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강산: 부담감이 확 밀려온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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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냐? 나 바쁘다.”
- 산아. 너 시간 좀 내줘야겠다. 내일 오전 11시까지 해피미디어 회의실로 와라.
“두호야. 나 마무리 편집 때문에 정말 바빠. 밖에 나갈 시간 없다.”
- 산아. 바쁜 거 아는데, 그래도 시간 좀 내야겠다. 영화 마무리 작업보다 더 중요한 일이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 자세한 내용은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줄게.
강산은 편집을 마무리하느라 바쁜 와중에 김두호에게 전화를 받았다.
김두호는 자세한 내용은 내일 만나서 이야기해준다는 말 만하고, 내일 청담동으로 나오라고 했다.
강산은 이기수 편집기사와 스튜디오에서 2주가 넘게 햇빛을 보지 못했다.
오랜만에 바깥 세상 공기를 마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사실 무슨 일로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강남으로 길을 나섰다.
강산은 청담동 해피미디어에 들어가기 전에, 커피숍에서 먼저 김두호를 만났다.
“대체 무슨 일인데 바쁜 사람을 불러내고 그래?”
“지금 회의실에 올라가면 영화 투자 지분하고 수익 배분을 수정하는 계약서를 작성할 거야. 산이 네가 직접 사인을 해야 해서 불렀어.”
“내가 사인을 왜 하는데?”
강산은 김두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투자자들끼리 투자 지분을 수정하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며, 내 사인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너도 계약서 당사자야.”
“내가 당사자라고? 내가 왜 당사자야?”
“이번 영화 시작하기 전에 이덕배 사장하고 최룡해 사장이 수익의 10%를 산이 너에게 주겠다고 했다면서”
“이덕배 사장이 술기운에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 최룡해 사장도 동의하고. 그런데 설마 진짜로 10%나 주겠어? 준다고 해도 보너스 정도겠지.”
“그 설마가 실제로 일어났어. 이덕배 사장하고 최룡해 사장이 이번에 계약서를 수정하는 김에 산이 너도 계약서에 넣어주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너도 계약서에 사인해야 해.”
강산은 짠돌이로 소문난 이덕배와 돈 귀신이라는 쩐귀 최룡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다.
계약서 세부 조항에 의외의 독소 조항이 숨이 있을지 모른다.
강산은 계약서를 꼼꼼하게 읽어보기로 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두호야. 아는 거 있어?”
“이번에 초과된 제작비용 있잖아. 나하고 유명세가 사비로 채워 넣은 거 말이야.”
“그거, 초과한 비용은 나중에 사장들이 갚아 준다고 했잖아?”
강산은 국일관 시퀀스를 준비하면서 제작비 때문에 어떻게 촬영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만들고 싶은 이미지는 머릿속에 구상해 두었지만, 부족한 제작비로 촬영을 중단해야 할 위험에 처해있었다.
그때, 유명세와 김두호가 적극적으로 강산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 영화를 마무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은 예산으로는 주조연 배우들 외에는 백여 명의 엑스트라의 동원하거나 2대의 카메라를 사용하는 특수촬영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짝귀 사무실에서 벌어진 폭력씬은 돈 먹는 하마처럼 돈으로 만든 장면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덕배 사장이 현금 지급을 반대하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하려고”
“그래서 현금 대신 이사장 30%, 최사장 30%, 유명세하고 나 30%, 강산 10%를 주는 것으로 수정하는 거야.”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이 영화가 실패하면 너희들만 쪽박 차는 거잖아.”
“강산이 너는 너무 부정적이야. 너는 너와 스텝들이 만든 작품을 못 믿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성공할 거라는데”
“누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
“그러니까 사람들 누구?”
“스텝들, 배우들이 그러지.”
“야! 그 사람들은 평론가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잖아.”
“이해관계자? 그게 뭔데?”
“아... 안 되겠다.”
“뭐가?”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온다. 나 편집이나 하러 가야겠다.”
수정계약서의 사인을 앞두고 최룡해와 이덕배, 강산, 그리고 유명세와 김두호가 해피미디어 회의실에 모였다.
유명세가 수정된 투자계약서의 문구를 일일이 설명하자, 사람들은 자기 이름 옆에 사인하며 이의 없이 마무리되었다.
* * *
“강산입니다.”
- ...
“여보세요? 전화했으면 말을 하세요. 대답이 없으면 전화 끊겠습니다.”
- 나야. 하영란.
강산은 전화를 받았는데 말이 없자, 잘못 걸어온 전화인 줄 알고 끊으려고 했다.
말이 없던 상대는 자신을 하영란이라고 했다.
25년 만에 들어보는 하영란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제는 다 잊어버린 이름인 줄 알았다.
강산은 심장이 움직이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이 심장이 멈추려고 하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오랜만이다. 내 전화는 어떻게 알았어?”
- 형수형에게 전화번호 받았어.
빌어먹을,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지만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냐니?
자신이 한 말이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 <첫눈>을 만들면서 강산은 박형수에게 임정재의 섭외를 부탁하고 국일관 시퀀스를 촬영하면서 고정 카메라 촬영을 부탁했다.
“그렇구나. 무슨 일로 전화했어?”
- 오랜만에 전화하면 잘 지냈냐고 안부 먼저 물어봐야지. 재미없게 무슨 일로 전화했냐고 하는 거야.
“그래. 영란아. 잘 지냈어?”
- 나는 잘 지냈어. 산이 오빠는?
