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태자는 은퇴가 하고 싶습니다 >
2. 계약 (2)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리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곧 묘하게 굳어 가는 몸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주인가?’
목소리에 담겨 있는 묘한 이질감.
‘봉인되어 있어도 이 정도 존재감이라…….’
카리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저주받은 무구들을 바라보았다.
마법사들에 의해 봉인된 무구들.
그중에서 위험한 것들은 자체 봉인과 더불어 보관하는 상자에 결계까지 걸어 이중으로 저주를 막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어 나오는 저주들은 카리엘을 위협하기 충분했다.
-계약하자! 계약하자! 계약! 나랑 계약해! 나랑!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점차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전생에 수없이 구른 짬밥이 있는데 이 정도로 정신이 먹히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카리엘이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자 다른 저주들이 접근해 왔다.
몸을 경직시켜 협박하는 놈들.
대놓고 저주를 걸며 계약해 달라는 놈들.
불쌍한 척하면서 은근슬쩍 접근하는 놈들.
그냥 징징거리는 놈들.
수없이 많은 저주의 무구들이 카리엘을 향해 날아들어 왔다.
전생에 구른 짬밥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저주들이 몰려들 때였다.
[저주에 의해 혈계 능력이 일부 각성합니다.]
[혈계 능력의 각성으로 멸망의 마신의 파편이 반응합니다.]
[신이 숨겨 놓은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뭐?”
한동안 안 보이다가 갑작스럽게 뜨는 반투명한 창에 카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약물로 억제시켜 놓았던 화기가 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카리엘이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유약한 카리엘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화기가 이제는 몸 밖으로 빠져나와 유형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레 화기가 날뛰기 시작하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으나,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주가…… 사라졌어?”
저주마저 태워 버리는 순수한 화염.
잡스러운 것을 전부 불태워 정화시키는 화기에 카리엘은 잠시 놀랐으나, 이내 고통을 참아 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잡스러운 저주 덩어리들은 죄다 정화되고, 남은 건 상당히 위험한 놈들뿐.
-제법 괜찮은 기운이구나. 나와 계약하자. 널 마스터로 만들어 주마!
-아니! 저 애는 나와 계약해야 해. 나 불의 마녀의 이름으로 널 최고의 마도사로 만들어 줄게! 나와 계약해!
온갖 마법 도구로 봉인된 마녀의 모자.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칠흑의 검.
두 저주받은 무구가 카리엘을 유혹해 왔다.
하지만 카리엘은 미간을 찌푸릴 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질척대면서 말을 걸어오는 저주받은 무구들.
“꺼져라.”
카리엘이 그들을 향해 그렇게 말하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한때 황제까지 했던 자신이 뭐가 아쉬워 저런 놈들과 계약할까.
마스터? 마도사? 그딴 게 없어도 자신은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던 자이기에 저들의 유혹은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카리엘이 가장 원하는 바를 저들은 이뤄 줄 수 없었다.
“쓰레기 같은 것들.”
이미 전생에 저주받은 무구를 통해 몸의 회복을 노려보았기에 잘 알았다.
그들과 계약한다 한들 몸 안에 가득한 화기로 인한 선천적인 질병은 고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온갖 유혹 속에서도 목표한 바를 향해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수르트의 파편]
무스펠의 주인인 수르트의 힘의 일부가 들어 있다는 목걸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운이 느껴졌다.
웬만한 저주들을 전부 정화시켜 버리는 화기 덩어리가 검게 오염될 정도로 강력한 저주였다.
“……이름값은 한다는 건가?”
위험성 때문에 저주받은 무구들만 모아 놓은 이 방에서 가장 깊은 곳에 보관된 무구들.
그것들 중 하나가 바로 수르트의 파편이었다.
가장 안쪽에 배치된 무구답게 강력한 저주를 발산하며 밀어냄에도 기어코 목걸이에 손을 얹은 카리엘.
그 순간 카리엘이 현기증이 일어나며 비틀거렸다.
“큭!”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며 의식을 놓을 것 같은 상황에 카리엘은 당황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바로 그 순간 목걸이에서 푸른 화염이 솟구치며 카리엘의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초의 불이라…….
솟구친 화염이 인간의 형태로 변화하며 가만히 카리엘을 들여다보았다.
약하디약한 화염.
그 안에 숨겨진 티끌만큼 느껴지는 태초의 불.
하지만 양은 중요하지 않았다.
티끌만큼이라고 하더라도 태초의 불이 느껴진다는 점이 중요했다.
-혈계 능력으로 ‘그’의 불이 이어진 건가? 과분하군.
미약하게나마 이어진 불은 불씨의 형태로나마 잔존하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육신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힘이기에 혀를 찼다.
-쯧쯧! 아깝구나, 아까워.
고작 티끌만큼의 힘이었지만 그것조차 감당하지 못해 비척거리는 카리엘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수르트의 모습에 카리엘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반편이도 못 되는 주제에 누굴 평가하지?”
카리엘이 고통을 참아 내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수르트가 침묵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누굴 평가할 처지가 못 되긴 하지.
순순히 인정하는 수르트.
한때는 세계마저 멸망시킬 존재였지만 지금은 힘의 파편에 기생해 살아가는 한심한 존재였다.
지금 이렇게 유형화하는 것만으로도 실시간으로 격이 깎여 나가고 있었다.
오랜 세월 목걸이에 봉인되어 격이 깎이다 못해 영혼마저 붕괴되어 갔다.
그렇기에 지금의 그는 수르트의 파편이라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변질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도 너 같은 하찮은 것보단 낫지 않을까?
“개소리. 유령 주제에 감히 살아 숨 쉬는 나에 비할까?”
-유령이어도 한때 이름이 드높았던…….
