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박마리아: 너도 내과구나.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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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형. 송광호 배우는 아직 대답이 없어요?”
“산아.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강산은 박형수에게 전화해서 송광호 배우가 출연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박형수는 한강대학 연극영화과 선배로 학교를 졸업하고, 충무로에서 유영문 촬영감독 세컨드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촬영감독이 되려면 충무로 특유의 도제 시스템을 거쳐야 한다.
촬영감독 밑에는 퍼스트, 세컨드, 서드가 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드는 보통 3년 이상, 세컨드는 6년 이상 경력을 쌓아야 퍼스트로 승진할 수 있다.
박형수는 대학 시절에 만들었던 영화를 인정받아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세컨드가 되었다.
그래도 문제는 많이 남아 있다.
문제는 촬영감독이 되려면 5년 후에 퍼스트가 된다고 해도, 퍼스트 생활도 5년 이상을 거쳐야 하므로 앞으로 10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박형수는 답답한 도제 시스템에 실망해서 미국영화연구소 AFI로 유학을 떠났다.
“왜요. 안 된다고 해요?”
“광호 형은 출연하고 싶다고 하는데 소속사에서 출연을 반대하나 봐.”
박형수가 송광호와 지난번 작품에서 같이 작업하다가 형 동생을 먹었다고 자랑하자, 강산은 송광호에게 시나리오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송광호가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봤다고 하자 박형수에게 출연 가능한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소속사에서는 왜 반대하는데요.”
“그게 말이야. 건달 이미지로 굳어질까 봐 그런 거도 있겠지만 출연료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겠지.”
“소속사에서는 얼마를 요구하는 대요?”
“몰라. 물어보지 않았어?”
“형, 한번 알아봐 주세요.”
“산아. 광호형 기다리다가 네 영화 망칠까 두렵다. 다른 배우를 섭외하는 것은 어떨까?”
“아직은 3주 정도 여유가 있어요.”
“그래도 내가 부담돼서 그래.”
“그럼 형, 추천할 만한 배우 없어요?”
“임정재나 장우성은 어때?”
“형! 진짜 임정재, 장우성 배우들하고 연락돼요?”
“연락이야 할 수 있지. 내 보스 유영문 감독이 이 바닥에서는 워낙 마당발이야. 캐스팅은 몰라도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럼 연락해주세요.”
강산은 박형수가 추천한 송광호, 임정재, 장우성 배우들은 회귀하기 전에도 섭외하지 못했던 특급 배우들이다.
만약에 형수형이 섭외에 성공해서 이 배우들이 차명수 역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를 상상해 보았다.
먼저 송광호가 차명수 역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짙은 남색 꽃무늬 옷을 입은 차명수가 깡패처럼 이미숙에게 다가가서 거칠게 협박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긴장되게 만들 것이다.
문제는 송광호의 거친 연기를 서정아가 받아낼 수 있을지다.
서정아가 송광호의 날 것 같은 연기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처절하고 아름다울까?
송광호의 날 것 같은 연기를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다음 임정재가 차명수 역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트렌디한 명품 양복을 입고 2:8로 머리를 빗은 차명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미숙을 협박하고 주변 사람들을 유혹 할 것이다.
문제는 임정재의 미소가 비열하게 보여야 영화의 반전을 줄 수 있는데. 임정재의 미소를 관객들이 비열하다고 느낄까? 다른 매력으로 받아들일까?
임정재의 미소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민이다.
다음 장우성이 차명수 역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너무 잘생기고 착하게 생긴 장우성이 큰 눈을 끔벅이며 차명수 역을 한다면 어떨까?
관객들은 무슨 숨은 사연이 있어서 차명수가 악역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문제는 장우상이 악역을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이기도 하지만 서정아와 같이하는 투 샷이 너무 예쁠 것 같아서 고민이다.
* * *
차영남은 노란 스탠드 불빛이 비치는 서재 책상에서 하루 수입을 계산하고 있었다.
계산이 잘 맞지 않는지, 다른 고민이 있는지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때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지금 들어가도 될까요?”
서영남은 천천히 장부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들어오렴.”
이미숙은 쟁반에 커피를 받쳐 들고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커피잔에는 방금 만들었는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아저씨, 커피 드세요.”
“그래, 고맙다.”
이미숙은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려고 하다가 차영남에게 물었다.
“아저씨,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니다. 괜찮아.”
“참! 오늘 아저씨가 외출했을 때, 어떤 남자들이 아저씨를 만나러 왔었어요. 아저씨가 외출했다고 하니까 다시 오겠다고 했어요,”
“그래.”
“아저씨, 무슨 일이 있어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 같았어요.”
“무슨 일 없다. 그냥 아는 사이일 뿐이야. 나중에 그 사람들이 찾아오면 월요일에 다시오라고 하렴.”
“네. 아저씨”
이미숙이 문을 닫고 나가자, 차영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컷, OK입니다. 오늘 촬영을 마치겠습니다. 내일 촬영은 6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 *
어스름한 새벽,
강산과 스텝들은 5시에 일어나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산은 새벽 시간대의 어스름한 푸른 빛이 감도는 색감을 좋아한다.
이번 씬은 서정아와 박철이 출연한다.
강산은 서정아와 박철의 동선과 카메라를 체크하고, 촬영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주었다.
이미숙이 방문을 열고 나와서 부엌에 불을 켠다.
쌀을 씻은 후 냄비에 넣고 밥물을 맞추고 가스 불에 올리고 밥을 안쳤다.
잘 익은 쌀밥을 떠서 소금과 들기름으로 간을 맞춘 후, 둥글게 만든 밥을 김으로 감쌌다.
