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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9화 (9/201)

<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3. 달라진 황태자 (2)

카리엘이 직접 황제에게 가자 황궁 기사들이 황급히 옆으로 물러섰다.

황제에게 직접 간다 했으니 자신들이 뭐라 할 명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어리지만 황태자라는 점이 컸다.

괜히 잘못 나섰다가 자신들도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에 얌전히 길을 터 준 것이다.

카리엘은 죄인이 아니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국 얌전히 카리엘에게 길을 만들어 주자 타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오른 카리엘이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호종하겠습니다.”

“아니, 너희는 뒤따라와라.”

어느새 따라붙은 황궁 기사에게 카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황궁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호종하는 것조차 아니 된다는 것은 카리엘이 황궁 기사들을 믿지 않음을 알리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황태자궁의 시종들에게 호종하게 할지언정 기사들은 믿지 않는다.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

‘망했군.’

황궁 기사 중 하나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한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명으로 카리엘을 죄인처럼 끌고 가는 것이었다.

현 황제와 카리엘 사이의 힘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해 주고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황제의 바람이자 황제파의 바람이었다.

‘정말 변했군.’

황궁 기사가 그렇게 생각하며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황제파를 뒷배로 둔 자들은 내관과 시종만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현 황제파의 입지가 불안한 상황에서 황태자마저 쓸데없이 날뛰면 피곤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귀족파가 사소한 것을 걸고넘어지면서 황궁에 있는 황제파를 건드릴 것이다.

-흠, 저 녀석들 묘하게 건방진데? 원래 이런 거냐?

“그럴 리가.”

본래라면 고개를 드는 것도 허락받아야 할 녀석들이 시종들이다.

귀족들에게도 굽실거려야 할 녀석들이 몇 대에 걸쳐 황제라는 백을 믿고 설치고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이다.

-근데 왜 저래?

“황실이 병신이니 지들이 왕인 줄 알고 나대는 거지.”

-개판이네?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답이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와 팔밖에 없는 불덩이가 저러니 귀여워 보였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귀엽다고 하는 순간 삐지겠지?’

그동안 대화하면서 느낀 점은, 수르트는 은근히 자존심이 세다는 것이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수르트의 모습을 잠깐 구경하던 카리엘이 다시금 사라지라고 말하고는 타리엘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거대한 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으로 도금이 된 기둥과 온갖 보석들로 치장된 건물을 보면서 카리엘은 혀를 찼다.

심지어 시종들마저 사치스러운 장신구를 차고 있자, 그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쯧! 사치스럽군.”

카리엘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뒤에 따라오던 시종들이 움찔거렸다.

황제와 궁은 몰라도 시종들까지 사치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복식이 통일이라도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저마다 다른 장신구를 차며 자신을 뽐내고 있는 모습은 그냥 사치를 일삼는 간신에 불과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속히 이동하시지요.”

황제궁의 시종장이 카리엘의 걸음을 재촉했다.

자신을 봤음에도 대충 묵례를 하며 말하는 시종장의 모습에 카리엘이 걸음을 멈추고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 폐하께서 오래 기다리셔서 노여워하셨습니다. 속히…….”

“황태자를 봤으면서 허리조차 제대로 숙이지 않는 것인가?”

카리엘의 말에 시종장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전하, 지금 이러실 시간이…….”

“인사부터 제대로.”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시종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카리엘의 뒤를 따라오던 시종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시종장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속히 가셔야 하옵니다.”

“내 걸음은 내가 알아서 한다. 건방지게 굴지 마라.”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시종장을 뒤로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자 시종들이 재빨리 황제에게 고하고 거대한 문을 열었다.

황제의 궁을 상징하는 화려한 문이 열리자, 카리엘은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걸어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황궁 보고에 들어갔다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카리엘에게 황제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그러자 카리엘 역시 무심한 어투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짐에게 허락조차 받지 아니하고?”

“구경하는 건 황궁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답하는 카리엘을 보면서 황제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황궁 보고의 내관을 그리한 이유가 무엇이냐?”

“감히 황태자인 제게 건방지게 굴었습니다.”

카리엘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근처에 있는 황제파의 귀족들 몇몇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근방에 있는 시종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직접 임명한 황태자를 무시하는 행위는 크게는 황제를 능멸함이오, 작게는 황권의 지엄함을 의심하는 행위일 터.”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황제파 출신 귀족의 내관 하나를 잡아들였다고 쪼르르 달려와 일러바친 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일부러 늦게 나온 주제에 잘못을 나에게 돌리려 하며, 은근슬쩍 무례하게 굴고 기만하려 했습니다.”

황권을 들먹이며 말하는 황태자를 보면서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과했다. 절차를 거쳐 천천히 진행해야 했거늘……. 미숙하구나.”

황제의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황제가 한발 물러섰음에 황태자의 기를 눌러 놓으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태자 전하께서도 알아들으셨을 것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이쯤에서 그만하시고 오랜만에 태자 전하와 회포를 푸시지요.”

