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 계약 (4)
늙은 사서를 뒤로하고 황궁 도서관을 나선 카리엘의 눈에 입구에서 타리온이 한 남자와 함께 자신을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전하.”
“이자인가?”
카리엘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황궁 기사 토토라 하옵니다.”
“반갑다.”
인사하는 토토에게 반갑다는 말을 전한 카리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는 있으나, 힐끔힐끔 이곳을 보는 시종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일단 궁으로 가지.”
“예.”
카리엘의 명에 타리온과 토토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곧 마차가 움직이며 곧바로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마차를 따라 타리온과 토토를 비롯한 시종들이 바삐 걸음을 놀렸다.
“그래, 육체에 대해 잘 안다고?”
어느새 궁에 도착한 카리엘은 침상에 앉아 토토에게 물었다.
“예, 육체라면 제국의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에 찬 그의 목소리에 타리온이 고개를 저었다.
말하면서 근육을 꿈틀거리는 꼴에,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하지만 카리엘은 만족했다.
“그럼 묻지. 지금 내 상태가 어떻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
“최악입니다.”
카리엘의 허락에 토토가 솔직하게 답했다.
근육은 볼품없고, 운동을 위한 최소한의 체력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그런데 날뛰는 화기 때문에 격한 운동은 어림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화기를 억제하기 위한 약물 역시 몸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현시점에선…… 전하의 몸을 회복할 방도가 없습니다.”
“어찌 대충 훑어보고…….”
토토의 말에 화를 내는 타리온을 카리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솔직한 의견을 주어 고맙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턱을 괴고 빤히 토토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 토토는 단순한 괴짜가 아니었다.
정말로 육체에 관해선 전문가라는 게 느껴졌다.
‘헬창이네.’
본능적으로 근육을 자랑하는 토토를 보면서 카리엘이 피식 웃었다.
“나 역시 지금 상태로는 몸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안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 그렇게 열심히 알아봤어도 결국 찾아내지 못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 건네자 토토가 양손으로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고 차분하게 읽어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카리엘이 첨언했다.
“고대 웨어 울프의 마나 활용법. 강체술이라 불리는 거다.”
카리엘의 말을 들은 토토가 곧 놀라워하며 고개를 들었다.
“굉장하군요, 순수하게 육체를 강화시키는 마나 활용법이라니……. 하지만 한계가 명확합니다.”
토토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대의 마나 활용법은 놀라울 만큼 신기했지만, 그뿐이다.
시대를 거쳐 발전을 거듭한 현재의 마나 활용법에 비하면 효율이 떨어졌다.
“현대의 마나 정제법에 비하면 효율이 5분의 1 수준도 안될 수 있습니다.”
토토의 말에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숙성법이라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하의 효율인데 고대의 것이라 효율은 더 떨어진다.
하지만 카리엘에게 효율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한테 적용한다면?”
카리엘의 물음에 토토의 입이 다물렸다.
낭비되는 힘이 많은 건 카리엘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로 화기를 발산시켜 낭비시킬 수 있다면 몸 상태는 더욱 좋아지게 되는 셈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육체가 조금씩이라도 강화된다면?
“나한텐 최고의 결과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하오나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토토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타리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나 정제법이 아닌 이상 리스크가 너무 컸다.
하지만 카리엘의 의지는 단호했다.
“이미 마음먹은 사안이다. 그대가 할 일은 내가 이걸 익혀 최소한의 몸 상태를 만들면, 이것에 맞춰서 내가 체력을 회복할 계획을 세워 주는 것뿐.”
카리엘의 단호한 말에 토토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짓다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전하의 운동 계획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기대하지.”
고개를 끄덕인 카리엘은 토토를 내보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강체술이 적힌 종이를 바라왔다.
“타리온.”
“예!”
“지금부터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아.”
카리엘의 명령에 타리온이 머뭇거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소신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혼자 한다.”
마나 정제법을 익힌 타리온은 마나 숙성법에 큰 도움을 주기 힘들다.