부엌 일을 마치고 마당을 청소하고 있는데, 조철성이 밖으로 나와 노가다일 하러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험상궂은 인상의 조철성이 출근하려고 하자 이미숙이 불렀다.
“철성 아저씨!”
“응?”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이미숙은 부엌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아저씨. 아침 드시지 않았죠.”
“그런데 왜?”
“간단한 주먹밥을 만들었어요. 가시면서 드세요.”
조철성은 이미숙이 뒤춤에 숨겼다가 건네주는 신문지에 싼 주먹밥을 받아들었다.
조철성은 주먹밥을 주고 돌아서는 이미숙을 지켜보았다.
“컷. OK입니다. 이번에 서정아 배우가 주먹밥을 주고 돌아서는 장면을 세 장면을 연이어 촬영할게요. 박철 선배님은 표정 변화를 조금씩 자연스럽게 연기해 주세요.”
박철 선배는 기대했던 대로 연기할 때마다 험악한 인상이 조금씩 부드럽게 변하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막장 인생을 살던 조철성이 이미숙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설정이다.
“잘 먹을게”
마지막에는 조철성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에드립도 했다.
“컷. OK요. 수고하셨습니다. 지금 8시니까요. 쉬었다가 11시에 다시 시작할게요.”
강산은 새벽부터 준비했던 촬영을 마치고, 배우들과 스텝들에게 11시까지 휴식을 주었다.
피곤한 사람들은 쪽잠을 자기도 하고, 잠을 자지 않는 친구들은 아침 세수를 하기도 하고 잠을 자는 친구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밖으로 나갔다.
강산은 주변을 산책하며 다음 촬영을 할 정원에서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고 있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카메라를 들고 비가 들치지 않는 건물 안으로 옮겼다.
굵은 비는 아니지만 쉽게 그칠 비처럼 보이지 않았다.
막내 스텝 승현이가 강산에게 물었다.
“감독님. 봄비네요.”
“그래. 봄비네.”
“감독님. 11시 촬영은 어떡하죠?”
“음, 조금만 기다려보자.”
고민이다.
강산은 승현이에게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비가 그치지 않으면 촬영하기 힘들 것이다.
미리 나눠준 일정과 대본에는 마루에서 바닥 청소를 하던 이미숙이 소설가 지망생 이한의 행동을 오해하고 정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촬영한다고 되어있었다.
비가 내리면 이 씬을 촬영하기 어렵다.
강산은 비가 내리는 이 씬을 상상해 보았지만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았다.
발칙한 부분이 있는데 쨍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
결국, 이 씬을 촬영하기 어렵다.
촬영을 접어야 하지만 제작비나 나머지 일정을 고려하면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배우들과 스텝들은 강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잠시 쉬었다가 2시에 다시 모일게요. 그때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오전 촬영을 접고 저녁 촬영으로 넘어갈게요,”
원래 계획은 오늘 낮에 이미숙과 이한의 에피소드를 씬을 촬영하고, 저녁에는 어젯밤에 내려온 박마리아 역의 김여정 선생과 장민호 선생이 같이하는 씬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강산은 내리는 비를 보면서 어떻게 비를 이용할까 생각했다.
비를 배경으로 서정아와 김여정이 마음을 여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일 찍을 장면 뒤에 이어서 편집하면 좋겠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바로 대본을 고치고 서정아와 김여정에게 쪽대본을 나누어주었다.
2시가 되자 스텝들에게 새로운 대본에 맞춰 조명을 준비시키고 음향팀에게 빗소리를 따놓으라고 지시했다.
비가 내리는 장면이 포함된 새로운 대본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이미숙은 청바지에 하얀 티를 입고 물걸레로 마룻바닥을 닦고 있었다.
비가 오는 소리에 잠시 쉬었다가 하려고, 마루턱에 앉아 비가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강산은 실내에서 촬영해서 실내의 어두운 톤과 정원의 비가 오는 밝은 톤이 대조되게 조명을 조절했다.
이미숙은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가 담배가 생각났는지, 상의에서 담배를 꺼내물고 라이터 불을 붙이고는 천천히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때, 박마리아가 천천히 다가와 이미숙의 곁에 앉았다.
“얘, 나도 담배 하나 줄래?”
“여기요.”
이미숙이 상의 티셔츠에서 담배를 꺼내주었다.
박마리아는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의 연기를 내뱉었다.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내뱉은 박마리아는 손가락을 세워 관자놀이 그 부근을 문질렀다.
“박하향이구나. 너 맨솔 좋아하니?”
“...”
이미숙은 박마리아의 말에 잠시 얼굴을 보았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비 내리는 정원을 보았다.
“아이구. 머리야. 너 힘세더라. 너 때문에 내 머리가 다 빠졌어.”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래요.”
“얘!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야.”
“아줌마. 죽여준다면서요.”
“무슨 소리야.”
“사람들이 아줌마를 보고 죽여주는 여자라고 하데요.”
“죽여 주긴 하지. 죽여줘야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얘, 어른한테 이상한 것만 물어보고 그게 무슨 예의니?”
“아줌마, 담배 돌려줘요.”
“너 정말 너무한다. 너 혼자 담배 피우는 게 청승맞아 보여서 같이 피워주려고 왔더니 그게 어른한테 할 말이니!”
“그냥 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세요.”
“혼자 있으려면 깊은 산속에 있는 절로 가야지. 여기는 왜 있어?”
“그러게요. 절에나 들어가야 하는데”
“얘, 그러고 보니까 너도 내과구나.”
“무슨 과요?”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을 그리워하는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