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이영은: 카드 안 돼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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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말투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어서 먼저 사과 말씀드릴게요.”
“괜찮습니다.”
임정재는 이 시간이 조금 복잡하다.
강산 감독은 임정재에게 연기선생을 소개하면서, <첫눈>에 출연하는 서정아도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임정재는 평소 알고 지내던 서정아의 소속사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서정아의 연기선생 기모석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다.
실장의 말에 따르면 기모석 선생의 연기지도 방식이 다른 선생님과 달라서 어색했지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이다.
“선생님, 강산 감독을 잘 아세요?”
“네. 저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왜, 강산 감독은 선생님에게 가서 연기를 배우라고 했을까요? 그냥 궁금해서요.”
“음, 저는 강산 감독이라는 분을 처음 만났는데, 강산 감독은 저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요?”
“한강대학교 연극영화과 후배가 제 제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강산 감독이 한강대를 나왔군요. 그 제자 분 이름은 뭐죠?”
“강수현입니다.”
“강수현요?”
“본명이 강수현이고요. 예명은 고희윤입니다.”
“아~. 고희윤”
고희윤은 데뷔한 지, 3년 정도 된 신인배우다.
빼어난 외모도 외모지만 독특하고 매력적인 연기로 영화나 방송관계자들에게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 친구가 기모석 선생님 제자였구나.
“선생님. 강산 감독 지시대로 선생님과 같이하면 2주 안에 제 연기력이 좋아질까요?”
“그거야 임배우님에게 달렸지 않을까요.”
“제게요?”
“2주 동안 열심히 하면 바뀌는 것이 있을 것이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게 없겠죠.”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강산 감독은 내게 임배우님 말을 많이 들으라고 하더군요.”
“제 말을요?”
“네.”
“험, 험, 험, 무슨 말을 해야 하죠.”
“아무 말도 좋습니다. 음식 이야기도 좋고,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도 좋고요. 아니면 평소에 궁금해하는 이야기도 좋습니다.”
임정재는 기모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개인적으로는 친구들에게 와인 이야기나 패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 같아서 조심스럽다.
그래서 평소 고민하던 연기에 대해, 기모석에게 물어보았다.
“음... 선생님, 평소에 가졌던 의문인데요. 배우들에게 연기 수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배우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어떤 배우들은 연기 수업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어떤 배우들은 별 도움이 안 되기도 하죠. 정해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는 어떤 스타일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임배우가 누구인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고 고민이 무엇인지 알려고 이제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죠. 선생님 같은 코치에게 도움을 받으면 배우들의 연기력이 좋아질까요?”
“어려운 질문인데요.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요?”
“배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정한 정도까지는 코치들의 도움으로 연기력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은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럼 연기코치는 어느 정도까지 배우를 도와줄 수 있나요?”
“저는 물이 턱밑에 닿을 때까지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턱을 넘어서 코를 넘으면 물속에서 숨을 쉬는 법과 걷는 법은 스스로 배워야죠.”
“다음 질문,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연기력이 좋아질까요?”
“방금 대답한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이것도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예체능은 타고 난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런가요. 타고나야 하는가요.”
“...”
“제 진짜 고민은 정답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맡은 역할,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이 되지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눈빛과 표정을 고치고, 호흡과 발성을 배우고 연습하고 걸음걸이를 바꿔도...”
“......”
언제부터인가 임정재가 말을 계속하고 기모석은 임정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어떤 배우를 만났어요. 얼굴도 배우상이 아니고 몸매도 별로 예요. 연기에 대해 고민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면 개가 돼요. 하는 작품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저는 모차르트를 보고 좌절하는 살리에르의 마음을 이해가 되더라고요. 흐흐흑, 아~ 정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네요.”
기모석은 임정재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임정재가 울음을 그쳤다.
무언가를 벗어 놓은 듯이 얼굴이 조금 편해 보였다.
“선생님, 오늘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들은 몰랐으면 합니다.”
“네. 당연하죠. 상담 중에 비밀을 지키는 것은 심리상담가의 의무죠.”
“감사합니다.”
“임배우님. 제가 보기에는 좋아질 것 같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잖습니까? 그리고 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죠.”
“한 번 더 감사합니다.”
“자. 오늘은 상담시간, 아니 수업시간이 끝났습니다. 내일부터는 오후 7시에 뵙겠습니다.”
* * *
젊은 남녀가 종로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여자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오빠,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냐. 안 묻었어. 너 다리 안 아프냐?”
“나는 괜찮아.”
“나는 다리가 아파서 안 되겠다. 근처에서 잠깐 쉬었다 갈까?”
“오빠. 그러다 평생 누워서 지내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개수작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여자는 등을 돌려 걸어가고 남자는 아쉬운 표정을 하고는 여자를 따라갔다.
“컷. OK입니다. 다음 씬은 현수형하고 이영은 배우님이 옷을 갈아입고 오면 다시 시작할게요.”
이 에피소드는 영화가 너무 무겁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 톤을 가볍게 하려고 만들어 놓은 씬들이다.
김현수 배우는 한강대학교 과선배로 착한 교회 오빠 이미지를 가진 배우다.
