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차영남: 10분만 주시겠소.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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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붓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성규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경찰관이 지키고 있는 병원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병실에는 명수가 이마에 붕대를 매고 오른 다리와 왼팔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명수의 아버지 차영남이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저씨. 저 왔습니다.”
“아~. 성규, 자네 왔는가?”
“명수는 어때요? 깨어는 났는가요?”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어.”
“사흘이나 지났는디, 의사 선상님은 머라고 허는가요.”
“별로래.”
“허기는 명수가 짝귀 애들에게 너무 심하게 당했어요. 명수 몸이 많이 상했는가요?”
“그러기도 하고 지병도 있고”
차영남이 피곤한 모습으로 성규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데, 명수가 깨어나려는 듯이 신음 소리가 났다.
“으... 으... 음”
“그래, 명수야. 나다. 정신이 드니?”
“아버지”
“그래. 내가 의사 선생님을 불러오마. 조금만 기다려라.”
“아버지. 목이 말라요. 물 좀 주세요.”
영남은 명수가 깨어나자 의사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명수가 물을 찾자 서둘러 종이컵에다 삼다수를 따랐다.
“그래, 여기 있다.”
차영남은 종이컵을 명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
명수는 왼팔이 골절되었는지, 왼팔을 깁스하고 오른팔에는 상처가 났는지 여러 군데 멸균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천천히 물을 마신 명수는 정신이 드는지, 영남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래”
“미숙이에게는 알리지 마세요.”
“미숙이는 이미 알고 있어. 어제까지도 여기 있다 갔다. 조금 있으면 교대하러 올 거야.”
“아버지. 아니 영남씨. 성규형하고 이야기하게 있어요. 자리 좀 비켜 주세요.”
“그래. 알았다. 밖에 나갔다 오마”
명수는 영남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얼굴에 마른 침을 삼키며 성규에게 말했다.
성규와 명수는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명수야”
“성규형”
서로에게 말할 것이 있었는가 보다.
“형이 먼저 말하세요.”
“아녀 명수, 니가 먼저 말혀”
“그럼, 내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요. 내가 먼저 말할게요.”
명수는 말하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짧은 말을 하는 사이에도 조금씩 뜸을 들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성규형, 국일관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일들 말이에요. 모두 내가 한 것으로 하고 해주세요.”
“솔직허게 말혀서 나도 비슷헌 부탁을 하려고 왔는디, 니 꼴을 본 게 그 말은 도저히 못 허것다.”
“그냥, 내가 말 한 대로 해주세요.”
“굳이 그럴 필요 업시야.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죄값을 치러야허지 안컷냐.”
“형은 가족이 있잖아요. 형이 들어가면 형수하고 애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어차피 틀린 몸이에요.”
“그러믄 나가 너무 미안허게 되는디”
“아니요. 대신 부탁이 있어요.”
“무신 부탁?”
“아버지하고 미숙이 좀 부탁해요.”
“너는 짝귀헌티 그렇게 당허구서도 그러냐. 나가 짝귀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쩔라고 그런 부탁을 허는 거여.”
“어쩌긴요. 귀신이 돼서라도 쫓아다녀야죠.”
“칼잽이 귀신, 그건 너무 무서운디”
“푸웃, 형. 그만 웃기고 나가 주세요, 피곤해서 쉬어야겠어요.”
“그랴. 몸조리나 잘혀라.”
* * *
병실 안에는 명수가 잠자고 있는지 소등이 되어 있고 명수의 느린 숨소리가 고요함을 해치고 있었다.
침대 반대편 간이침대에는 미숙이 누워있었다.
카메라는 병실에서 나와 병원 복도를 비추고, 짙은 회색 츄리닝에 검은 모자를 쓴 사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병원 복도를 걸어왔다.
사내는 길쭉한 칼을 오른손 소매 속에 감추고 있었다.
명수의 병실 앞을 지나가던 사내는 갑자기 돌아서서 병실 앞에 ‘꾸벅’ ‘꾸벅’ 졸고 있는 경찰관의 목을 칼로 찌르고 쓰러뜨렸다.
사내가 경찰관의 시체를 끌고 여자 화장실 칸에 버리고 화장실을 나가자 화장실 칸에서는 핏물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검은 모자를 쓴 사내는 명수의 병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와 취침등이 켜진 병실 안을 살폈다.
정면에는 명수가 침대에 누워있고 반대편에는 미숙이 보조 침대에서 자고 있다.
사내는 미숙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미숙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카메라는 잠든 미숙과 모자를 쓴 사내의 얼굴에 다가가고 사내는 고개를 돌려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바로 지만이었다.
지만은 미숙을 얼굴 가까이 대고 숨소리를 듣다가 일어서더니 명수에게 다가가 명수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명수야. 너하고 나의 질긴 악연도 여기까지다.”
천천히 칼을 꺼내 들고 명수의 심장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캬악!”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병실 밖에서 들려왔다.
간호사가 여자 화장실에 볼일을 보려고 들어가 화장실 칸을 열었다가 경찰관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간호사의 비명에 사람들이 화장실 앞으로 모여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전화를 걸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수의 병실 문을 지키다 교대로 쉬던 경찰관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면서 경찰서에 연락하고 있었다.
마침, 명수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주고 가려고 병실로 온 영남은 이 모습을 보았다.
명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 나쁜 느낌이 영남의 가슴을 조여왔다.
영남은 서둘러 명수의 병실 문을 열었다.
