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이덕배: 우리 인연은 끝났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강산은 청담동에 다녀온 후, 2주일을 더 스튜디오에서 살았다.
완성본을 넘겨주기로 약속한 마지막 삼 일 전부터는 담당 스텝들과 돌아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 보았다.
자연스럽지 않은 장면이나 보이지 않는 작은 흠들을 찾기 위해서였다.
일주일 후,
해피미디어에서 소유하고 있는 홍대점 극장에서 비밀 시사회를 열었다.
이 시사회에는 영화에 투자한 관계자들과 출연한 배우들, 영화평론가와 영화기자들이 참가했다.
그들 중에는 특이하게도 음악평론가인 두성호도 있었다.
전체적인 시사회 평은 괜찮았다.
시사회가 끝나자 최룡해 사장과 이덕배 사장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과 스텝들이 강산에게 잘 나왔다고 격려하고 갔다.
영화 기자와 평론가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감이 좋은 영화잡지 기자들은 영화가 끝나자 감독인 강산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강산은 기자들과 30분 정도 짧은 인터뷰를 했다.
‘처음 입봉한 기분이 어떤가?’
‘임정재, 서정아 배우와 작업하는데 배우들과 트러블은 없었는가?’
‘영화가 스타일리시하게 잘빠졌다. 마초 냄새가 많이 나는데 이미숙이란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감독의 성향을 반영한 것인가?’
유명세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자, 중요한 선약이 있었다고 나중에 정식으로 하자고 기자들과 평론가의 인터뷰를 급하게 종료했다.
전생에 강산은 영화평론가들과 인연이 좋지 않았지만, 이번 생에는 영화평론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술을 같이하거나 사적인 모임을 같이하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의 관계는 천적 사이, 아니 일방적인 상하관계나 다름이 없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영화감독과 개인적으로 친해지면 글을 쓰기 불편하다고 감독들과는 어떤 사적 모임이나 관계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사적으로 친하다고 해서 수준 이하의 작품을 칭찬하고, 친하지 않다고 작품을 평가 절하하는 평론가들은 많지 않다.
성질이 고약한 평론가에게 잘못 걸리면 스토커처럼 따라다니기도 한다.
영화 <첫눈>의 극장 배급과 부가 판권 업무는 해피미디어에서 맡기로 했다.
해피미디어도 이런 업무 경험은 많지 않았지만, 애플로서는 이런 업무는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명세는 <첫눈>의 극장 배급을 위해 4대 메이저 배급사들을 노크해 보았다.
결론은 4대 메이저 배급사보다 한 단계 아래 배급사 블랙베어 엔터테인먼트를 선택했다.
블랙베어 엔터테인먼트는 대도시 영화관 네트워크보다는 중소도시 극장 네트워크가 강한 배급사다.
블랙베어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비디오테이프, DVD, 케이블 TV 등 부가 판권 사업을 해피미디어에서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4대 메이저 배급사에 속하는 <뉴 비전>에서도 <첫눈>이 잘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뒤늦게 관심을 표했다.
그러나 부가 판권 시업을 <뉴 비전>이 갖는다는 조건을 조정하기 어려웠다.
블랙베어 엔터테인먼트는 지방 극장주들을 위한 시사회를 다시 열었다.
지방에 있는 극장주들은 강산의 전 작품이 <두 자매>, <사랑의 데자뷰>라는 블랙베어의 홍보에 <첫눈>의 2차 시사회에 많이 참가했다.
<첫눈>을 보고는 돈이 되겠다는 것을 알았는지, 예상보다 많은 지방 극장주들이 <첫눈>을 많이 사갔다.
* * *
영화 <첫눈>의 완성본을 해피미디어에 넘기고 강산은 시골로 내려갔다.
지난번에 시골집에 내려갔다 온 이후, 일 년 정도 집에 내려가지 못해서 이번 기회에 다녀오려고 했다.
강산은 오랜만에 가족들 얼굴도 보고, 그동안 무거워진 머리도 비우고 ‘푹’ 잠자고 싶었다.
시골집으로 가기 전에 읍내 정육점에 들러 소머리 하나를 샀다.
어쩌다 보니 소머리를 사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흥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어깨를 묵직하게 당기는 무게감이 즐겁게 다가왔다.
큰 여동생 정연이는 연우대 의대를 다니고 있다.
지금은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 시간이지만 알바로 과외를 하느라 시골에 다녀가지 못하고 서울에 있었다.
정화, 정미는 학교에 가느라, 아버지는 과수원에 가느라, 늦잠자는 강산을 두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강산은 늦은 아침을 먹고 아버지를 도와주러 과수원으로 갔다.
과수원에서 일하다 저녁에 돌아와 식사하고 씻고 나면 피곤해서인지는 몰라도 바로 시체처럼 쓰러졌다.
강산은 일주일 정도 쉬었다가 서울로 올려오려고 했다.
집에서 쉬다 보니 서울로 올라가기 싫어졌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강산은 아버지, 여동생들과 읍내 중국집에서 중국요리를 같이 먹고 서울로 올라왔다.
* * *
강산은 서울로 올라오자 고시원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며 지냈다.
<봄날은 간다>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김두호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강산은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난 <첫눈>의 결과도 궁금하고 김두호에게 물어볼 것도 있어서 나갔는데 유명세가 김두호와 같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안녕하세요. 유명세 부장님.”
“산아, 유명세는 보이고 나는 안 보이냐?”