지금은 이런 단역도 가리지 않고 출연하지만, 나중에는 이미지 관리 때문에 작품 선택기준이 까다로워 섭외하기 어려운 배우가 된다.
이영은 배우는 동그란 얼굴을 가진 고전형 미인이다.
<나는 악마다>에서 인상적인 피해자 역할을 하고는 은퇴했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
김현수와 이영은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종로거리를 걸어왔다.
“영은아. 잠깐 쉬었다 갈래?”
“왜, 피곤해?”
“어제 밤새 과제를 했더니 너무 피곤하네.”
“그렇게 피곤해?”
“그래. 피곤해. 내가 피곤하다고 하잖아.”
“오빠. 왜 그렇게 신경질을 내고 그래”
“너는 내가 피곤하다고 하는데 못 믿고 있잖아.”
“그래. 알았어.”
남자가 앞서서 걸어가자 영은이라는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허리를 잡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남녀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컷’을 외쳤다.
“컷. OK입니다. 배우님들이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오면 다시 시작할게요.”
지금은 4월이라 반팔을 입기에는 조금 이른 날씨지만 김현수와 이영은은 강산 감독의 지시로 여름 느낌을 주기 위해 여름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여름 옷을 입어야 해서 김영수와 이영은은 묘한 책임감을 느꼈다.
이영은은 맨 살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연기했다가 차가운 날씨에 다리에 소름이 돋아 NG를 받았다.
막내 스텝 승현이 노점에서 커피색 스타킹을 사오자, 이영은은 길거리에서 바로 커피색 스타킹을 갈아 신었다.
여름 옷을 입은 남녀가 나란히 종로 거리를 걸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먼저 걸음을 멈추고 남자에게 말했다.
“오빠. 다리 아프지 않아?”
“괜찮은데.”
“아~ 나는 좀 피곤하네~”
“미안, 오늘 많이 걸었지.”
“그래. 너무 걸은 것 같아. 너무 피곤하네. 잠깐 쉬었다 갈까?”
“아냐. 걷다가 쉬면 더 피곤해. 그냥 가자.”
남자는 여자에게 ‘가자’하고 여자의 팔을 잡고 걸어가고, 여자는 남자에게 끌려가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컷. OK입니다. 다음 씬은 <보성 여관>에서 촬영하겠습니다.”
* * *
강산은 <장미여관> 접수대 씬을 촬영하고 있었다.
이번 씬은 이곳이 여관으로 사용되는 에피소드를 촬영하려고 하는데, 실제 촬영장소는 목포에 있고 서울에는 <장미여관> 입구만 있다.
세트를 만들어 촬영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리얼함이 부족할 것 같아서 비슷한 곳을 찾아다니느라 스텝들이 고생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보성 여관>의 접수대다.
보성여관의 접수대는 <장미여관>처럼 기와 집 처마에다 통로 오른쪽에 있었다.
낡고 조용한 여관의 접수대에는 무뚝뚝한 차영남이 혼자 앉아 있었다.
이곳은 지나가는 남녀가 우연하게 들르거나 박카스 아줌마가 손님을 끌어오지 않으면 손님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장기 투숙객이 없으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보일 정도로 손님이 거의 없다.
강산은 오래된 느낌, 페인트가 바랜 벽을 좋아해서 박승희 미술감독에게 신경 써 달라고 했다.
이 골목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시간의 흐름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주려고 했다.
할머니가 조용히 여관 접수대로 와서 ‘똑’ ‘똑’ ‘똑’하고 절반 정도 열린 접수대 문을 두드리자 차영남이 얼굴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5,000원을 내자, 차영남은 방 키를 내주고 할머니를 따라 할아버지가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강산은 여관의 분위기와 톤은 대조적으로 만들고 싶었다.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방안의 붉은 조명과 어두운 분위기의 비해 방 밖의 정원이나 바깥 분위기는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들고 싶었다.
느린 영화의 흐름에 새로운 리듬을 주는 씬들이 김현수와 이영은의 등장이다.
먼저 앞장서서 <장미여관>의 접수대로 들어 온 김현수는 접수대의 문을 두드린다.
“아저씨 방 있어요?”
“있소.”
“얼마예요?”
“대실은 10,000원, 숙박은 30,000원”
“대실 할게요.”
“키는 여기 있소.”
김현수는 차영남이 건네주는 방 키를 받고 김현수의 등 뒤에서 얼굴을 숙이고 있는 이영은에게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이영은은 고개를 숙이고 김현수의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화면이 전환되고 어둠이 내렸다.
여름옷으로 갈아입은 이영은이 접수대의 문을 두드리고 김현수는 술에 취한 듯이 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아저씨, 방 좀 주세요.”
“어떻게 할 거요.”
“네?”
“대실이요? 숙박이요?”
“숙박이요.”
“3만 원이요.”
“아저씨 카드 돼요? 현금이 부족해서요.”
“여기는 카드 안 돼요.”
“그럼 어떡하죠?”
이때 구석에서 졸고 있던 김현수가 접수대로 다가오더니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