“명수야!”
영남이 명수를 부르며 문을 열자, 병실 안에서는 지만이 명수를 칼로 찌르려고 하고 명수는 지만의 팔을 잡고 버티고 있었다.
명수는 이미 여러 곳을 찔렸는지 환자복 상의에는 피가 가득하고 미숙은 병실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영남은 명수를 주려고 가져온 복숭아 검정 비닐봉지로 지만의 머리를 치면서 지만에게 달려들었다.
영남은 지만을 명수에게서 떨어뜨리려고 지만의 상의를 잡고 늘어졌다.
“영감, 떨어지지 못해!”
“명수한테서 떨어져!”
지만은 영남이 자신을 방해하자, 영남 먼저 해치려고 명수를 위협하던 칼을 빼려고 하는데 명수가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한 지만은 오른손 손목을 비틀어 명수에게서 벗어나고는 영남에게 칼을 휘둘렀다.
영남은 지만의 칼을 피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칼을 잡고 지만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상황이 역전이 된 것이다.
영남은 지만에게서 빼앗은 칼을 쥐고 있고 지만은 칼을 놓치고 병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영남이 칼을 쥐고 지만을 위협하자, 지만이 천천히 일어나 팔을 올리며 영남에게 사정했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어느새 모자가 벗겨지고 얼굴을 드러낸 지만은 칼을 들고 있는 영남에게 살려달라고 사정했다.
영남은 살짝 눈을 돌려 명수를 보았다.
칼에 찔린 배를 움켜쥐며 신음하는 명수를 보면서 영남은 결심했다.
‘여기서 이놈과 명수의 악연을 끊어내야 한다.’
영남의 눈에 살기가 번뜩이고 칼에 쥔 오른손이 지만을 향했다.
“아버지. 안 돼요. 그놈을 죽여선 안 돼요.”
명수는 아버지가 지만에게 칼을 휘두르려고 하자, 간신히 힘을 내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던 미숙도 깨어났는지 영남을 말렸다.
“아저씨, 안 돼요. 그만두세요.”
이때, 병실 밖에는 출동한 경찰관들이 병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었다.
경찰관들중에서 선임으로 보이는 자가 칼을 들고 있는 영남에게 말했다.
“아저씨! 칼 내려놓으세요. 이래선 안 됩니다. 칼 내리세요!”
“경찰 아저씨. 사람 살려주세요. 빨리요. 이 아저씨, 미쳤어요. 완전 미쳤다니까.”
지만은 경찰관들을 보고 힘이 생겼는지, 구경하는 사람들을 보고 위험한 순간을 넘겼다고 생각했는지 영남을 보고 미쳤다고 소리쳤다.
영남은 지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경찰 아저씨. 친구 문병을 왔는데 갑자기 칼을 들고 난리 치는 거예요. 여러분들! 증인이 돼 주세요! 도와주세요!”
지만은 경찰들이 있는 방향으로 뒷걸음질하면서 뒤로 물러서더니 경찰관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자 영남에게 윙크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영남은 지만을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영남은 막아서는 경찰들에서 칼을 크게 휘두르고는 자신에게서 떨어지게 했다.
강산은 이 장면부터 핸드헬드로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촬영하면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움직이는 잔상을 만들었다.
인물들의 잔상을 이용하는 이런 스타일은 마음의 스승인 왕가위 감독이 많이 사용하던 기법이다.
인물들의 잔상을 만드는 방법으로 필림 카메라에서는 주로 스텝 프린팅(Step Printing)을 사용하고, HD 카메라에서는 셔터 스피드를 느리게 설정하면 쉽게 만들 수 있다.
참고로 스텝 프린팅이란 프레임을 복사하여 원본 프레임 바로 옆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잔상을 만들어 낸다.
영남이 잔상을 남기면서 칼을 슬로우로 휘두르자, 경찰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과 포즈를 하며 슬로우로 물러서고, 영남은 복도에서 구경하는 간호사와 수액을 든 환자, 간병하는 환자 가족들을 향해 슬로우로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영남을 피하려고 혼비백산하고 각자 들고 있던 물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면서 슬로우로 복도를 걸어가던 지만이 이상한 소리에 천천히 뒤돌아보자, 뒤따라온 영남이 온갖 인상을 쓰고 슬로우로 지만의 배에 칼을 찔렀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카메라는 천천히 칼을 찌른 영남과 칼을 맞고 굳어있는 지만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칼을 맞은 고통에 눈이 커진 지만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털썩’하고 지만이 무릎을 꿇자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풀리고, 카메라는 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칼을 들고 있는 영남의 주변에는 경찰들이 긴박한 표정으로 영남을 포위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남은 두 팔을 올려 항복을 표시하고 경찰들에게 말했다.
“자수할 테니 10분만 주시겠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말이오.”
“칼 먼저 버리세요.”
“알겠소”
‘쨍그랑’하고 영남이 칼을 버리자, 영남을 포위한 경찰들도 길을 열어주었다.
영남은 지친 발걸음으로 명수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명수는 침대 위에서 울고 있었다.
아파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아파서 울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아파서.
영남은 명수의 침대 옆에 앉아서 명수를 지켜보다가 천천히 명수의 손을 잡았다.
명수는 힘들게 고개를 돌리고 영남과 명수의 눈이 마주쳤다.
영남과 명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컷, OK입니다. 이것으로 영화 <첫눈>의 촬영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