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강산: 미코출신 자존심 때문인가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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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는 이제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본을 읽으면서도 이미숙의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할 수는 있을지 고민했다.
대본에는 본격적인 성애연기 장면은 없지만, 아무래도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서 남자를 유혹하는 연기는 자신이 없었다.
서정아는 출연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강산 감독에게 미팅을 신청했다.
“감독님. 왜 저를 캐스팅했어요?”
“이미숙 역에 제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캐스팅 했습니다.”
“감독님, 다른 부분은 괜찮은데요. 노출 부분은 너무 부담돼서요. 줄여주거나 수위를 조금 낮춰 줄 수 있나요?”
“음, 나름 서정아 배우님 이미지를 생각해서 일부러 수위를 낮춘 대본인데요?”
“네?”
박은혜가 2010년에 출연했을 때 전라 노출에 비하면 서정아의 이번 노출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일부러 이번 대본에서는 이미숙의 성적 분위기를 줄이고 심리 연기를 부각하려고 노출 수준을 낮췄는데도 불구하고 서정아는 부담스러워한다.
강산은 이 정도의 노출 수준을 가지고 여배우가 출연을 고민하다니, 아무리 2001년이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1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서배우님, 혹시 미코출신이란 배우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고민하는 가요? 아니면 서배우님 자존심 때문인가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 고민인가요?”
“제가 수위가 높은 노출 연기는 처음이에요. 그동안 제가 했던 노출 연기들은 이 작품에 비하면 애들 장난 같아요. 그래서 영화에 부담이 될까 고민이에요.”
“그것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서정아 배우님은 최선을 다해 연기하시면 됩니다.”
“그래도요. 고려해 주세요.”
“서배우님. 대본을 보시면 알겠지만, 노출은 이미숙이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고 소통하는 수단 중에 하나 일 뿐이에요.”
“하지만...”
“음, 노출 수위는 서배우님과 상의해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독과의 미팅은 이렇게 끝났다.
서정아는 집으로 돌아와서 강산의 말을 생각해보는데 이 말이 계속 머리에 감돌았다.
‘미코출신이란 이미지 때문에 고민하세요?’
서정아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출연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스타보다 배우가 되기를 했지만 미코 이미지 때문에 들어오는 배역을 결정하거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미코 출신이라는 이력은 서정아에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장점으로는 미코출신이라 데뷔도 쉬웠고 지속적으로 배역이 들어와 연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하려고 하자, 미코출신이라는 이미지가 배우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서정아에게 들어오는 배역은 비슷했다.
주로 차가운 도시 여자. 차도녀다.
예쁘고 똑똑하지만, 정이 없고 냉정한 여자 역할이 많이 들어왔다.
이런 이미지를 벗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삶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첫눈>의 대본이 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범한 연기자 중의 하나로 남을 것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영화 <첫눈>의 이미숙 같이 다양한 모습을 가진 성숙한 여성 역할을 하고 싶은 욕망이 서정아를 자극했다.
강산 감독이 말한 것처럼, 미코출신이란 자존심이나 이미지 때문에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이 영화 <첫눈>에 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미코출신 배우가 노출 연기를 하는 것은 성현아가 거의 처음이다.
성현아가 출연한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 이전에는 거의 없었다.
성현아의 노출 연기도 마약 파동 이후 침체기를 보내다 재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느낌이고 사실 그 이후에도 거의 없다.
* * *
서정아는 강산이 요구한 대로 치마를 허리 위로 끌어올리고 허리 부분을 말아 치마 길이를 줄였다.
강산은 노골적인 노출보다는 자연스러운 노출을 좋아했다.
서정아가 카메라 정면으로 오면서 나무 바닥에 걸레를 훔칠 때, 상의 티셔츠 사이로 살짝 살짝 보이는 가슴 골이 부드럽게 흔들거렸다.
뒤로 돌아서 걸레를 밀고 갈 때는 서정아의 엉덩이가 들썩이고, 치마 아래 허벅지와 무릎까지 드러나는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강산은 서정아가 청소하는 장면을 2시간이 넘게 촬영했다.
서정아의 몸이 풀리는 듯이 얼굴도 자연스러워지고 얼굴에 제법 땀이 올랐다.
강산이 이번 씬을 OK하려고 하는데, 햇빛이 역광이라 할레이션(빛 번짐 현상)이 생겼다.
“NG요. 할레이션이 들어왔어요.”
헐레이션이란 인물 주위에 빛이 번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할레이션을 이용하면 부드러운 분위기의 인물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사진이라면 할레이션 효과를 이용해서 촬영하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할레이션이 생기면 NG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 영화는 거의 순광(대상물 앞에서 조명)으로만 촬영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역광촬영이 흔한 일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역광촬영은 2000년 당시 기술로는 어려운 조명 기술이었다.
조명 기술이 발전하고 디지털 카메라가 대세가 되면서 역광촬영은 영화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색채의 마술사.
강산의 옛날 버릇이 나왔다. 일정 상 참아야 하는데 이런 장면에서는 손이 근질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강산은 조명감독 정진수를 찾았다.
정진수는 전설적인 조명감독 정광석의 퍼스트 출신으로, 이번 작품이 처음 조명감독으로 참여하는 작품이다.
