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이미숙: 나는 나일 뿐이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영화를 만들다 보면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다.
영화 <달콤한 인생 2005>에서 김지운 감독은 강 사장(김영철 분)이 귀국하는 장면에서 강 사장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자신이 찍으려고 했던 영화가 바로 이런 영화라고 매우 흡족했다고 한다.
강산에게 이런 느낌은 임정재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받았다.
차명수는 지금 폐암이 너무 많이 진행돼서 남은 수명이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교도소에서도 가석방을 받은 것이다.
차명수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되지만 담배를 피우게 만드는 현실에 분노하는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강산이 찍으려고 했던 영화가 이런 영화라는 것을 확신했다.
강산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아버지 영남과 애인 미숙을 사랑하지만 고백하지 못하다가 어느새 다가온 죽음 앞에서 묵묵히 참아내는 외로운 사내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 * *
강산은 차명수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편집점으로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이전 씬에서는 차명수의 정면으로 잡던 풀 샷에서 이번 씬에서는 차명수의 등 뒤로 가서 오버 숄더 샷으로 촬영했다.
이런 카메라의 각도는 차명수의 분노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성규와 미숙이 왜소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서정아는 왼쪽 소파 위에서 어깨를 떨고 있고 명수의 맞은편에 앉은 강태기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강산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규형, 미숙이 선수금은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선수금?”
“네가 빵에 들어갈 때 짝귀가 약속한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돈이고 나머지 하나는 미숙이 선수금이죠.”
“난 몰라. 도통 무신 말을 허는 것인지 모르것네”
“짝귀말로는 성규형에게 미숙이 선수금을 탕감해 주라고 했다던데”
명수의 차가워지는 말투와 표정에 성규의 표정이 창백해진다.
강산은 명수는 목소리로 처리하고 성규 역을 하는 강태식 배우의 표정에 집중했다.
성규는 명수의 이런 말투와 표정 뒤에는 항상 칼부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설정이다.
“며, 명수야. 오해허지 말고 들어. 짝귀가 헌말은 진실이 아니여.”
“그럼 진실은 뭔데?”
“그때 당시 짝귀가 비슷헌 말을 허기는 했지.”
“...”
“허지만, 당시 짝귀가 돈이 필요허다고 달마다 바닥을 긁어서 돈을 가져가면서 나보고 <헤라>를 운영허라고 허면, <헤라>는 어떻게 운영허며 나는 그렇다고 치고 내 밑에 애들은 어떻게 산다냐.”
“그래서”
“짝귀가 헌 말은 나보고 그냥 죽으란 말이고 진심으로 미숙이나 너를 위해서 허는 말도 아니란 말이여.”
“...”
“보스라는 사람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해도, 너무 허는 거 아니냔 말이제. 돈은 돈 대로 가져가고 돈을 벌어다 주는 에이스 수지까지 그냥 놔줘라 허면 끝나는 거냐구,”
“성규형, 이제 다 말했어.”
“그래, 다 말혔다.”
성규는 말을 마치고는 책상으로 돌아가 서랍에서 손도끼를 들고 왔다.
“아무리 명수 네가 칼은 잘 쓴다고 해도 그냥 손 놓고 죽을 수는 없제.”
“성규형, 잘 생각했어.”
명수는 일어서서 허리춤에서 시퍼런 날이 섬뜩한 사시미 칼을 꺼냈다.
식은땀을 흘리는 성규의 얼굴과 서늘한 표정의 명수의 얼굴이 교차하고, 명수의 눈빛이 변했다.
“내가 이래서 성규형을 좋아한다니까!”
명수가 성규를 향해 달려들려고 하자, 미숙이가 팔을 벌려 명수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해!”
“미숙아. 비켜 서.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
“명수. 네가 비켜”
“미숙아.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비켜라. 성규형이 기다리잖니?”
명수가 말을 듣지 않자, 미숙은 돌아서서 성규의 손도끼를 빼앗고 자신의 목에 대었다.
“나, 여기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칼 집어넣어.”
갑작스러운 변화에 명수도 미숙의 뒤에 있는 성규도 당황했다.
“미숙아. 그거 내려놔.”
미숙은 헝클어진 머리에 눈물에 얼룩진 마스카라가 번져 있었지만 야무진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명수가 칼을 내려놓지 않자 도끼날을 더 목에다 대었다.
그런데 손도끼의 날이 날카로웠는지 이미숙의 목에 댄 도끼날에 핏물이 보였다.
“네가 먼저 칼 내려놔. 빨리”
“알았어. 미숙아. 칼을 내려놓을 테니까, 말로 하자. 말로”
명수가 칼을 내려놓자 미숙은 목에 대었던 손도끼를 내려놓고는 명수를 데리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혼자남은 성규는 소파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컷, OK입니다. 오늘 촬영은 종료합니다. 내일은 오후 6시부터 촬영할게요.”
지금 시간이 새벽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테이크가 반복되면서 스텝들은 밤샘 촬영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강산의 종료 선언은 지친 스텝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생명의 말씀이다.
강산이 촬영종료를 알리고 모니터가 있는 곳으로 오자, 임정재, 서정아, 강태식 배우가 방금 촬영한 씬을 돌려보며 확인하고 있었다.
서정아는 목에 휴지를 대고 지혈하면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서배우님, 목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살짝 베었는걸요.”
