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서정아: 감독님, 해피엔딩인가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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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서정아와 미술관을 관람한 후,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서정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식당이라고 하면서, 이태원 근처 파스타집 <키토>로 강산을 데리고 갔다.
서정아는 대로변 주차장에 <뉴비틀>을 대고는 골목을 돌고 돌아 작은 파스타 집으로 들어갔다.
이곳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서정아의 단골 파스타 집이라고 하지만, 아마도 강산의 호주머니 사정을 배려한 식당인 것 같았다.
<키토>의 내부는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사전 예약이 되었는지 웨이터는 서정아와 강산을 구석에 있는 자리로 안내했다.
“정아씨. 고깃집으로 가도 되는데요.”
“나는 고깃집보다 이 집 파스타가 더 좋아요.”
메뉴판을 보고 고민하던 서정아는 로제(rose) 파스타, 강산은 봉골레(vongole) 파스타를 시켰다.
강산은 파스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스타보다는 잔치국수를 더 좋아했다.
강산은 면 요리를 보면 어머니가 시장에서 사준 잔치국수의 맛이 떠오른다.
추억의 맛이 더해져서인지 아무리 맛있는 면 요리를 먹어도 그때의 국수 맛보다는 못한 것 같았다.
“강산씨는 파스타는 별로예요?”
“아뇨. 괜찮아요. 정아씨는 파스타를 좋아하는가 봐요.”
“네. 이곳은 분위기도 좋지만, 파스타가 정말 맛있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맛이 괜찮군요.”
봉골레 파스타는 조개와 마늘을 올리브 오일에 볶아서 만든 육수에 삶은 파스타 면을 넣어서 만드는 파스타다.
요리하는 중에 조개에서 우러나는 육수로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봉골레 파스타라서 그런지 제법 맛있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랄까?
전생에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를 관광객으로 구경하러 갔을 때, 어느 식당에서 먹었던 그 맛 같았다.
“정아씨, 와인 하실래요?”
“저는 좋아요. 그런데 강산씨는 술을 못 하잖아요.”
강산은 서정아가 감독이 아닌 강산씨라고 하자, 서정아 배우가 아니라 정아씨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은 개방적으로 만들었다.
“와인 정도는 괜찮아요. 정아씨 로제 파스타에는 레드 와인이 제격이죠.”
“로제 파스타도 아세요. 이거 아는 남자는 선수라던데?”
“선수는 무슨 선수요. 선수라면 여자를 클럽이나 와인 바로 데려가야죠.”
로제 파스타는 토마토 소스에 생크림이나 우유를 섞어 만든 소스에 삶은 파스타 면을 볶는 파스타다.
로제란 이탈리아어로 “장미” 또는 “장밋빛”을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로제 떡볶이는 이 소스에 고추장을 섞어서 만든 떡볶이다.
서정아는 술, 아니 와인을 잘 마시는 것 같았다.
강산이 와인 한잔 정도 마시면 서정아는 두세 잔을 마셨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산의 마음에 이제는 서정아에게 말을 꺼내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아씨, 바쁜 스케줄 중에 시간을 내줘서 고맙습니다.”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하네요. 나는 강산씨가 언제나 고맙다는 말을 할까 기다리고 있었어요.”
서정아는 강산의 아무 의미 없는 말에도 리액션을 크게 하며 강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아씨가 삼송전자 CF도 포기하고 <삼검문>에 참여했다고 들었어요. 그 부분도 고맙다는 말이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흠, 그건 말이죠. 사실이 아니에요.”
“무슨 말이에요?”
“삼송전자 CF를 거절한 것은 경쟁사인 IG 전자하고 맺은 선약 때문에 거절한 거예요.”
“썬데이 저널 기자가 <파인트리>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하던데요?”
“호호호. 그 말이 <파인트리>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에요. 그래야 내가 삼송전자나 <한강기획>에 미움을 받지 않죠. 내가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우긴 것은 사실이지만요.”
강산은 서정아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마음 한편으로는 편해졌지만,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그래서 내가 정아씨하고 만들고 싶은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어요.”
“무슨 아이디어요?”
서정아가 강산의 말이 궁금한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강산이 서정아의 얼굴을 보자, 서정아의 얼굴이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이 발그레해졌다.
서정아는 강산에게 미소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있었다.
갑자기, 강산의 가슴이 쿵쾅거리고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부정맥인가? 아니면, 와인 한잔의 술기운 때문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서정아에게 반한 것인가?
강산이 다시 서정아의 얼굴을 보자, 목이 쪼여오고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이게 뭐지?
강산은 이번 생에는 여자에 반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고 생각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다.
전생에 강산은 여자들과 사랑하면서 충분히 상처를 주고받은 경험이 적지 않았다.
서툰 젊은 열정이나 성욕 때문에 전생의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첫 번째 이야기는 <비포 선라이즈 1995> 스타일의 사랑 이야기예요.”