“그래 두호야. 반갑다. 오늘 두호 너를 만나러 왔는데, 유명세 부장님은 이곳에는 무슨 일이세요?”
“저요. 회사에서 잘려서 여기 왔습니다.”
“네? 최룡해 사장이 유부장님을 잘라요?”
강산은 유명세가 잘렸다는 말에 마시던 커피를 내뱉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명세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최사장님이 뭐가 되냐? 강산아. 명세 말을 믿지 마라. 최사장님이 자른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만두고 나온 거야.”
“아냐. 최사장이 분명하게 그만두라고 했다니까. 내가 최사장과 같은 투자자가 됐으니 나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서 자른 거야”
유명세는 최룡해 사장이 자신을 잘랐다고 하지만 믿기 어려웠다.
강산이 아는 최룡해는 돈을 쓸 때는 짠돌이지만 인재를 모르기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김두호는 유명세와 말을 트기로 했는지, 유명세와 말을 편하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뭐가 말이 안 되는데”
“그래도 명세야. 너를 걷어준 고마운 사람한테 그러면 안 돼”
“그거 오버야. 내가 얻어먹은 것도 아니고 일한 댓가를 받은 건데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제부터 해피는 우리의 경쟁회사야.”
유명세가 우리의 경쟁회사라는 말에 김두호의 얼굴도 굳어진다.
강산은 두 사람의 말을 정리해보면 유두호가 해피미디어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해피미디어를 보고 우리의 경쟁회사라는 말을 보면 유명세와 김두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유부장님. 최사장처럼 인재를 구하게 여기는 사람이 유부장님 같은 사람을 자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말 같은데요. 왜 그만두셨어요?”
“역시, 감독님 눈은 속일 수가 없군요. 제가 회사를 그만둔 것은 감독님 때문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이 높아져서요.”
“눈이요?”
“강산 감독님하고 같이 일하다 보니 눈이 높아져서요. 다시 예전처럼 에로영화를 사고팔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최사장님에게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그럼, 이제는 무슨 일을 하려고요?”
“이제부터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요. 당분간은 강산 감독님에게 찰떡같이 붙어있으려고요.”
“???”
유명세가 뻔뻔하게 찰떡처럼 붙어있겠다고 하자, 당황한 강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유명세를 바라보았다.
유명세는 옆에 있는 김두호에게 무언가 눈치를 주자 김두호가 움찔한 표정으로 강산에게 말했다.
“산아...”
“왜? 설마... 너도 애플을 그만 둔거야.”
김두호는 강산에게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호, 너는 또 왜?”
“나도 눈이 높아져서 안 되겠어”
“너는 왜 눈이 높아지는데?”
“산아. 나는 언제까지 에로영화를 만들고 비디오나 팔아야 하는 거야. 나도 강산이 너하고 영화를 같이 만들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극장에서 상영하고 해외에서도 상영하는 것을 보고 싶다.”
강산은 김두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것일까?
아마도 유명세가 김두호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었는가 보다.
정리하자면 지금 유명세와 김두호는 직장을 그만두고 강산에게 영화를 같이 만들자고 제안하는 말이다.
강산은 성공할 자신은 있지만 현실은 고시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명세야 야심이 많고 똑똑한 사람이다.
전생에 유명세가 성공하는 것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적지 않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강산은 유명세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겠지만 김두호는 다르다.
전생에 강산은 김두호에게 너무 큰 신세를 졌다.
<좋은 친구들>에서 일하던 시절뿐만 아니라 부도를 맞고 모두가 외면하던 시절에도 김두호는 강산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회귀한 후에 강산은 김두호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꼈다.
강산은 김두호에게 친구가 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고, 지난번 영화 <두 자매> <사랑의 데자뷰>를 만들 때에도 이덕배 사장에게 김두호 차출을 요구했다.
이번 영화 <첫눈>에서도 김두호가 필요하다고 이덕배 사장에게 김두호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
그게 독이 된 걸까?
김두호는 애플에서 나와서 아직은 미래가 불안한 강산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3, 4년 후에 김두호가 이런 제안을 한다면 강산은 기쁜 마음으로 받을 것이다.
아니, 강산이 먼저 같이 일하자고 김두호에게 제안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강산은 영화판이라는 도박판에서 자신의 판돈을 전부 다 걸고 올인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실패하거나 삐끗해도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판들의 연속이다.
강산은 이런 위험한 도박판에 김두호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반대로 유명세가 도박에 참여하고 싶다면 기꺼이 판을 열어줄 것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니까.
“두호야. 지금 결정하지 말고 이번 영화가 흥행에서 성공한 후에 다시 생각하는 것은 어떨까? 지금은 위험해서 안 돼?”
“산아. 나는 결심했어. 이제는 돌아가지 않아. 아니 돌아갈 수도 없어”
“왜? 애플이 있잖아.”
“이덕배 사장님에게 그만두겠다고 말했어.”
“이사장이 알았다고 그만 두래”
“처음에는 펄쩍펄쩍 뛰면서 화를 내더니, 강산이 너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서 그만둔다고 하니까, 생각할 시간을 주라고 하더라.”
“이사장 성질에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닌데?”
“이빨 악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래서긴 뭐가 그래서야. 머리 한 대 세게 맞았어.”
“그게 끝이야.”
“이덕배 사장이 ‘이걸로 우리 인연은 끝났다’. 그리고 ‘두호야. 이제부터 너는 죽어도 강산이 옆에서 죽어라.’고 하더니 '그만 나가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