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임정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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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박형수와 삼청동 근처 <미노>라는 와인바에서 임정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형수와 임정재와 약속한 시간 8시다.
강산과 박형수는 10분 정도 빨리 7시 50분 정도에 도착했다.
8시가 지나가고 있지만 임정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노>에서는 프랑스 요리와 와인을 제공하고 8시부터는 클래식 기타연주를 공연한다.
의외로 클래식 기타 연주가 괜찮아서 와인을 마시며 좋은 분위기에 취할 수 있었다.
임정재와의 약속만 없었다면 말이다.
“강산아. 임정재가 전화를 받지 않는데?”
“매니저는요?”
“매니저도 안 받네. 지금이 8시 반이야. 아무래도 오늘은 틀린 것 같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죠.”
9시가 지나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화장실에 갔던 박형수가 웃으며 돌아왔다.
“됐다! 됐어! 강산아 됐어.”
“형, 뭐가 됐어요?”
“온단다. 임정재가 오고 있단다. 매니저한테서 연락이 왔어.”
“다행이네요.”
박형수는 강산이 조금 어려웠다.
예전에 알던 강산이 아니다. 어지간한 일에는 흥분하지도 실망하지도 않고 별다른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임정재 미팅만 해도 강산에게 부탁받은 일인데도 강산의 눈치를 보게 된다.
강산은 언제나 파이팅이 넘치고 사랑에 열정적인 동생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변해도 너무 변해서 나이가 많은 어른을 대하는 느낌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9시 반이 돼서야 임정재가 <미노> 안으로 들어왔다.
강산은 임정재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자신이 있는 자리로 올 때까지 임정재를 지켜보았다.
‘과연 들어오는 장면만으로 소름 돋게 만들 수 있을까?’
임정재는 자신을 알아보는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강산이 앉아 있는 자리로 들어왔다.
전작에 술을 했는지, 술 냄새가 풍겨왔다.
“안녕하세요. 임정재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갑자기 미팅이 길어졌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산입니다. 이쪽은 박형수라고 두 분은 서로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형수형. 오랜만이에요.”
“정재씨. 오랜만이네요.”
박형수는 임정재와 지난 번 작품을 같이할 때 형, 동생 하기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가자 다시 정재씨가 되었다.
“이정재 배우님. 와인 한잔 하실래요?”
“저야 좋죠.”
“배우님은 어떤 와인을 좋아하세요?”
“감독님이 좋아하시는 걸로 하시죠.”
“여기요!”
강산은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시켰다.
“사토 마고 한 병 주세요.”
“와~. 감독님 어떻게 제 취향을 아시네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서요.”
사토마고는 프랑스 보르도 5대 와인 중 하나로, 프랑스 와인의 자존심이라고 한다.
일본 영화 <실낙원 1997>에서 야쿠쇼 코지와 쿠로키 히토미가 와인에 청산가리를 타서 자살하는데 그 와인이 사토마고다.
임정재는 사토마고 한잔을 마시고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보내주신 작품 대본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보셨어요?”
“감독님. 진심으로 제가 이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어울린다고 생각하니까 캐스팅 하려고 이러지 않겠습니까? 다만 지금은 조금 어울리지 않죠.”
“지금은요?”
“네. 지금은 어울리지 않지만 촬영할 때 정도가 되면 차영남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촬영하는데요?”
“2주 후입니다.”
“2주 만에 가능하다고요.”
“네. 가능합니다. 제 지시만 따라 준다면요.”
“하하하,”
임정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와인을 나눠 마시던 박형수나 매니저인 박상수의 안색이 하해진다.
임정재는 매너가 나쁜 편은 아니지만 자신을 놀리는 말을 들으면 잘 참지 않았다.
임정재는 웃음을 뚝, 그치고 특유의 진중한 목소리로 연기하듯 말했다.
“감독님. 저를 놀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임배우님 놀리려고 영화를 촬영하는 도중에, 이곳에서 한 시간 반이나 기다리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감독님이 제 연기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멜로 연기가 싫어서 군대에 입대했었다는 것도요. 다양한 연기에 목말라 있다는 것도요.”
“......”
“저는 이배우님 연기가 나쁘지 않지만 뭔가 막혀있고 본질에서 겉도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독님, 감독님이 보낸 대본은 제가 하던 연기 스타일이 아닙니다. 또 제가 등장하는 장면도 많지 않아서 감독님이 원하는 캐릭터의 감정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힘을 빼고 연기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감독님. 제가 가능할까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임배우님이 이대로만 가도 10년 후에는 연기력 논란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감독님과 하지 않으면 10년은 연기력 논란이 있을 거라는 말입니까?”
“하하, 그런 말이 아니라 저하고 같이하면 임배우님의 고정된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뭐, 연기력 논란은 덤이죠.”
임정재는 와인을 따라 ‘벌컥 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일어나 강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독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강산은 경험이 많은 배우들과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배우의 나이와 연기는 관련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연륜이 없으면 보여줄 수 없는 연기가 있다.
김여정 선생은 강산이 예상하지 못한 호흡이나 템포로 대사를 치면서 박마리아를 연기했다.