간교한 혀 놀림으로 카리엘이 미숙해서 과하게 행동했다고 몰아가려는 이들.

간신의 표본인 이들을 싸늘하게 훑어본 카리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폐하,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본을 보이셔야 하옵니다.”

“뭐라?”

카리엘의 말에 황제의 눈동자가 커졌다.

옆에 있는 황제파의 귀족들을 비롯한 시종들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한발 물러서면 끝날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치고 들어올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황궁에 폐하의 자비를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소자, 이번 일을 계기로 그와 같은 자들이 있음을 직접 확인했으며, 이 사안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태자, 어디서 사특한 말을 듣고 황가에 충성하는 자들을 욕보이느냐!”

황제가 대로하며 황좌를 주먹으로 ‘쾅!’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황제파의 귀족들이 허리를 숙이는 척하며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가 삽질해 준 덕분에 자신들이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본 카리엘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이옵니다.”

“겨우 사소한 일 한 번 가지고 전부를 판단하려 하느냐!”

“이곳에 오는 과정에서 폐하의 시종들 역시 황궁 보고의 내관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사옵니다. 심지어 시종장조차 제 앞에서 허리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황태자가 그렇게 말하며 시종장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황제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시종장이 날고뛴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리했을 리는 없다.

뒤에서 황제가 태자의 기를 죽이기 위해 시킨 일일 터.

“고작 그 정도로…….”

“저한테 이럴 정도라면 다른 황족들에겐 어떠했겠습니까? 폐하, 이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옵니다.”

카리엘이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시종장을 노려보면서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누구 하나는 끝장내려는 기세였기 때문이다.

“쯧! 태자의 말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는바. 짐이 직접 확인해 보겠다. 그러니 태자는 그만 물러가라.”

“폐하, 소신이 시작한 일이니 소신이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뭐라? 짐이 물러가라 명했다! 내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황제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시종장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

그런 그의 모습에 카리엘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소자가 못미더우신 것입니까?”

카리엘의 물음에 황제가 갑자기 웬 생뚱맞은 소리냐며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제가 얼마나 못미더우시면 이런 사소한 일조차 맡기지 못하신단 말씀입니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 못미더우시다면 소자, 제국을 위해 태자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카리엘의 폭탄 발언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태자, 지금 네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나 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평소 병약하고 부족한 제가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태자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불편했습니다.”

“그건…….”

“제국을 위해선 소자같이 쓸모없는 놈보다 아우들이 더 믿음직하겠지요. 제국을 위하는 마음으로 소자, 무거운 태자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카리엘의 발언에 황제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2황자와 3황자.

그들이 천재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없다.

천재 마법사라 추앙받은 2황자.

차기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3황자.

이 둘이 차기 황제 자리에 어울린다는 건 제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약한 카리엘을 황태자로 앉힌 이유.

그 역시 제국민 모두가 안다.

황제파의 꼭두각시로 세우기 위한 것과 황제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한 수단.

명분은 황자들의 어미인 황비들이 각 공작가의 딸이라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 줄 수 없다는 것.

그 명분 하나로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물러나겠습니다.”

“기다리거라!”

황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는 순간, 황제가 다급하게 말했다.

“후, 짐이 너를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황제가 갑자기 친근한 말투로 카리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짐은 네가 회복에만 전념했으면 해서 그리 말한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황제의 모습에 카리엘이 속으로 기가 찼으나,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어찌 폐하의 마음을 모르겠사옵니까. 그래도 이왕 마음먹은 거, 동생들을 위해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야겠사옵니다.”

“아니 된다.”

황제가 단호하게 말하자 카리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너도 알겠지만 두 황자는 천재이니라. 어느 한쪽에 힘을 실어 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태자 자리를 물러난다면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냐는 듯 책망하는 표정으로 말하는 황제에게 카리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오나 언제까지고 무능한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옵니다. 뛰어난 두 동생을 제쳐 두고 제가 계속 이 자리에 있다면 귀족들과 백성들의 불만이 있을 것이옵니다. 어차피 언젠가는 두 동생 중 하나가 이 자리를 차지해야 할 터. 폐하께서 강건하실 때 이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사옵니다.”

“네가 보여 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참에 황권의 지엄함을 보여 주거라. 네가 무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어 황태자 자리를 굳건히 하거라.”

“하오나 폐하…….”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그들은 너무 어리다.”

황제의 말에 카리엘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미력하나마 폐하께 흠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카리엘의 말에 황제가 헛기침하면서 말했다.

“무리하지 말거라. 언제나 너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 폐하.”

황송한 표정으로 말한 카리엘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의 궁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단번에 마차에 올라탔다.

-연기 잘하더라?

“토 나올 뻔했다. 아오, 아주 ×랄 났네.”

황제의 가증스러운 모습에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헛구역질한 카리엘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참에 황태자를 때려치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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