“비포 선라이즈요”
비포 선라이즈는 셀린느(줄리 델피), 제시(에단 호크), 두 남녀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하루 동안 비엔나 도시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낮부터 다음날 일출까지 밤새도록 끝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시작한다.
“비포 썬라이즈는 우연히 만난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죠.
남자 A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를 짝사랑하지만, 여자는 남자 A를 이성 친구가 아닌 남사친, 남자 사람 친구로만 대하죠.
어느 날, 여자는 남자 A에게 다른 남자 B와 어떻게 해야 사귈 수 있는지를 상담하기 시작해요.
남자 A는 다른 남자 B를 상담해 주기 위해, 여자와 만나서 다른 남자 B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요.”
”...“
강산이 이야기를 마치고 서정아를 보자 서정아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 같았다.
“정아씨, 이 시나리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세모에요.”
“세모요?”
“네. 오케이는 아니고 노도 아니라는 말이에요. 최종 시나리오가 나오면 읽어보고 싶어요.”
“......”
강산은 서정아가 세모라는 말에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서정아에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여자 단독 주인공이라면 서정아에게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삼검문>의 도입부에 서정아를 출연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이었지만 서정아를 위해 준비한 아이디어가 되어있었다.
강산은 와인이 떨어지자 웨이터에게 다시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식탁은 정리되고 가운데는 빨간 향초가 유리잔 안에 켜져 있었다.
서정아는 와인을 마시며 강산에게,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다음 이야기도 해주세요.”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한 어느 여자에게 하루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에요.”
“남자 주인공은요?”
“이 영화는 여자가 단독 주인공이에요. 남자들은 모두 조역이죠.”
2001년 현재, 우리나라 영화의 흥행을 주도하는 관객층이 20~30대 여성이다.
따라서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에 비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매우 적은 편이다.
“좋아요. 계속하세요.”
“주인공은 공황 장애를 앓고 있는 여자예요.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가해요. 이제까지는 참가한 적이 없었어요.
여자는 학창 시절에 심한 왕따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때부터 공황 장애를 앓게 되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우연히 학창 시절에 그 여자가 왕따가 된 소문을 낸 친구가 동창회에 나와 있다는 것을 듣게 돼요.
여자는 자신의 인생을 왜곡한 그 소문을 낸 친구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요. 나중에 반전이 있어요.”
“노출 씬은 있나요?”
“음... 네”
“왜요?”
“그 소문 있잖아요. 트라우마가 된 소문. 여자가 남자 동창에게 나쁜 짓을 당했다고 하는 소문과 여자가 먼저 남자를 유혹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
“정아씨, 이 시나리오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동그라미에 가까운 세모에요. 이 아이디어도 최종 시나리오가 나오면 읽어보고 싶어요.”
“......”
이번 아이디어는 오케이할 줄 알았는데, 동그라미에 가까운 세모라는 말이 조금 실망이다.
그런데 서정아가 발갛게 물든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니,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감정은 좋지 않다.
미스코리아 출신 서정아에게 예쁘다는 생각은 당연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사실, 감독이 배우를 사랑해야 여배우를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고 술 먹고 헛소리를 하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럴 나이는 지났다.
그런데 자꾸 강산의 몸에서 열이 나고 있다.
“감독님. 다른 이야기도 해주세요?”
강산은 서정아가 다른 이야기를 해 달라는 말에 심호흡을 길게 했다.
감정이 진정되지 않으면 실수를 할 것 같았다.
“음... 다음 이야기는 <달리는 여자>에요. 이 이야기는 순수한 제 아이디어라 참고할 작품은 없어요.”
“내용은요?”
“말 그대로 그냥 달리는 여자 이야기예요.”
“얼마나 달려야 하는데요?”
“여주인공이 10키로 단축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요.”
“감독님 말대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이 나와요. 아버지는 홀아비 육상 코치, 딸은 외동딸 육상 선수에요.
육상 선수인 딸은 발목 부상으로 은퇴하고, 롯데리아에서 알바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돼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딸이 다시 달리기를 하는 거죠.
딸은 아버지를 위해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고 10키로 단축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이야기에요.”
“감독님, 해피엔딩인가요?”
“해피엔딩요?”
“아버지가 건강해지거나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결말요.”
“그런 건 없어요. 담담하게 그냥 달릴 뿐이에요. 다만 다시 달리기 위해 아버지의 다른 남자 제자가 그녀를 도와주지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에요.”
“달리는 이야기가 재미있을까요?”
“재미있죠.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어요.
부상의 공포를 가진 여성이 경사진 언덕을 올라갈 때 느껴지는 두려움, 지친 다리가 떨려오는 고통과 싸우는 모습,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다면 설득적으로 다가올 거예요.”
서정아는 강산을 강산씨라고 하지 않고 감독이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강산에게 강산씨라고 부르기 어색해진 것 같았다.
강산은 서정아와 조금 친해진 것 같았는데, 다시 감독과 배우로 돌아간 것 같아서 실망했다.
괜히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싶었다.
처음부터 영화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