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4. 황제파를 조져라! (2)
황태자궁의 시종들이 감찰부에 다녀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적으로 황궁의 첩자들이 잡혔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그러자 식어 가던 수도가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황태자궁에 잠입한 첩자. 과연 황궁은 안전한 것인가?」
「황궁.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황궁의 안전에 대해 의심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쏟아지면서 관료들의 무능 그리고 파벌 싸움만 하는 귀족들까지 까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감찰부에서 또 하나의 발표가 이어졌다.
첩자들의 정체가 식자재를 운반하는 역할의 시종들이란 것을 발표한 것이다.
다행인 점은 제국 내의 첩자들이 아닌, 타 국가로 추정되는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러자 여론이 불탔다.
제국 내 파벌들도 아니고, 타 국가가 첩자들이 잡혔다.
그것도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황태자궁에 잠입한 것이다.
조용했던 때라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하필 시종과 내관 들이 무례를 범한 시점에서 타국의 첩자들이 황태자궁에 잠입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친 것들이, 때를 봐 가면서 해야지!”
재상인 무솔리니가 이를 갈면서 고함쳤다.
황제파의 거두인 그조차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겁 없는 타국의 존재들이 첩자를 운용한 것이다.
자신을 무시한 처사에 베르나트 무솔리니가 분노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간신히 덮어 두었던 불씨가 다시금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자 난감한 건 중립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병× 같은 것들이! 걸리지나 말든가!”
감찰총장인 포돌스키가 이를 갈면서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쳤다.
쾅!
중립파의 거두 중 하나인 포돌스키는 비록 깨끗하다고 할 순 없는 인물이지만 일이 크게 번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관리해 온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재임 기간에 엄청난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황궁에 첩자들이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라, 나름대로 선을 지키면서 일정 수준 이상까진 첩자를 들여보내지 않는 암묵적인 룰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큰 사건이 터지면 한동안은 첩자질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그들만의 규율까지 있었다.
문제는 웬만한 것이라면 자신이 덮고 첩자를 보낸 타국에 항의하면 외교적으로 해결될 텐데, 하필 그 첩자들을 황태자가 ‘직접’ 잡았다는 것이었다.
「황태자 카리엘 프레드리히 폰 블레이저의 이름으로 명한다.
내가 ‘직접’ 잡은 첩자들의 뒷배가 누군지 하나도 빠짐없이 밝혀라.
이는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나 황태자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이다.
그동안 감찰부를 잘 이끈 포돌스키 총장이니 잘해 낼 것이라 믿는다.」
포돌스키 총장은 황태자가 직접 쓴 서신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황태자가 직접 서신을 보내 협박해 오자 포돌스키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이건 자신의 선에서 덮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황태자 따위야 별문제가 없지만 황제의 명령이라는 점이 중요했다.
웬만한 사안이라면 황제파가 황제를 꼬드겨 덮어 보려 했겠지만 명분을 쥔 황태자가 황제의 명을 들먹이며 수사를 직접 지휘하고자 하는 판국이니 덮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미치겠군!”
포돌스키가 한숨을 쉬면서 황태자의 협박성 서신을 고이 접어 첫 번째 서랍에 넣었다.
“후, 어느 선까지 잡아들여야 하는지도 문제군.”
황제의 명을 받은 황태자가 직접 나서는 사건을 일개 총장 따위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황태자가 적당히 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총장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카리엘은 적당히 끝낼 생각이 없었다.
“후,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나?”
“그렇사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토토가 대견해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에 카리엘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겠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토토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오지 않아도 된다.”
“예?”
“운동 못 할 테니까 한동안은 궁에 오지 말고 일 보라고.”
“쉬면 아니 되옵니다. 운동은 매일같이…….”
카리엘의 말에 토토가 기겁하면서 말했지만 이내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도 듣는 귀가 있었기에 카리엘이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를 알았다.
잠잠해진 눈빛에서 카리엘이 큰일을 벌이려는 것임을 깨닫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틈틈이 운동은 하셔야 하옵니다. 정 시간이 없으시면 스트레칭이라도 하시옵소서.”
“……알았어.”
토토의 걱정 어린 말에 카리엘이 마지못해 답하고는 근처에 있는 시종에게 타리온을 불러오라 명했다.
“부르셨습니까.”
“씻고 나갈 것이니 채비해.”
카리엘은 그렇게 말한 뒤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씻고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감찰부다.”
“예, 전하.”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마차를 몰았다.
그 뒤로 황태자궁에 배치된 기사 몇 명이 말을 타고 호종했다.
화려한 마차가 황궁을 지나 수도에 있는 감찰부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의 행차시다!”
타리온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황급히 길을 트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제야 마차의 문을 연 타리온이 카리엘을 부축했다.
“저, 전하!”
고층에서 황급히 뛰어오는 수도 지역 감찰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카리엘의 앞에 섰다.
“미리 연락도 하지 않고 와서 미안하군.”
“아, 아니옵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감찰부장이 속으로 왜 총장에게 가지 않고 자신에게 왔냐며 악을 질러 댔지만, 겉으로는 식은땀만 뻘뻘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건 감찰부장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황태자의 방문에 당혹스러워하며 최대한 눈이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사실 감찰부 중에서 뇌물 한번 받지 않은 청렴한 인간은 드물었다. 위가 썩었는데 아래가 멀쩡하기를 바라는 건 양심 없는 일이다.