그럴 바에 자신 혼자 하는 편이 나았다.
거지 같은 몸뚱어리를 낫게 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몸에 직접 약물을 주입하기도 했고, 강제로 육체를 강화시키기 위해 몸에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때에 비하면 마나 숙성법 따윈 별거 아니다.’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화기를 느꼈다.
남들은 마나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한 세월이지만 카리엘은 태어나자마자 화기의 존재를 느꼈다.
대륙인들 중 마나에 재능이 있는 자들이 20%도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카리엘은 말 그대로 축복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문제는 과한 축복이 독이 되어 저주나 다름없게 되어 버린 것.
“큭!”
화기를 컨트롤하려는 시도만으로도 녀석들이 발광하면서 날뛰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해 온 녀석인지라 이미 몇 번이나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녀석은 날뛰면서 몸이 망가졌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쿨럭!”
내상이 심해져 피를 토한 순간, 카리엘은 타리온이 두고 간 포션을 입속으로 들이부었다.
그러자 꿀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션이 내상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상이 치유되자 카리엘은 곧바로 화기를 컨트롤하기 위해 움직였다.
‘퍼져라. 퍼져! 퍼져!’
카리엘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화기가 온몸으로 퍼지길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자 심장 부근에 억제시켜 놓은 화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물과 마법으로 억눌러 놓은 주제에 갑자기 몸 전체로 퍼지라 하니 화기가 주춤거렸다.
카리엘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계하는 화기.
그런 그를 계속해서 달래 가며 조금씩 심장에서 온몸으로 퍼뜨려 나가자, 화기는 이내 폭발적으로 심장에서 온몸으로 나오려 했다.
쿵! 쿵!
심장을 둘러싼 마나막을 두드리는 화기를 보면서 카리엘이 조심스레 팔찌를 풀었다.
그 순간 마법으로 억눌러 두었던 화기가 폭발적으로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약물로 대부분의 화기는 잠들어 있어. 버틸 만해.’
카리엘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온몸을 휘젓는 화기를 이용했다.
화기 일부를 온몸의 근육에 직접 때려 박은 것이다.
마나홀을 만드는 번거로운 짓 따윈 하진 않고 그대로 깃들게 하자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꿀꺽!
또 한 병의 포션을 입속으로 털어 넣은 카리엘은 다시금 화기 일부를 육체에 각인했다.
그러다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자 마지막 남은 포션을 털어 넣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팔찌를 다시 꼈다.
그러자 추가적으로 나오려는 화기가 심장에 생성된 막 안에 갇혔다.
“헉……헉…….”
카리엘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침상에 털썩 누웠다.
“확실히 미친 짓이긴 하네.”
카리엘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인간들이 마나 숙성법을 사용하지 않는지 깨달았다.
리스크가 너무 컸다.
“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카리엘이 붉게 달아오른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마나 숙성법은 마나 정제법과 달리 초기부터 몸을 강화시키기 때문에 각 종족마다 전해지는 무술이나 기술과 함께해야 했다.
각 종족의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몸을 맞추는 느낌이다.
반대로 마나 정제법에서 검술이나 무술은 부가적인 것이다.
인간에게 검술이란 더 효율적이고 더 강력한 마나를 활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카리엘은 몬스터처럼 움직여야 했다.
“끄으읍!”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고서에서 보았던 가장 기초적인 움직임을 떠올린 카리엘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 했다.
마치 운동과도 같은 움직임들.
각각의 근육들을 자극하는 움직임을 통해 마나들이 근육에 더 쉽게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움직임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화기까지 온몸에 자리 잡도록 만들어 주었다.
“끄으으…….”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끝끝내 기초 동작을 끝낸 카리엘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타, 타리온!”
쾅!
“전하!”
카리엘의 부름을 듣고 다급히 달려온 타리온이 곧바로 카리엘의 몸을 부축해 침상에 뉘었다.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타리온이 침상에 있는 혈흔을 보고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도 부들거리는 카리엘의 몸은 그가 얼마나 무리했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도 성공했다.”
