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에로영화감독의 비상-85화 (85/140)

〈 85화 〉 강산: 치마 좀 올려 주세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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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 갯벌에서 촬영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다.

한 씬에 불과한데도 강산 감독은 서정아를 길게 따라가며 ‘컷’ ‘컷’ ‘컷’을 반복하며 찍고 또 찍었다.

서정아는 강산 감독이 쉽게 OK를 하지 않아서 불만이기도 했지만 길게 찍는 성향의 감독이라 생각했다.

강산은 ‘컷’을 하고 서정아에게 강산이 쉬었다가 다시 하자고 하자, 서정아는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자신이 타고 온 밴을 향해갔다.

코디로 따라온 이재영이 하얀 오리털 롱패딩을 서정아에게 서둘러 씌우며 호들갑을 떨었다.

“언니, 너무 춥죠. 빨리 차로 들어가요. 빨리.”

밴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온기가 얼굴로 따갑게 다가왔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이재영은 보온병에 담아 온 뜨거운 커피를 서정아에게 건네주었다.

“언니. 겨울바람이 피부에 안 좋아서 너무 걱정 돼요. 대체 이번 씬 언제 끝난 데요?”

“내가 아니? 감독이 알지.”

“강산이라는 감독, 너무 심하네요?”

“뭐가?”

“다른 사람들은 강산 감독이 빨리 찍는 다고 하더라고요.”

“빨리 찍는다고?”

“네. 지난번 영화에서는 하루에 일곱, 여덟 씬, 찍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런데 말이에요. 지난번에 강산 감독 영화에서 이규리 배우가 엄청 울었대요. 글쎄”

“이규리?”

“있잖아요. 요즘에 다시 뜨는 배우 말이에요. SBC 드라마 <여인 정난정>에 나와서 사약 받고 죽은 배우 말이에요.”

“화빈 최씨?”

서정아도 이규리를 알고 있었다.

미모도 연기도 나쁘지 않았지만 앵앵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연기를 계속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 후에는 에로영화에 출연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 드라마 <여인 정난정>을 보면서, 이규리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게 됐다.

냉정하게 말해서 연기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 수준으로 보였다.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앵앵거리는 목소리도 극 중 분위기에 따라 진중한 목소리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가끔씩 애교 부리는 씬에서는 약점인 앵앵거리는 목소리를 보여주면서 말이다.

“네. 그 이규리 배우 말이에요. 강산 감독이 다 죽었던 이규리 배우를 다시 살려냈다고 하잖아요.”

“그래. 이규리가 왜 울었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에요. 이규리 배우가 걸어가는 뒷모습에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에요. 엄청 이규리 배우를 굴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서정아는 종이컵을 이빨로 잘근 잘근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거지.’

이재영은 서정아의 하얀 얼굴 위에 파란 핏줄이 살짝 올라오자, 무언가 실수했다 싶었는지 재빨리 물러섰다.

“언니. 제가 잊어버린 게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촬영 시작하면 패딩은 자리에 놓아주세요.”

이재영은 깜박 하고 있었다.

평소 무난한 성격의 서정아지만 연기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민감하게 반응했다.

연기력은 서정아의 자존심이다.

서정아는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가 미모로 평가 받는 것을 포기하고 연기로 평가 받기를 원하고 갈망했다.

10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 인기는 많이 얻지 못했지만 이제까지 연기를 못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않았다.

그런데 강산 감독은 걸어가는 씬 하나를 두고, 벌써 몇 시간이나 OK하지 않고 반복해서 걸어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감정에 집중해서 걸어가 달라고 말이다.

강산은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서정아가 걸어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컷이요. 아주 좋습니다. 서배우님. 한번 만 더 갈게요.”

*   *   *

강산은 고정한 카메라의 렌즈로, 서정아가 갯벌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서정아의 걸어가는 모습에서 이미숙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렇다고 OK할 수 없는 컷이다.

