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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6화 (16/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6. 어느 줄을 잡아야 하나? (2)

귀족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사이 감찰부와 치안대는 활발히 움직였다.

조금의 자비도 없이 잡아들이면서 수도 내 범죄 조직들이 와해되어 갔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숨겨 놓지 못한 장부들이 밖으로 드러났고,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위 귀족들이 연이어서 잡혀 들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위 귀족들은 잘 걸려들지 않았다.

“역시 철저하네.”

카리엘이 쭉정이들만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고위 귀족쯤 되면 다들 도망갈 굴 하나쯤은 파 놓기 마련이다.

백작가 이상이 범죄 조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증거들이 있다?

그건 돈이 정말 급했거나 가주가 얼간이일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얼간이 중 하나가 이번에 군사기밀을 빼돌리다 걸린 백작이었다.

「군사기밀을 팔아먹은 오숑빌 백작. 감찰부, “이번엔 제대로 파헤칠 것.”」

「귀족 회의에 오숑빌 백작의 작위 회수에 대한 안건이 올라오다!」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온 오숑빌 백작 사건.

고위 귀족이 연루된 것 자체가 현 황제 체제에서 처음 있는 일이기에 신문들이 앞다투어 이 사건을 실었다.

그래도 몇몇 귀족들은 오숑빌 백작 때문에 비리 수사는 점차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귀족파가 그렇게 되도록 두고 볼 리 없었다.

황제파가 공격했으니 귀족파도 대응해야 하는 법.

「황궁 내 암투. 그 뒤에는 황제파가?」

「내관들 대다수는 황제파. 그들을 끌어내지 않는 이상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

귀족파가 이렇게 공격하자 황제파 역시 반격했다.

그에 반해 중립파는 잠잠했다.

오숑빌 백작 때문에 중립파 귀족들 자체가 위험해지게 생겼으니, 자기 앞가림이나 하기 위해 몸을 사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위 귀족들은 요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돈으로 작위를 산 자들.

부정으로 작위를 획득한 자들.

수십 년에 걸쳐 썩어 들어간 제국엔 이러한 자들이 넘쳐 났는데, 이들이야말로 제국에 부정부패가 넘쳐 나게 된 원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위 귀족들과 끈이 있다는 것 하나로 허리를 펴고 살며 평민들을 핍박하고 살았는데, 믿었던 고위 귀족들이 몸을 움츠리고 있으니 이들을 보호해 줄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다.

“낙동강 오리 알 신세인가?”

카리엘이 웃으면서 지구에서의 속담을 중얼거렸다.

전생에 열받게 한 원흉 중 하나인 하위 귀족들.

부정부패의 원흉 중 하나이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 처치 곤란이었던 이들이 어디로 줄을 대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모습이 카리엘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전하, 토토 경이 왔사옵니다.”

“아, 지금 나가지.”

시종의 말에 카리엘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전하, 근육이 많이 빠지셨군요.”

“흠흠, 그동안 바빴어.”

“이제 한동안 바쁠 일은 없다고 들었사옵니다.”

토토가 강렬한 눈빛을 보내면서 말하자 카리엘이 살짝 눈을 돌리면서 혀를 찼다.

입 싼 타리온을 욕하면서 토토의 눈을 피해 봤지만 운동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토토는 곧바로 카리엘을 데리고 개인 연무장으로 향했다.

“훅! 훅!”

가볍게 몸을 푼다는 느낌으로 스쿼트를 시작하자 벌써부터 다리가 떨려 왔다.

“이게 다 운동을 쉬셔서 그런 것입니다.”

토토가 혀를 차면서 옆에서 같이 운동을 시작했다.

입만 터는 것도 아니고 매번 옆에서 같이 운동을 하니, 카리엘은 불만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하온데 전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후! 후! 뭔데!”

힘들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카리엘에게 토토가 조심히 물었다.

“언제까지 조사하실 것인지…….”

토토의 물음에 카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운동만 아는 녀석인 줄 알았던 토토가 갑자기 정치와 관련된 얘기를 꺼내자 카리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왜? 아는 녀석이 범죄에 연루됐나?”

“그게 아니옵고…….”

토토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운동은 완벽한 자세로 소화하고 있었기에 카리엘에게는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투자한 곳이 있는데……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투자? 범죄 조직과 연관이 없다면 상관없을 텐데?”

카리엘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묻자 토토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운동기구와 관련된 물건들을 파는 곳이옵니다. 황궁에도 일부 납품하는 곳인데 현재 황궁 상황이 이러하니 주문이 안 들어온다고 합니다.”

토토의 말에 카리엘이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이 박살 났으니 그걸 처리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식자재 같은 필수품이 아닌 이상, 새로운 발주 같은 것을 할 정신이 없을 것이다.

“뭐, 한동안 일을 벌일 생각은 없어.”

“정말입니까?”

토토의 안색이 환해지자 카리엘이 눈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래, 어디 가서 말하진 말고.”

“물론이옵니다.”

토토가 카리엘의 말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드디어 내 인생에도 대박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자신이 투자한 상단이 잘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계획에 따르면 큰 거 ‘한 방’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낫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토토와의 운동을 마친 카리엘은 몸을 씻고선 다음 계획을 위해 움직였다.

황제가 보낸 선생들이 전부 카리엘에게 박살 난 이후, 한동안 수업은 자율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결 여유가 생긴 카리엘이 슬슬 황태자 은퇴 계획의 다음 단계를 밟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놈이 나으려나.”

