 신을 믿는 성도들이 많은 것도 문제였고, 자칫 성국과의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덮을 수도 없었다.
성국과 전쟁하는 것?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제국 내에서 신을 믿는 자들이 반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많은 자들이 태양신을 섬기고 있었고, 그 때문에 신전의 비리가 드러나도 덮고는 했던 것이다.
‘성국에게 죄를 묻는 건 쉽지 않다.’
무솔리니가 마지막으로 믿을 건 이것뿐이었다.
만약의 만약을 대비해서 남부 연합이 아닌 성국을 끌어들인 것.
재상의 진정한 한 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폐하.”
고민에 빠져 있는 황제를 향해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성국에 죄를 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소자도 잘 아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가 결정하기 쉽도록 소자가 도움을 드리고자 하옵니다.”
그의 말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시종에게 타리온을 대전 안으로 들이라고 명했다.
얼마 후, 타리온이 대전 안에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그것이 무엇이냐?”
“감찰부와 함께 떠났던 소자의 시종들이 발견한 것이옵니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검은 천을 걷어 냈다.
그러자 기괴한 문양의 검은 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그건……!”
월크셔 공작이 카리엘이 가져온 것의 정체를 알았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냐?”
황제의 물음에 카리엘이 재상을 노려보며 말했다.
“흑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카리엘의 말에 대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지금 무슨…….”
황제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재상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른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여기서 왜 흑마법사란 단어가 등장하는지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곳은 신전이었습니다. 감찰부와 동행했던 소자의 시종이 발견한 것입니다.”
카리엘은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감찰부 입장에선 공개적으로 수사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터.
도망치거나 숨기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황태자의 직권을 사용해 모조리 찾아내라고 명령을 받은 카리엘의 수하들이 발견해 낸 것이다.
비리 자금이나 찾아내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물건을 발견한 셈이었다.
“깨끗해야 할 성국이 감히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 이것은 절대 좌시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여기서 입을 여는 순간 정말로 성국과 전쟁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런 황제를 압박하기 위해 카리엘은 마지막 수단을 사용했다.
“폐하, 소자 이 자리에서 다시 밝히옵니다.”
카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이 끝나면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습니다. 그 대신! 이 사건만큼은 끝을 보고자 하옵니다. 부족한 소자가 황태자로서 마지막으로 일하고자 하오니 부디 소자의 청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황태자의 청.
그것을 본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냥 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자리를 걸고 하는 마지막 청이었다.
“전하의 청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감찰총장마저 무릎을 꿇고 말하자 두 공작 역시 움직였다.
그러자 황제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황제에게 청했다.
“전하의 청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귀족들의 압박에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황제가 힘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자의 청을 윤허한다.”
결국 카리엘의 청을 윤허한 황제가 힘없이 일어섰다.
“이번 사안이 실로 중하니 다른 안건은 나중에 처리토록 하지. 모두 이 일을 우선해서 전념토록 하라.”
황제가 그렇게 명하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대전을 나섰다.
그러자 무릎 꿇고 있던 카리엘도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대선을 나섰다.
황제와 황태자가 나선 대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쉽게 대전을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끝났군.”
대전 안에 있던 귀족 중 하나가 재상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이번 일로 황제파는 살아날 여지가 없어졌다.
황제마저 버렸으니, 황제파는 끝난 것이다.
귀족들에게 황제파는 더 이상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과연 성국과 전쟁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한 안건이 되어 버렸다.
대전에 남은 귀족들이 신전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카리엘은 웃으면서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실로 다행이옵니다.”
“그렇지?”
기뻐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타리온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겠사옵니다.”
“뭐, 이 정도로 잘되진 못했겠지.”
카리엘도 타리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신전의 비밀 창고를 털면서 우연히 나온 흑마법사의 무구.
“신전이 흑마법사와 연관되었다라……. 실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옵니다.”
“그러게.”
카리엘은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타리온 입장에선 우연한 일이지만 전생을 기억하는 카리엘 입장에선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몇몇 신관들 중 흑마법사와 연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 유난히 흑마법사들이 들끓었던 지역을 기억하고 있었고, 감찰부를 통해 일부러 그쪽 방면을 조사하게끔 했다.
감찰부가 털다 보면 운 좋게 흑마법사와 연관된 물건들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운이 좋았네.’
카리엘 입장에서도 확실하진 않았기에 운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증거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이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황태자 자리는 내려놓을 수 있게 됐네.’
황제파에 엿도 먹이고, 황태자 자리도 내려놓고, 심지어 건방진 성국마저 압박할 수 있으니 카리엘의 입장에선 최상의 결과가 도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성국을 압박하는 셈이니 다른 국가들에게도 경고가 될 것이다.
전생에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놈들이 차례대로 엿을 먹는 상황에 어느 때보다 기분 좋아진 카리엘이 환하게 웃으며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미리엘이나 볼까?”
웃으며 미리엘을 찾는 카리엘에게 거구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전하, 운동하실 시간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