“방금 전에 피가 배인 부분에서 NG를 걸까 하다가 서배우님 눈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했는데 정말 괜찮으세요.”
“저도 계속 연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래도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체크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정도 아니에요. 소독하면 괜찮을 거예요.”
강산은 이번 씬의 촬영용 소품으로 단검과 손도끼를 안전소품으로 제작하게 했다.
제작처의 일정 문제로 단검만 제작하고 손도끼를 준비하지 못하자, 진짜 손도끼를 소품으로 준비했다.
본래 설정은 성규가 도끼를 잘 다루기 때문에 도끼를 ‘X’자로 휘두르면서 싸움하기 전에 몸을 푸는 퍼포먼스를 하고, 명수도 단검을 손안에서 돌리면서 다루는 퍼포먼스를 생각했었다.
실제 손도끼를 보니 실수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아서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줄이고 손도끼와 단검의 날카로움을 강조하는 촬영을 해야 했다.
강태식 배우와 서정아 배우에게 손도끼가 날카로우니 주의하라고 경고했었다.
강산은 촬영 중에 서정아의 목에 피가 보여서 NG를 걸어 중단하려고 했는데 서정아의 눈빛이 너무 좋아서 NG를 걸지 못하고 계속 촬영했다.
* * *
이 영화 <첫눈>을 같이 한 스텝들은 강산 감독이 나이가 어리다는 것과 신인 감독이라는 핸디캡은 잊은 지 오래되었다.
이 무명의 젊은 감독이 운영하는 촬영 현장은 스텝들에게 이상하리만큼 책임감과 집중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강산이 지시하는 것 중에서 이해되지 않은 것들은 나중에 모니터로 확인해 보면 왜 그렇게 지시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촬영 현장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다 보니 불협화음이 나오기 쉽다.
특히,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 현장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스텝들은 촬영하는 동안 강산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배우들이 ‘NG’를 내거나 김여정 배우같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촬영을 거부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설득했다.
스텝들이 실수로 ‘NG’가 나도 촬영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큰 실수를 해도 오히려 실수한 스텝에게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우며 촬영장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을 스텝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모두 지쳐있지만,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이번 씬은 이미숙이 차명수를 <헤라>에서 데리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씬이다.
이곳은 남부터미널 근처의 3층 커피숍이지만 촬영을 위해 빌렸다.
2000년 들어 커피숍 체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인테리어를 한 커피숍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었다.
서정아는 지난번에 입었던 홀복 그대로 입고 있었고 목에 난 가는 상처는 분장으로 가렸다.
임정재도 지난번에 입었던 수트 그대로다.
카메라는 커피를 받으러 간 짧은 치마를 입은 이미숙의 뒷모습을 따라가다가 자연스럽게 커피숍 실내를 비추고 다시 창가에 앉아있는 차명수를 비추고 있다.
강산은 임정재가 폐암 말기라는 설정으로 피부톤을 조금 어둡게 하고 임정재도 계속 살이 빼고 있어서 잘생김이 가려지고 있었다.
카메라는 차명수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나가 반대편 상가의 네온 불빛들과 지나가는 차들을 비추고 다시 유리창 밖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차명수를 잡았다.
이미숙이 차를 가지고 와서 자리에 놓자, 창밖을 바라보던 차명수도 고개를 돌려 이미숙을 보았다.
“뭐 보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미숙아 그런데 너는 왜? 아니다,”
명수는 미숙에게 무언가를 물어보려다가 주저한다. 주저하는 것을 본 미숙이 명수에게 말했다.
“명수야. 뭐가 궁금한데? 뭐든지 다 물어봐. 다 이야기해줄게?”
“좋아, 너는 왜 룸에 나가는 거야?”
“돈이 필요해서”
“내가 돈 만들어 줄게. 나가지 마라.”
“안돼, 선수금 받아서 더 썼어.”
“네가 왜 영남씨 사채를 갚아주는 거야?”
“알고 있었어.”
“영남씨를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있길래 잡아서 손 좀 봐줬더니 영남씨가 사채를 썼다고 하더라. 그래서 며칠 후에 돈을 만들어갔더니 이번에는 누가 갚았다고 하는 거야.”
“누가 갚는 게 중요한가? 갚으면 좋은 거지. 뭐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내 여자라고 생각했어.”
“...”
“그래서 너를 지만이에게서 빼앗고 내 여자가 된 너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지만이 얼굴에 칼을 그어 버렸지.”
“알아”
“그런데 말이야. 네가 <헤라>에 일하러 나가고 네가 그렇게 번 돈으로 용돈을 줄 때마다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아. 나는 네가 <헤라> 일을 그만두게 하는 조건으로 지만이 죄도 대신 뒤집어썼다.”
“알아. 그래서 지금 장미여관에 있는 거잖아.”
“그런데 왜 다시 <헤라>에 나가는 거야?”
“내가 방금 말했잖아. 돈이 필요해서라고”
“그게 영남씨 사채를 갚아주려고 그런 거잖아.”
“명수씨 아버지는 내게도 아버지야. 가족을 위해서 그런 것도 하지 못하니”
“내가 돈을 준다고 했지. <헤라>에 나가지 마라.”
“명수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할 거야.”
“......”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나는 나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