“감독님. 역광이라서 그런 건데요.”
“진수형. 역광을 이용해서 찍어볼까 해요. 한 5초간 정도요.”
“서정아씨가 너무 어둡게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보조광이 필요합니다.”
“감독님. 보조광을 테스트하고 촬영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실제 촬영하기까지 조명 스텝들이 너무 소모되는데요.”
조명감독 정진수에게 역광촬영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 같은 미션이다.
역광촬영은 헐리우드 미국 영화에서는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조명 기술이 부족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다.
일부 실험적인 영화에서 역광촬영을 도전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제가 지시한 사항만 지켜주시면 잘될 거예요.”
정진수는 강산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강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강산의 천재성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강산은 어린 나이에도 영민하게 현장을 이끌어간다고 느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상황판단과 결단이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역광촬영은 어떻게 할지 지켜보기로 했다.
강산은 서정아와 키가 비슷한 슬레이트를 치는 막내 스텝 한승현을 서정아 자리에 세웠다.
서정아를 카메라 테스트 용으로 세우는 것은 아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강산은 역광촬영 경험이 많은 감독처럼, 한승현은 무릎을 꿇게 하고 높이를 조절했다.
한승현의 얼굴을 기준으로 조명팀에게 보조광으로 반사판의 위치와 보조광의 방향을 조정했다.
이어 표면 그림자, 분리 그림자 등 음영을 세밀하게 조절했다.
“서배우님. 이쪽으로 와서 서 주세요.”
강산은 한승현의 자리에 서정아가 무릎 꿇고 선 위치와 카메라에 역광이 번지는 위치를 체크했다.
촬영이 다시 시작하자, 서정아는 엉덩이를 리드미칼하게 흔들면서, 긴 복도를 걸레로 닦아오다가 강산이 지정한 위치에 멈춰 섰다.
서정아가 멈춰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강산은 서정아의 얼굴에 역광의 빛이 부드럽게 스며들게 만들어 서정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카메라는 서정아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따라 내려가다가 목에 이르는 장면을 따라갔다.
서정아는 갑자기 무엇 인가를 본 듯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짓다가, 다시 허리를 숙여 걸레를 훔쳤다.
“컷. OK입니다. 서정아 배우님. 잠시 대기해 주세요.”
강산은 서정아의 촬영을 잠시 멈추고, 한승현을 다시 불렀다.
정원에는 장민호가 자신의 촬영을 기다리며, 카메라 밖에서 서정아의 연기를 보고 있었다.
막내 한승현이 장민호에게 가서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강산이 신호를 주자, 장민호가 유리문으로 다가왔다.
강산은 천천히 조금 어두운 복도에서 밝은 유리문으로 카메라 화면을 움직이고 유리문 밖에서 서정아가 청소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장민호를 촬영했다.
장민호는 복도에서 청소하는 서정아를 지켜보다가 주책없이 침을 꿀꺽 삼키고, 서정아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컷. OK입니다. 이번에는 정원에서 촬영하겠습니다.”
강산과 스텝들이 정원에서 촬영준비를 마치자, 한승현이 장민호에게 가서 준비해 달라고 말했다.
강산이 신호를 주자, 장민호는 천천히 집으로 들어오다가 유리문 앞에서 멈추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연기를 했다.
이 장면들은 서정아와 장민호를 교차 편집해서 이미숙이 청소를 하다가 서영남과 눈이 마주치는 장면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비밀이 있는 의심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다음 씬은 밤 씬이라 저녁 식사를 하고 촬영하기로 했다.
장민호는 목포에 오면 목포 10미는 먹고 가야 한다고 제작부장 김두호를 채근하고, 김두호는 해피미디어에서 나온 유명세 제작부장 눈치를 봤다.
강산에게도 눈빛으로 구원을 요청했지만, 강산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김두호는 울며 겨자 먹기도 스텝과 배우들을 데리고 근처 백반집으로 들어갔다.
메뉴가 한 가지 백반밖에 없는 평범한 백반집이지만 반찬이 18개나 나왔다.
전라도 음식점이라면 양도 양이지만 맛도 좋고 가성비도 좋아야 한다.
이 집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갈치구이에 제육볶음, 고등어조림, 꽃게 된장국, 각종 김치와 반찬까지 푸짐하게 나왔다.
강산이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만족한 표정이다.
반주를 마시는 장민호도 공기밥을 추가하는 스텝들도 만족한 표정이다.
제작부장인 김두호와 유명세도 맛도 맛이지만 1인 당 5천 원의 가격에 만족한 표정이다.
날카로운 인상의 유명세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눈으로, 투박한 인상의 김두호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왔다.
식당에 방문해서 전체가 식사하는 것은 촬영을 마치고 돌아갈 때나 가능할 것이다.
보통은 배달하는 식사에 만족해야 한다.
강산은 스텝들에게 30분 후에 시작하겠다고 하고, 스토리 보드를 점검했다.
이번 영화도 예산이 많지 않은 덕에 자신이 챙겨야 할 부분이 많았지만, 이전 <두 자매>를 촬영할 때처럼 극악의 스케줄은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끝을 낼 수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