그렇게 중얼거린 카리엘이 두 동생 놈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황태자 자리에서 내려오려면 두 동생 중 하나가 황제가 되어야 했다.

황녀도 있긴 했으나 너무 어렸다.

그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찰 때까지 황태자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면 스무 살은 넘어야 할 텐데, 그러면 자칫 이 자리에서 영원히 못 내려오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5년이라…….”

카리엘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열다섯 살인 카리엘이 황궁을 확실하게 벗어나려면 늦어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튀어야 했다.

‘안정적으로 튀려면 4년인가?’

자신의 나이 스물한 살에 급격하게 몸이 안 좋아진 황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결판을 봐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동생 놈들을 한 번씩 봐주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딸랑~.

작은 종을 울리자 얼마 후, 시종 하나가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이 서신들을 동생 놈들에게 전해라.”

“……예?”

카리엘의 말에 시종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해?”

카리엘이 팔 아프다는 듯 말하자 황급히 정신을 차린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그가 이렇게 놀랄 만도 한 것이 황후가 죽은 후, 카리엘이 단 한 번도 동생들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황후가 죽은 원인이 황비들에게 있다고 생각해서 그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독살시킨 건 다른 놈들이었지.’

카리엘이 전생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모두들 귀족파의 두 공작가 출신들인 황비들이 그런 거라 확신했고, 카리엘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카리엘이 두 동생을 찾지 않은 건 몸이 허약해서 괜히 동생들과 어울렸다가는 독살당해 뒈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궁에 반입되는 음식들을 전부 검수시키고, 동생들을 찾지도 않았던 것이다.

“뭐, 지금이야 상관없는 일이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가만히 노트를 뒤적거렸다.

귀족들을 조질 방법이야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대부분은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황제가 될 녀석에게 선물로 주는 것도 괜찮겠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갈 채비를 했다.

“전하.”

“아! 시킨 일은 잘했어?”

밖으로 나갔던 타리온이 다급하게 들어오자 카리엘이 반갑게 인사했다.

“황자 저하들을 만나신다 들었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동생들 좀 보려고.”

“……괜찮으시겠습니까?”

타리온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카리엘이 피식 웃으면서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그만하고 준비나 해.”

“……알겠습니다.”

카리엘의 명에 타리온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갔다.

***

그리고 얼마 후, 황태자의 궁에서 황자들이 모인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다.

“형님이 부르신다라…….”

2황자인 루피엘이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나름 친하게 지냈던 형이었지만 지금은 적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황후가 죽고 먼저 거리를 둔 것은 형이건만, 어째서 이제 와 자신을 부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3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님이 날? 의외인데.”

카리엘의 부름에 세리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 부르신다니 가 드려야지.”

세리엘이 알겠다고 말한 후, 수련을 멈추고 자신의 궁으로 들어가 채비를 했다.

그렇게 루피엘과 세리엘이 채비를 마치고 황태자궁으로 움직이자, 이 소식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으음…….”

황제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시종장의 보고를 들었다.

“그놈이 진정…….”

황태자가 앞서 했던 말이 있기에 황제는 이번에 모이는 황자들의 모임이 불안했다.

“언제든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 진심이었던가?”

마음 한구석에선 카리엘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정치력을 발휘한 것이라 생각해 보았으나, 황태자의 행보를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보이는 황태자의 행보는 뒤가 없었다.

정말 제국을 위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귀족들을 잡아들이는 상황에서 동생들을 부른다?

그것도 몇 년간 원수처럼 지냈으면서?

“골치 아프군.”

황제가 머리가 아픈지 손가락으로 지압하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분명 카리엘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균형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황제파는 건드리지 않고, 귀족파와 중립파만 족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고 있었기에 미칠 노릇이었다.

한데 그런 상황에서 카리엘은 눈치 없이 황자들까지 만나려 한다.

“끄응…….”

“폐하.”

“피곤하니 물러가라.”

시종장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려 하자 황제는 귀찮다는 듯 물려 버리고선 한쪽에 잘 숨겨 둔 담배 파이프를 들었다.

“후우, 역시 심신 안정엔 이만한 게 없군.”

세간에서 마약이라고 불리는 물건.

그것을 한껏 빨아들인 황제가 몽롱한 표정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

황제가 복잡한 문제들을 한순간이나마 잊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 황태자의 궁에 도착한 두 황자는 카리엘과 만났다.

“왔냐?”

카리엘이 반갑게 웃으면서 두 황자를 반겨 주자 그들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귀한 손님이라도 온 것처럼 비싼 차와 다과들을 테이블에 깔아 두고 기다리던 카리엘은 그들에게 앉으라고 권유하며 자리에 앉았다.

“다들 바쁘니까 본론부터 말해 볼까?”

카리엘의 말에 두 황자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서렸다.

‘외가를 빌미로 나한테 뭘 얻어 내려는 거지?’

‘협박인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2황자와 코웃음 치는 3황자.

하지만 곧, 예상과는 달리 전혀 다른 말이 카리엘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그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너희들 중에 이 자리에 관심 있는 사람?”

카리엘의 물음에 2황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반면에 3황자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새끼가 날 놀리는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분노한 듯 눈썹이 떨리는 세리엘.

“참고로 폐하께도 말씀드렸다, 너희들 중 하나에게 황태자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두 황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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