묘하게 박마리아의 캐릭터를 만들어간다.
박마리아는 돈에 대한 개념도 없고 성매매를 하면서 살아가는 할머니지만 철없는 소녀 같은 밉지 않은 캐릭터다.
강산은 촬영지를 남산골 공원으로 옮겨서 촬영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김여정과 선우혜가 출연하는 씬이다.
박마리아(김여정 분)과 파주댁(선우혜 분)은 봄이 지나가는 연못 주변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파주댁. 얘, 너 그러는 거 아니야.”
“언니, 대체 무슨 소리야.”
“너 정말 이럴 거야?”
“내가 대체 뭘 어쨌다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 얘가 싸가지 없게, 큰 언니같은 사람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어, 이것아, 이 세계에도 상도덕이 있어. 상도덕”
“상도덕! 언니, 바쁜 사람 불러놓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뭐 헛소리라고. 얘, 아무리 사내가 없다고 나이 많은 여자 것을 건드는 거야”
파주댁은 선우혜의 극중 이름이다.
박카스 아줌마들은 본명을 서로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천안댁이나 영주댁, 파주댁 같이 출신지역 이름을 쓰거나 마리아, 소영, 진희 같은 예명을 사용한다.
그래서 선우혜의 본명 대신 이름을 파주댁이라고 하는데, 진짜 파주 출신인지는 알 수 없다.
“영남이 아저씨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래. 이년아”
“아저씨가 내가 좋다고 아저씨가 찾아오는데 내가 어떻게 해요.”
“얘가 뭐라는 거야. 얘, 젊다는 게 평생 갈 줄 아니? 한순간이야. 한순간”
“그러니까요.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고요.”
“파주야, 너는 다른 남자들도 많잖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녜요.”
“좋게 말할 때, 영남씨 옆에서 떨어져.”
“그럼, 언니, 그 대신 죽여준다는 기술 좀 가르쳐줘요,”
파주댁은 차영남을 그만 만나는 대신, 박마리아의 죽여주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나름 어부에게 물고기를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얘! 언니는 누가 언니야. 그리고 죽여주기는 누가 죽여준다고 그래. 나, 그런 거 없어”
“그럼, 나도 영남 아저씨 만나는 것은 못 그만둬요.”
“알았어. 그래 가르쳐줄게. 너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네. 언니도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얘, 알았다고 했잖아.”
“언니, 그런데 그게 말이야.”
박마리아가 죽여주는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자, 파주댁은 무슨 미안한 사정이 있는지 말을 주저한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벌써 마음이 바뀐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고, 나 영남 아저씨를 만난 지, 세 달이 넘었어.”
“뭐라고?”
“영남 아저씨, 안 만난 지가 석 달이 넘었다고”
“너, 그게 무슨 말이야?”
“몰라. 전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꼭 찾아왔는데, 석 달 전부터는 찾아오지 않아서 나도 궁금해.”
“삼 개월 전부터?”
“네...”
“음, 이제 알았어. 고 계집애 때문이구나.”
“뭐가요? 언니, 고 계집애가 뭐예요.”
“얘, 나 지금 어디 가봐야 해”
“어디 가는 데 이렇게 서둘러요? 언니! 고 계집애. 아니 죽여주는 기술 가르쳐 줘야 해”
“알았어.”
박마리아는 벤치에서 일어나서 말리는 파주댁을 뒤로하고 걸어갔다.
“컷, OK입니다. 다음 촬영지로 이동하겠습니다.”
* * *
이번 씬은 박카스 할머니들이 지나가는 할아버지를 유혹해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 씬이다.
카메라는 멀리서 박카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잡았다가, 핸드헬드로 앞서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잡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자 잠시 암전이다.
잠시 후, 다시 환하게 밝아지고 골목의 끝에 있는 장미여관으로 들어갔다.
박마리아는 지난번에 유혹한 할아버지를 데리고 <부래여관>으로 간다.
<장미여관>에는 손님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
<장미여관> 사람들은 박마리아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지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손님과 같이 갈 때는 <장미여관> 말고 항상 멀리있는 다른 여관으로 갔다.
박마리아는 <부래여관> 입구에서 방 하나를 대실하고 2층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상의를 벗은 채 침대위에 앉아 있고, 박마리아는 가방에서 박카스를 꺼내 할아버지에게 건네준다.
“이것 좀 마시면서 기다리세요.”
“고맙소.”
“오빠, 비아그라 좀 줄까?”
“비아그라? 그거 중국산 아냐?”
“아냐. 우리나라 약국에서 빼온 거야. 한 알에 오천 원 밖에 안 해”
“그럼, 그거 하나 줘 봐”
할아버지는 박마리아가 건네주는 비아그라를 먹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비아그라 기운이 도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이봐, 어서 시작하자구”
“네”
창문 밖을 멍하고 보고 있던 박마리아가 대답한다.
박마리아는 천천히 상의와 하의를 벗고는 햇빛이 비치는 침대 밑에 개어 놓았다.
검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드러내고 침대위로 올라오면서 화면이 어두워진다.
“컷. OK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