“그래 봤자 망령이지.”
카리엘의 말에 수르트가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카리엘도 지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서로의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올 것처럼 노려보던 그들은 픽 고개를 돌리고는 잠시 침묵했다.
-신의 농간인가? 나랑 계약하러 왔군.
“……뭐?”
수르트의 파편이 하는 말에 카리엘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신에게 당했군?
“설마…… 너도?”
그의 말에 카리엘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자 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서로 노려보던 것이 무색하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신을 상대로 뒷담을 까기 시작했다.
-× 같은 새끼지.
“맞아. 마지막까지 사기를 치더라니까.”
-신이란 작자들이 다 그렇지. 특히 로키 그 새끼가 대박이었어.
“아! 로키는 유명하지.”
카리엘도 로키에 대해서 안다는 듯 답하자 수르트가 자신이 기억하는 일들을 읊었다.
오딘도 쓰레기고, 그 당시 상위 신이라 불리는 놈들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설명하며 거인들은 험해 보여도 알고 보면 여린 놈들이라고 두둔했다.
“그러고 보니 그 ‘신’은 뭐지? 말하는 걸 보면 너도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카리엘의 물음에 수르트가 뭐라 말을 하려다가 다물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제약이라도 걸려 있는 모습.
그것을 보며 카리엘도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수르트가 답답한 표정으로 불타는 듯 요동치는 머리칼을 긁적였다.
-쯧! 그냥 × 같은 새끼라고만 알아 둬. 그 새끼 정체 따윈 알 필요도 없어.
“하긴…… 이제 와서 그딴 새끼 정체가 뭐가 중요하겠냐.”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계약할 거냐?”
그의 물음에 수르트가 침묵했다.
“왜, 약해서 마음에 안 드나?”
-내 처지에 누굴 가릴 처지가 되나? 너 정도면 훌륭하지.
수르트가 그렇게 말하며 오랜만에 맘에 맞는 존재를 만나 좋다고 말했다.
“그럼 뭐가 문제지?”
-나와 계약하면 넌 죽는다.
그의 말에 카리엘의 미간이 찌푸렸다.
“뭔 소리야?”
-지금 네 몸 상태로 나랑 계약하면 죽는다고.
대를 거듭할수록 옅어져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태초의 불이지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타오르기 마련이다.
수르트가 보기에 카리엘이 감당하기엔 태초의 불이 가진 격은 너무 높았다.
“신은 네가 이 빌어먹을 화기를 극복할 존재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긴 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아니 계약하는 순간만 잘 넘기면 내가 화기를 어느 정도 컨트롤해 줄 수도 있지.
수르트가 카리엘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넌 나와 계약하는 순간 뒈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쩔 수 없지.
“그 순간만 넘길 방법은 없는 거야?”
그 말에 수르트가 계약에 대해 아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령 계약을 예시로 들며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답한 카리엘.
-그럼 설명하기 쉽겠군. 정령 계약이나 소환수와 계약할 때, 일시적으로 계약자의 마나가 증폭된다.
“그래, 소환사와 소환수가 공명하며 마나가 증폭…… 응? 설마?”
-맞다. 화기의 증폭.
수르트의 말에 카리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증폭이라고 해 봐야 약간에 불과할 텐데?”
-네 몸이 그것도 못 버틸 만큼 쓰레기라는 거지.
수르트가 가슴을 후벼 파듯 팩트 폭행을 해 주자 카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새삼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쓰레긴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 육체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가능한가?”
-아마도? 그런데 가능하겠냐?
수르트가 카리엘을 바라보며 가망 없을 것 같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해.”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웨어 울프의 강체술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자 수르트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대했던 그였기에 하위 종족에 대해 관심이 덜한 것도 있었으나, 애초에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다 보니 밖의 일을 잘 모르기도 했다.
“어쨌든 가능성은 있다는 건가?”
카리엘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능성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신화적 존재의 유물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낸 셈이니 그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
-……가냐?
수르트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카리엘을 바라보았다.
“금방 올 거다.”
-퍽이나.
수르트가 카리엘의 빈약한 몸뚱어리를 보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자 카리엘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진짜 금방 올 거니까 기다려.”
카리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저주받은 무구들의 보고를 나가려 했다.
그러자 푸른 불덩이들이 주변을 비추면서 카리엘이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얼른 와라. 심심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수르트의 음성.
그것을 들은 카리엘이 고개를 돌려 작게 끄덕이고는 보고를 나섰다.
“전하.”
제2관에 들어서자, 걱정되었는지 2관을 주시하던 그림자가 황급히 다가왔다.
“보고를 나가야겠다. 부축해라.”
“예.”
그림자의 부축을 받으며 2관을 지나 황궁 보고의 문 앞까지 도착했다.
“송구하오나 소신은 여기까지만 모실 수 있습니다.”
“수고했다.”
그림자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카리엘은 홀로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타리온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아.”
카리엘이 타리온의 부축을 받고 있자, 그 옆으로 황궁 보고를 관리하는 내관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규정상 황태자라 하여도 황궁 보고에서 나올 때는 가지고 나온 것이 없는지 확인 작업을 해야 했다.
만약 갖고 나온 게 있다면 대여할 수 있는 무구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뒤져 봐라. 아무것도 갖고 나온 것은 없으니…….”
“소, 송구하옵니다.”
내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리엘의 몸을 대충 훑고는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러자 카리엘이 타리온에게 말했다.
“주변에 감시자들은?”
“있긴 합니다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타리온의 대답에 카리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 건 알겠는데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고대 웨어 울프, 그들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갖고 와. 이 일을 최우선으로 최대한 은밀하게. 알지?”
카리엘의 말에 타리온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