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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12화 (12/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 황제파를 조져라! (3)

다음 행선지인 재무부 역시 감찰부원에게 패악질을 부리려 했으나, 카리엘에게 호되게 당했다.

“야, 내가 만만하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재무부 대신이 나보다 상사인가? 아니면 재상이 황태자보다 더 상관인가?”

카리엘이 재무부 관료 하나를 붙잡고 갈구는 모습에 모두가 불똥이 튀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죽은 듯 서 있었다.

자신이 잡은 관료 하나의 멘탈을 박살 낸 카리엘은 매의 눈으로 갈굴 만한 이들을 찾다가 혀를 찼다.

“10분 준다. 감찰부가 요구한 자료들 싹 다 가져와.”

내무부에서와 똑같이 시간을 준 카리엘은 재무부를 나섰다.

곧이어 수레가 도착하고, 엄청난 양의 자료들이 감찰부로 옮겨졌다.

금의환향하듯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가지고 돌아온 카리엘을 반긴 것은 제국의 감찰부롤 총괄하는 감찰총장이었다.

“신! 감찰총장 포돌스키가 전하를 뵙습니다.”

“반갑소. 카리엘이오.”

고위 관료인 포돌스키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예의를 지킨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전하께서 감찰부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왔사옵니다.”

“흠, 그렇소? 일단 들어가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포돌스키를 데리고 들어갔다.

특수팀에 배정되어 회의실에 도착한 카리엘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약속한 대로 자료는 가져왔다. 최선을 다해 파헤치도록.”

“예, 전하.”

감찰부원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바쁘게 움직였다.

“여기서 얘기하긴 힘들고…….”

“제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눈치 빠르게 치고 들어온 감찰부장에게 카리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건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얼마 후, 소파에 앉은 카리엘과 감찰총장에게 따뜻한 티세트가 들어왔고, 비서가 물러나자 본격적인 얘기가 시작되었다.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이오?”

카리엘의 물음에 포돌스키가 침음성을 삼켰다.

회귀한 카리엘도 정치력이라면 어디 가서 뒤지지 않겠지만 그건 포돌스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자를 상대로 간을 본다는 것은 카리엘이 손해였다.

아직 어린 나이라는 것과, 카리엘의 정치력이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괜히 정보만 전해 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리엘은 다소 오만한 표정을 연기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하께선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포돌스키의 물음에 카리엘이 턱을 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요?”

카리엘이 모르는 척하면서 묻자 포돌스키가 한숨을 쉬며 좀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느 선까지 잡아들이시려는지요?”

“어느 선이라…….”

카리엘이 싸늘한 눈빛으로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꽁으로 감찰총장까지 된 인물이 아닌 포돌스키는 카리엘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전하께서도 아시겠지만 폐하께선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옵니다.”

“균형이라……. 그대의 말은 나의 행동이 이 균형을 깰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포돌스키는 카리엘의 물음에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중립파의 거두다운 말씀이시군.”

카리엘이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포돌스키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찡그려졌다.

“그대가 보기에 지금 제국은 균형이 잡혀 있소?”

“불안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맞춰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거대한 귀족파의 세력, 그리고 황제를 등에 업은 황제파.

그리고 그런 그들 사이에서 제국을 지탱하는 중립파.

이 균형 덕분에 제국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제국의 힘이 점차 쇠약해질지언정, 지금 당장 무너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균형이다.

포돌스키는 자신에게 힘이 있는 한 이 균형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 다짐했다.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제국은 끝이다.’

포돌스키가 바라보는 제국이란 그 정도로 썩어 있었다.

카리엘은 가만히 턱을 괴고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어긋난 신념을 가진 자’.

카리엘이 보는 포돌스키의 이미지는 딱 이런 존재였다.

스스로의 힘이 부족하니 중립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황제가 만든 잘못된 균형을 지키기 위해 살아왔다.

이 균형이 깨지면 제국이 무너질 것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그리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오랜 세월 오물과 같이하면 몸에서 악취가 날 수밖에 없듯, 처음에 마음먹었던 그의 신념은 점차 변질되고 오염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어긋난 신념을 가진 자가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어찌할까.’

카리엘이 손가락으로 소파를 툭툭 치면서 고민에 빠졌다.

본래라면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건만 포돌스키를 직접 보니 자꾸만 마음이 달라졌다.

어긋난 신념을 가진 자라도 그 신념을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적어도 쓸 만한 사람은 되지 않을까?

전생에서도 마지막까지 최소한의 선은 지켰던 자이기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쓸 만하게 고쳐 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카리엘의 눈이 빛났다.

“이딴 게 균형이라…….”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포돌스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대는 이딴 걸 균형이라 보는가?”

반존대도 없이 하대하는 카리엘의 모습은 자신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국내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국력이 약해진다면?”

“그건…….”

“과연 타국들과도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 이딴 것도 균형이라 말할 수 있나?”

“……제국은 대륙 최강입니다.”

“동대륙과 비교한다면?”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비웃듯이 말했다.

서대륙 최강은 제국이 맞았다.

서대륙 최강의 제국 이그니트.

동대륙 최강의 제국 로만.

오랜 세월 유지된 양강 체제였지만 이제는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로만제국 역시 오랜 세월 서서히 썩어 들어가면서 말라 죽어 갔지만 최근 강력한 황제를 만나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반면에 이그니트 제국은?

암군만 연이어 세 번이나 집권하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신세였다.