온몸에 고통이 올라옴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짓는 카리엘.
그런 그를 보면서 타리온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선 말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평생을 고생했던 카리엘이 마침내 지긋지긋한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에 신음하는 자신의 주인을 말리지 못한 채 속앓이만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당장 토토를 부르겠습니다.”
“더 수련해야 돼.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았다.”
“녀석이라면 그걸 감안하고서도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타리온이 이것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하자 카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진심임을 알기에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의 말에 따라 카리엘은 고집을 피우지 않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해……냈다.’
잠결에 빠지면서도 해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는 카리엘.
그런 그를 보면서 타리온도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타리온이 눈시울을 붉히며 조용히 카리엘의 방에서 물러났다.
다음 날, 카리엘은 해가 뜨자마자 토토를 호출해 고대 웨어 울프의 강체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전날 무리해서라도 화기를 어느 정도 각인시킨 덕분일까?
카리엘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토토 앞에서 고대 웨어 울프의 강체술을 시연했고, 그것을 본 토토는 강체술의 기초를 뒷받침할 운동법을 곧바로 알려 주었다.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먼저 풀고 가벼운 운동으로 근력을 끌어올린 다음 기초 강체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일주일.
그동안 카리엘은 모든 시간을 토토의 도움을 받아 강체술 수련과 체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후…… 후…….”
“전보다 훨씬 움직임이 좋아졌사옵니다.”
“맞습니다.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타리온과 토토가 박수를 보내면서 카리엘이 뭔가를 해낼 때마다 격한 칭찬을 보내 주었다.
“호들갑 떨지 마.”
“아닙니다.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토토의 말에 타리온이 맞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의 말처럼 카리엘의 몸은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걷은 것조차 힘겨워했던 지난날과 달리 지금은 상당히 격한 운동조차 소화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다.
“이 정도면 화기가 증폭되어도 버틸 만하려나?”
“어느 정도인가가 중요하겠지요.”
“2배에서 3배 수준?”
토토의 말에 카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그 정도라면…….”
“음…… 그래도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뭘 하실지 모르겠지만 좀 더 시일을 두고 하시지요.”
타리온이 걱정스레 말했지만 카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없었다.
벌써 자신의 궁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타리온에게 보고받았다.
게다가 카리엘이 황제파와 갈라서고자 한다는 소문도 황궁을 넘어 수도에 퍼지고 있었다.
일이 터지기 전에 수르트의 계약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당장 황궁 보고로 간다.”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지금 말입니까?”
“그래.”
반론은 허용치 않겠다는 듯 카리엘은 곧바로 마차로 걸어 나갔다.
“토토 경, 오늘 고생했네.”
어물쩍거리며 따라오던 토토마저 보내 버린 후 마차에 올라타자 타리온이 마지못해 황궁 보고를 향해 마차를 움직였다.
“저, 전하를 뵙습…….”
“보고에 들어가겠다. 전처럼 구경만 하고 나오지.”
“그, 그리하십시오.”
덜덜 떨며 대답하는 내관을 지나 황궁 보고 안으로 진입한 카리엘.
단숨에 2관에 도달한 카리엘은 그림자의 인사를 손으로 대충 받으며 곧바로 저주받은 무구의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푸른 화염이 만들어지며 주변에서 찝쩍거리는 저주들을 물리쳤다.
푸른 화염이 만들어 준 길을 따라 곧바로 수르트에게 향한 카리엘.
-기다리느라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수천 년간 잠들었으면서 고작 며칠을 못 기다리나?”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며 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계약하자.”
카리엘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는 그의 몸을 훑어보는 수르트.
-놀랍네. 뭔 짓을 했길래 이렇게 변한 거지?
“글쎄?”
카리엘이 빙그레 웃으며 수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할 거야, 말 거야?”
-그래, 하자.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수르트.
그 순간 푸른 화염과 카리엘이 내뿜은 화기가 합쳐지면서 환하게 빛을 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