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유명세: 그만두고 싶습니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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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다행이도 날씨가 좋았다.
봄비가 내린 후라 정원 식물들도 조금씩 푸르름을 찾아가고, 시간이 갈수록 풀과 나무들이 생명을 더해 가고 있다.
강산은 계절이 더 지나기 전에 마쳐야 하는 씬들이 남아있었고 오늘은 어제 촬영하지 못한 이한과 이미숙 씬을 촬영할 예정이다.
강산은 서정아가 청소하는 마루의 반대편에 있는 이한의 방 근처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서정아에게 신호를 주었다.
이번에는 유리 문을 일부를 떼어내서 서정아가 움직이는 동선이 더 잘 보이게 만들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청소하는 이미숙의 엉덩이가 들썩이고, 치마 아래 허벅지와 무릎까지 드러나는 하얀 종아리가 드러나게 근접 촬영했다.
청소하던 이미숙은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말려 올라간 치마를 다시 정리하고 청소를 계속했다.
마룻바닥을 걸래로 훔치다가 잠시 쉬려고 땀을 닦고 있는데 반대편 방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한을 보았다.
이한이 이미숙과 눈을 마주치자, 깜짝 놀란 듯 몸을 숨기고 서둘러 방문을 닫았다.
이미숙은 화가 치민듯이 걸래를 마루바닥에 내려치고 맨발로 정원을 지나 이한의 방문 앞으로 갔다.
“야!~ 이 변태 새끼야!”
“...”
“야! 문 열어. 너, 이 새꺄. 문 안 열어”
“...”
이미숙의 화가난 목소리에 이한이 빼꼼하고 자기 방문을 열었다.
“지금 너, 뭐하고 있어.”
“아무 것도 한했어요.”
“너, 지금 막... 뭐 했잖아!”
이미숙은 입에 담기 곤란한지 말을 더듬거렸다.
“아무 짓도 한 했다니까요.”
“너, 지금까지 나, 훔쳐봤지.”
“네...”
“그러면서 뭐했어?”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너 나보면서 이렇게 했잖아.”
미숙은 이한에게 오른 손을 위 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아, 안 했어요.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럼 이게 뭐야!”
이미숙이 이한을 밀치고 이한의 방으로 들어가 이한이 등 뒤에 감추고 있는 물건을 꺼내 놓았다.
그것은 바로 마늘을 찍는 작은 절구였다.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이미숙,
이한은 이미숙이 청소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마늘을 찍고 있었다.
“오,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다행이네요. 오해가 풀려서.”
“다음부터는 조심하세요.”
“뭘 요?”
“그,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문을 열고 당당하게 보세요. 그리고 나를 볼 때는 절대 마늘을 찍지 마세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이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숙은 갑자기 화를 내며 소란을 피우더니, 오해했다고 사과하고 다음부터 주의하라고 한다.
“컷, OK입니다. 이제부터 서정아 배우님하고 이한 배우님, 컷을 별도로 따겠습니다.”
* * *
오전 촬영을 마치고 강산은 스텝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점심은 김두호가 섭외한 식당에서 배달 온 백반이다.
김두호는 스텝들에게 수저와 젓가락을 나누어주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수정과도 있다고 했다.
촬영을 시작한 지, 3주가 지나면서 스텝들과 호흡이 맞기 시작했다.
스텝들도 강산의 독특한 지시에 익숙해지면서 강산의 스타일에 맞춰 세팅을 준비했다.
오후에는 이한과 서정아가 친해지고 사귀는 장면을 촬영하려고 한다.
오전의 씬은 서로 친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가 연기에 도움이 됐는데, 오후에는 어떻게 연기 할지 궁금해진다.
이한의 방이다.
이한의 방에는 오래된 책들이 안쪽 벽을 채우고 다른 쪽 벽에도 책들이 쌓여 있다.
이 책들은 목포의 <열림>이라는 헌책방에서 삼 일간 대여해 왔다.
어제 비가 와서 촬영하지 못해 내심 덜컹했다.
삼일 안에 촬영을 마치지 못하면 삼 일간 더 연장해야 한다.
책도 책이지만 이곳에서 촬영은 내일까지 예정돼 있어서 더 연장하기도 곤란하다.
물론 스텝들에게는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다.
제작부장인 김두호의 걱정 섞인 잔소리는 참을 수 있는데, 다른 제작부장 유명세의 삐딱하고 냉정한 표정이 신경 쓰인다.
김두호는 제작부장보다 현장 스텝이나 다름없었다.
미술감독 박성희와 같이 헌책방에서 책도 빌려오고, 박성희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책을 쌓았다가, 낡은 책의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내리라고 했다.
김두호는 책을 다시 내리면서 차마 박성희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김두호는 지나가던 강산에게 이 업무의 부당함을 눈빛으로 하소연했지만, 강산은 김두호와 눈을 마주치고도 못 본 척 외면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유명세.
강산은 유명세, 이 친구가 왜 이곳 현장에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해피미디어에서 일을 한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강산이 알기에는 한국대 경영학과 출신에다 공인회계사 자격을 갖춘 전생에서 잘 나가던 LS E&M의 대표이사였다.
유명세를 아세요?
알지, 아주 잘 알지. 너무 잘 알아서 이름만 들어도 화가 날 정도다.
유명세는 강산을 잘 모르겠지만 강산은 유명세를 잘 안다.
유명세가 강산에게 직접적으로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영화계에서는 유명세의 성공스토리를 이야기할 때마다 강산을 끌어들였다.