“나도 잘 지냈어.”
강산은 하영란을 다시 만난다면 회귀하기 전에 했던 지난 일들을 사과하려고 해다.
하영란은 강산이 회귀하자마자 제일 먼저 만나려고 했지만,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아서 준비된 다음에 만나려고 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준비가 안 되긴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영란에게 다른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할 때의 뜨거운 감정도 자신을 버리고 떠났을 때 느꼈던 격렬한 감정도 이제는 잊혀진 기억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영란이 목소리를 들어보니 다시 가슴이 뜨거워진다.
전화라서 다행이다. 입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테니까.
강산은 심호흡을 길게 하며 감정을 다듬었다.
- 형수형 말로는 산이 오빠, 영화 찍었다고 하던데 언제 극장에 올라가는 거야?
“이제 곧 올라가. 그런데 너 이렇게 전화해도 되는 거야?”
- 왜? 오빠. 지금 전화하기 곤란해?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너 최현철하고 결혼했잖아?”
- 난 또 뭐라고, 오빠는 너무 보수적이야. 아직도 시골 선비 같은 생각을 못 벗어났어. 내가 산이 오빠하고 결혼했으면 다른 남자들하고는 전화도 못 하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건 그렇고 최현철이가 너한테 잘해 주냐?”
- 응, 잘해줘. 그런데 내 남편이 산이 오빠보다 선배잖아? 선배 이름을 막 불러도 되는 거야?
“죽어도 최현철에게는 말 못 높여. 아니 안 높여.”
-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튼, 최현철에게 말해. 너한테 잘못하면 내가 몽둥이 들고 찾아간다고 말이야.”
- 알았어. 그리고 오빠. 미안해
“됐다. 잘못은 내가 했는데 네가 왜 미안해.”
- 잘못한 것은 알아.
“그래. 그때는 내가 잘못했다. 네가 힘들어하는 것을 몰랐어. 정말 미안하다.”
하영란은 잘못했다고 말하는 강산의 사과가 낯설었다.
영란이 알고 있는 강산은 자존심이 강해서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사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강산이 미안하다는 말에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쌓아온 미움과 원망이 봄 눈 녹듯이 사라졌다.
- 오빠. 정말 미안해. 그렇게 떠나선 안 되는 건데.
“됐다. 너 이런 말 할 거면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나는 너보다 더 예쁜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거다. 너도 잘 살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 그래 잘 살게.
“아이 생일이 어떻게 되냐?”
- 아이가 있는 것도 알아.
“그냥 생일이나 말해”
- 6월 28일이야. 육 더하기 이는 팔. 기억하기 쉽지.
“육이팔. 아이 이름은 뭐야? 수연?”
- 아냐. 수연이라는 애는 대체 누구야. 지희야. 최지희.
“아~ 최지희.”
- 이름도 알아?
“몰라. 내가 네 딸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건 그렇고. 너, 지금도 담배 피우냐?”
강산이 갑자기 담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영란이 폐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났기 때문이다.
하수연의 말에 따르면 하영란이 폐렴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들었다.
- 괜찮아. 지금은 아이 때문에 담배 끊었어.
“그래. 너 골초였잖아?”
- 아무렴, 산이 오빠만 할까?
“나도 담배 끊었다. 술도 안 마신다.”
- 그래. 잘했네. 오빠는 사귀는 여자 없어.
“지금은 너무 바빠서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다. 네가 좀 소개 시켜주라.”
- 산이 오빠. 수현이는 어때?
“수현이, 걔가 누군대?”
- 강수현 몰라. 내 단짝 친구. 우리 학교 퀸카, 강수현!
강수현이라는 말이 입가에 돌지만, 누구인지는 이름과 얼굴과 잘 연결되지 않았다.
예전에도 여자배우나 여자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실수를 많이 했었다.
“몰라. 내가 너하고 헤어진 게 언젠데 그래. 네 친구하고 학교 퀸카들을 다 기억해야 하는 거는 아니잖아.”
- 강수현 정말 몰라. 오빠 영화에도 출연했잖아.
“내 영화에 출연했다고? 무슨 영화?”
- 단편 <너를 위해>에 출연했잖아.
“아~ 고희윤. 희윤이는 내가 알고 있지.”
- 그래. 희윤이는 어때?
“희윤이는 왜? 설마, 걔가 나 좋아한대?”
- 오빠. 정말 몰라? 희윤이가 오빠 좋아해서 오빠 영화에도 출연했잖아.
“됐어. 희윤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회귀 전에 강산이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것은 하영란과 고희윤의 연애 실패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하영란은 강산이 지은 죄가 있어서 자청한 면이 있지만, 고희윤은 강산의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고희윤의 잘못이다.
돈이 없는 것, 돈을 잘 벌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강산의 잘못이 클지도 모른다.
- 왜 희윤이가 싫어.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착하잖아.
“걔가 성격이 착하다고, 됐다.”
- 그럼 오빠 성격은 어떻고. 희윤이 정도면 오빠한테는 차고도 넘치지.
“그래, 나는 됐다고 그래라.”
- 희윤이 같이 결벽증 있는 애가 오빠같이 지저분한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만하자. 오랜만에 너하고 통화해서 기분이 좋았는데, 슬슬 기분 나빠지려고 한다.”
- 알았어. 나는 오빠가 희윤이를 싫어하는 줄은 몰랐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 오빠 다음에 전화해도 돼?
“그래. 다음에 전화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