그것뿐이라면 청렴한 인간들이 좀 남아 있었겠지만, 귀족파, 중립파, 황제파 할 것 없이 압박이 들어오니 뭘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둘 자포자기해서 뇌물을 받거나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몇몇은 청렴함을 유지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는 죄다 지방의 한직으로 밀려나게 된다.
즉! 감찰부에 완전히 깨끗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름 고풍스럽게 꾸며진 감찰부장실에 들어간 카리엘이 오만하게 소파에 앉았다.
“바쁜 시기에 찾아와 미안하군.”
“아, 아니옵니다.”
감찰부장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답했다.
“바쁠 테니 용건만 간단히 하지. 오늘부터 황궁에 관련된 수사는 내가 직접 총괄하겠다. 이는 폐하의 명임을 알고 있겠지?”
“예? 예……. 알고 있사옵니다.”
“그럼 일이 수월해지겠군. 내가 잡은 첩자들이 있는 곳과 꾸린 팀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카리엘의 말에 감찰부장이 침을 꿀꺽 삼키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내했다.
그러자 온갖 서류 더미들로 넘쳐 나는 회의실의 모습이 보였다.
“개판이군.”
“송구하옵니다.”
“되었다. 오히려 서류 하나 없이 꾸며져 있었다면 비리를 의심했을 것이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감찰부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후, 그래도 사람 꼴은 하면서 살아야지. 좀 너무하군.”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타리온을 불렀다.
“재무부에 자금 지원 요청해. 부족한 건 내 궁에서 충당하고.”
“부족하지 않게끔 요청하겠습니다.”
타리온의 말에 카리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맡은 팀이니 사람 꼴은 하게 해 줘야지.”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감찰부원들을 바라보았다.
“수사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돈은 확실히 지원하마. 또한 성과를 낼 때마다 성과급도 주지. 인원이 부족하면 요청하라.”
그의 말에 다 죽어 가던 감찰부원들의 눈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폐하가 직접 명하신 것이니 어설프게 할 생각은 없다. 황궁 내 첩자, 비리에 연루된 자를 모두 파악해 정보를 갖고 와. 누군가 가로막으면 나한테 말해라. 직접 가서 그놈을 끌고 올 것이다.”
카리엘의 말에 감찰부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어설프게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믿어라.”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감찰부원들을 바라보다 뒤에 멀뚱히 서 있는 감찰부장을 바라보았다.
“뭐 해?”
“……예?”
“나가서 일 봐. 여긴 이제부터 내가 관리할 테니까.”
카리엘의 말에 감찰부장이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고, 멀리서 구경하던 감찰부원들도 황급히 한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타리온이 시종들을 시켜서 문을 걸어 잠갔다.
그와 동시에 카리엘이 싸늘한 표정으로 감찰부원들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자 감찰부원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에 비리가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파벌에 속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카리엘의 말에 대부분의 감찰부원들이 움찔거렸다.
“과거에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는 묻지 않겠다. 그러니까 이번 일에만 잘 협조해.”
그렇게 말한 카리엘이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막히는 부분이 뭐지?”
카리엘의 물음에 감찰부원들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그중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말해.”
“내무부에서 잘 협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몇몇 감찰부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놈들은 황제파겠고, 웃는 놈들은 귀족파려나? 재밌네.’
뒷돈을 받아 처먹은 놈들이 자신의 앞에서까지 편을 가르고 있는 모습에 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감히 폐하의 명임에도 그딴 식으로 나왔다 이거지? 또 있나?”
“재무부에서 잘 협조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좋아. 이 사안은 내가 ‘직접’ 해결하겠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왔을 때 곧장 말해. 바로 해결해 주지.”
“알겠습니다!”
카리엘의 말에 귀족 파벌에 속한 감찰부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싱긋 웃은 카리엘은 감찰부원이 건네준 서류들을 가지고 곧바로 타리온을 데리고 감찰부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뒤따라 나온 감찰부원 중 하나에게 말했다.
“내무부에 먼저 가서 감찰부에서 사람이 방문한다고 전해. 내가 간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예!”
감찰부원이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달려갔다.
***
“감찰부에서 또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거참! 귀찮게 하네. 나중에 준다고 해!”
내무부 관료의 고함과 함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어떤 새끼가…… 저저저저저, 전하!”
“어떤 새끼?”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내무부의 고위 관료가 황급히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감찰부에서 자료 좀 달라고 했더니 계속 거절한 게 너냐?”
“그, 그것이…….”
“감이 잘 안 오나 본데 이번 조사를 명하신 건 폐하이시다.”
카리엘이 황제를 팔자 내무부의 고위 관료가 사색이 되어 덜덜 떨었다.
“감히 네가 폐하의 명을 거역한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신이 어찌……!”
내무부 관료가 황급히 아니라고 말해 보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 새끼 잡아 처넣어. 첩자인지 확인해야겠다.”
“예, 전하.”
“전하! 전하!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십쇼! 저어어어언하!”
질질 끌려가는 내무부 고위 관료를 보면서 휘하 관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개처럼 끌려가는 상관을 봤기 때문인지 카리엘의 눈을 마주칠 생각조차 못 하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본 카리엘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청한 정보들 전부 갖고 와. 10분 준다.”
카리엘의 말에 내무부의 관료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카리엘은 뒤따라온 시종들에게 받아 챙기라고 했다.
그런데 요청한 자료가 생각보다 많았는지 수레까지 끌고 와야 할 정도가 되었다.
“감찰부에 연락해.”
엄청난 양의 종이 뭉치를 보면서 감찰부원에게 말한 카리엘은 곧바로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