류재일을 예술영화의 거장이라고 평가하면서, 에로영화의 거장(?) 강산이 같은 학교, 같은 학번, 절친이었다는 말을 빼놓지 않듯이 말이다.
유명세가 잘 나가던 덱스터 필름의 대표 시절,
영화계에서는 유명세가 투자하는 영화마다 흥행에 성공해서 <마이다스의 손>이라 하고, 반대로 강산은 투자하는 영화가 차례로 실패하자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비꼬았다.
해피미디어 사장인 최룡해의 지시라고 하지만 유명세가 하는 일은 고작 영수증을 받고 장부에 기재하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유명세가 아니라 일반 사원이 해도 충분한 일이다.
굳이 유명세가 촬영 현장을 따라 다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유명세는 한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해피미디어 입사하고 마케팅실에서 일했다.
한국대 출신이 중소기업인 해피미디어에서 일하는 것은 유명세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대 동아리 선배인 최룡해의 영향도 컸다.
우연한 동아리 선배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최룡해가 말한 미디어 세계의 미래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자동차, 선박을 만드는 기업이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문화 기업이 세계를 선도할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취향이므로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미디어 회사에 일하다 보면, 세계의 유명 영화제에 참가하고 영화를 수입하기 위해 각종 파티나 연회에서 세계의 미녀 배우들을 만나고, 사귀는 아름다운 상상력도 한 몫했다.
아무튼, 유명세는 대기업 입사를 포기하고 해피미디어에 입사했다.
그런데 해피미디어는 유명세가 기대한 미디어 기업과는 너무 달랐다.
형식적으로는 서울과 지방에 극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고, 영화를 제작해서 극장에 걸었다가 비디오 시장에 공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피미디어에서 운영하는 극장들은 단관도 있지만, 하루 두 편을 상영하는 영화관이 대다수였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도 주로 에로영화고, 그것도 직접 제작하지도 않고 애플프로덕션이나 다른 영화제작사에서 공급받고 있었다.
유명세는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해피미디어의 매출도 안정적인 상승세고, 중소기업이지만 회사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신입인데도 과장 직책을 주고, 봉급도 대기업 신입 수준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참을 수 없는 일이 있다.
해외영화제는 애초에 포기했다고 하지만 이 회사는 기본적으로 에로영화를 만들고 배급하는 회사다.
에로영화나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21세기를 대표하는 미디어 기업에서 일한다고 자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명세는 최룡해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님, 시간 좀 내주십시오?”
“음, 10분 정도 가능합니다.”
“1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회사를 그만두고 싶습니다.”
최룡해는 갑자기 찾아와 그만두겠다는 유명세를 쳐다보았다.
유명세는 한국대 동아리 후배로 제 발로 찾아와 해피미디어에 입사한 친구다.
해피미디어가 지금은 작은 회사에 불과하지만 몇 년만 더 고생하면 큰 회사가 될 테고, 그때는 해피미디어를 유명세에게 맡기려고 했다.
“왜? 갑자기”
“사장님, 갑자기가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고민하고 결정한 사항입니다.”
“그렇군요. 다른 직장은 정했나요?”
“아직입니다. 사장님이 사표를 수리해주시면 그때부터 찾아볼까 합니다.”
“그럼, 퇴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가요?”
유명세는 최룡해 사장, 사적으로는 동아리 선배에게 신세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최룡해의 마지막 임무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해피미디어에서 직접 영화제작에 투자하는 작품이 있어요.”
“아~. 영화제작요. 해피미디어도 이제 직접 제작투자를 하시는군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유과장님, 강산 감독이라고 아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음, 유과장이 직접 배본한 <두 자매> <사랑의 데자뷰>를 만든 감독인데 몰라요?”
“사장님. 그 감독님 이름은 청단 감독이 아닌가요?”
“청단은 예명이에요. 청단 감독의 본명이 강산이에요.”
“아~ 그렇군요.”
유명세가 지난 1년의 회사생활 중에서 그나마 재미있게 일했던 시간은 청단 감독이 만든 <두 자매> <사랑의 데자뷰>를 지방 극장주들에게 홍보하고 배본하고, 관객들과 소통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두 작품 외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해피 프로덕션과 다른 에로영화 제작사에서 만든 에로영화를 구매하거나, 흥행이 지난 작품들을 구매해서 극장에 상영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청단 감독은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두 자매> <사랑의 데자뷰> 두 작품만을 만들고는 영화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이 청단 감독을 찾았지만 아무도 청단 감독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애플프로덕션 이덕배 사장도 청단 감독에 관한 질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구했다.
애플프로덕션의 다른 직원들도 청단 감독에 관한 말은 금기인지, 청단 감독과 관련된 일들은 잘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그런데 해피미디어에서 청단 감독, 본명이 강산이라는 감독의 영화에 투자한다고 하는 것이다.
유명세는 최룡해 사장에게 하겠다고 말하고 영화 <첫눈>에 따라나섰다.
청단, 아니 강산 감독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보였다.
평범하게 생긴 겉모습만 보면 나이도 비슷한 또래에다, 스텝이나 배우들에게 친절한 젊은 친구였다.
회식할 때도 보았지만 술도 마시지 않고(와인은 술이 아니라고 하자)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재주는 있는 것 같았다.
영화 대본도 직접 쓰고 촬영도 직접 한다고 한다.
영화계에서는 대본을 직접 쓰는 감독이 있지만, 촬영도 같이하는 감독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검은 선글라스를 쓰면 달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