이제는 감히 제국을 바라보지도 못했던 서대륙의 국가들이 기어오를 정도였다.

“파벌 싸움에만 집중해서 타국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도 모르는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것인가?”

카리엘의 말에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 포돌스키.

제국이 기나긴 파벌 싸움을 시작하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것은 인접 국가들이었다.

제국에 해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찔러준 뇌물을 이용해 불공정 계약을 맺고 제국의 이권을 팔아 치우는 쓰레기들.

처음엔 황제파가 부족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으나, 이제는 모든 귀족들이 그러한 짓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묻지. 이게 그대가 말한 균형인가?”

카리엘의 물음에 포돌스키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자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자신 역시도 뇌물을 받고, 범죄를 눈감아 주었으며 균형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제국에 해가 되는 것을 모르는 체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카리엘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흔들리기 시작하는 포돌스키를 보며 카리엘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중립파가 제국을 지탱하는 마지막 남은 기둥이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포돌스키를 바라보았다.

한때 대공가가 있었으나 황족들에게 버림받은 그들은 제국을 떠났다.

그렇기에 이제 남은 건 중립파뿐이었다.

“그대도 그러한가?”

카리엘의 물음에 포돌스키가 떨리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예. 비록 오물을 뒤집어써서 악취가 나지만 저는 중립파의 신념을 잊지 않았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웃었다.

자랑스레 말하는 그를 보면서 카리엘은 비웃음이 가득 담긴 어투로 말했다.

“재밌군. 자신은 신념이 깨끗하다 생각할지 모르나 이미 오염된 이상 그 신념마저 어긋난 것을……. 내가 보기에 자네는 이미 끝났어.”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제국이 어둠에 잠식되었다지만 로만처럼 해가 떠오르지 않으리란 법은 없지. 내가 보기에 균형 타령만 하는 자네는 해가 떠오른 제국에 서 있을 곳이 없을 것 같군.”

“……해가 떠오를 수 있다라……. 전하께선 꿈을 꾸시는군요.”

“글쎄. 꿈과 미래가 같다면 그걸 예지몽이라 한다지?”

카리엘이 미소를 가득 지으며 말하자 포돌스키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자신의 직감은 이 어린 황태자는 단순히 꿈만 꾸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꿈을 현실로 만들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오물에게 말해 줄 계획은 없어.”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가 이를 악물었다.

균형을 지키기 위해 오물을 묻혀 스스로를 더럽혔고, 이제까지 그걸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그것이 너무 후회되었다.

“……오물이라도 쓰임새가 있을 것입니다.”

“글쎄? 다른 이들을 더럽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스스로 더 큰 오물통에 들어가 거름이 되어 줄 수도 있지요.”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신념을 바라보았다.

비록 어긋났으니 아직은 그 신념이 완전히 오염되지는 않았다.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카리엘이 입을 열었다.

“오물은 씻어 내면 되는 법. 그대는 오물을 씻어 낼 용기가 있나?”

황태자의 진중한 물음.

이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포돌스키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랫동안 썩은 오물 속에서 피어나지 못한 꽃이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오염된 땅을 뚫고 나고 마침내 새싹이 피어나는 순간.

“예, 오물을 씻어 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눈빛이 바뀐 포돌스키를 보면서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한 번만 말해 줄 테니 잘 들어.”

“예.”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가 자세를 바로 했다.

“폐하께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말에 포돌스키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능 넘치는 나의 아우들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다고 했지. 자! 그럼 문제다. 내가 황태자 자리를 아우들에게 넘긴다고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그, 그건…….”

포돌스키가 당황한 표정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포돌스키에게 다음 문제를 내주었다.

“자! 그럼 다음 문제. 그 상황에서 황제파의 존속이 필요할까?”

그의 물음에 포돌스키의 눈동자가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귀족파는 강대하지. 폐하가 지금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시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겠지.”

카리엘이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황제파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어. 그런 상황에서 과연 이들이 귀족파보다 유용할까?”

“황제파를 박살 내시려는 겁니까?”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두 개의 공작가를 필두로 하는 귀족파.

그 세력이 각각의 황자들을 밀어주기 위해 두 개로 쪼개진다면?

그러면 황제파가 박살 난 자리를 두 개의 세력이 집어삼키면서 다시금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뉜다.

즉, 황제가 원하는 균형이 새로운 형태로 재정립되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황제파 정도는 박살 내고 가 줘야 황태자 체면이 좀 서지 않겠어? 아우들 중에 누가 황제가 될지는 몰라도 황제파가 없는 제국이 좀 더 낫지 않을까?”

비리의 온상인 황제파만 없어져도 제국은 지금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보단 나을 거야. 그리고 난 황제파만 처리하겠다고 한 적이 없어.”

카리엘의 말에 포돌스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런 그에게 카리엘이 다음 계획을 들려주었다.

그것을 듣는 순간 포돌스키의 표정이 묘해졌다.

“……가능하겠습니까?”

“글쎄. 안 돼도 뭐 어때. 서서히 침몰해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보다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그 말에 포돌스키가 잠시 고민하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카리엘에게 무릎을 꿇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전하의 명이 어떤 것이든 따르겠사옵니다.”

“그것이 목숨을 앗아 가게 할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습니다. 설령 사지에 이르는 길이라 할지라도 웃으면서 갈 수 있사옵니다.”

포돌스키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었다.

“좋아. 첫 번째 명령을 내리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황제파를 박살 내자.”

카리엘의 첫 번째 명령에 포돌스키가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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