서정아는 강산이 말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여자의 감정에 집중하며 갯벌 위를 걸어갔다.

눈을 감고 걸어보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보기도 하고, 수평선에 시선을 맞춰보기도 했다.

걸어가는 단순한 씬을 두고 이런 고민을 해보기는 처음이다.

연기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 고민하고, 공든 탑을 쌓아 올리듯이  연기력을 닦았다고 생각했다.

강산 감독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자신의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규리처럼 굴리려고 하는 것인가?

서정아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미숙의 감정에 집중하자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강산은 서정아가 카메라의 시야를 벗어나자, 고정된 카메라를 풀고 핸드헬드로 서정아를 따라 걸었다.

서정아는 이미숙의 감정에 집중하면서 걸었다.

질척거리는 갯벌 바닥에 블랙 롱부츠가 더러워진다 거나 차가운 겨울 바람에 피부가 상한다는 걱정은 어느새 사라졌다.

갑자기, 암전이 온 것처럼 서정아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갯벌 위를 걷고 있었는데, 지금은 짙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 작은 빛이 있었다.

작은 빛 속에 어린 여자아이가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서정아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정아의 눈물에 어둠이 지워지듯이 하나 둘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서정아는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멈춰서 울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한 서정아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고 회색 하늘을 보았다.

이런 연기는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정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놀란 것은 서정아만이 아니다.

카메라 렌즈로 서정아를 지켜보던 강산은 서정아의 먹먹한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감탄했다.

그때 하얀 눈이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정아는 스쳐 지나가는 눈을 만지려고 메마른 손을 내밀고 손바닥 안에 닿은 눈은 바로 녹아 사라졌다.

첫눈이다.

실제 첫눈이야 작년 10월에 내렸겠지만 이 영화 <첫눈>에서는 이 눈이 첫눈이다.

서정아는 어느새 이미숙이 되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처럼 하얀 미소를 지으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산은 이미숙의 미소를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싸리비가 섞여 있던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했다.

서정아는 길을 걷다가 함박눈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뒤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강산은 더 이상 서정아를 따라가지 않았다.

카메라를 내려 삼각대에 고정하고 카메라 렌즈로 서정아를 지켜봤다.

눈이 내리는 갯벌 속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했다.

*   *   *

강산은 이번 영화 촬영의 주 무대인 목포 적산가옥 거리에 있는 건물로 왔다.

적산가옥이란 적(敵)이 남기고 간 가옥이란 말로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망하고 일본인이 남기고 간 건물을 말한다.

강산이 영화 촬영을 위해 빌린 건물은 적산가옥은 아니다.

적산가옥 거리 근처에 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의 건축 양식이 조금씩 섞여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ㄷ’구조로 방이 배치되어 있고, ‘ㄷ’자 건물 중앙에는 작은 일본식 정원, 중정이 있었다.

방들은 좁고 긴 나무 마루로 이어져 있고 방에서 밖으로 나가려면 좁은 마루 끝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가야 한다.

이 건물은 강산이 회귀하기 전에 보았던 건물이다.

군산의 대표적인 적산가옥인 히로쓰 가옥이 ‘ㄱ’자 구조인데, 이 건물은 ‘ㄷ’자 구조가 다르다.

일제 강점기 목조 건물이라 창문이 많지만, 건물구조가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미리 섭외했다.

이 집을 섭외하지 못하면 군산의 히로쓰 가옥을 섭외하려고 했다.

다만 이 건물의 입구가 너무 일본식이라 2000년대 배경인 장미여관에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촬영한 장미영관 입구 씬과 교차 편집해서 사용할 예정이다.

참고로 회귀하기 전에 영화 <첫눈>에서는 여관 세트장을 만들어서 촬영했다.

강산은 고창에서 목포로 내려온 다음 날, 하루 동안 촬영할 건물을 점검했다.

미술감독 박성희에게 너무 깨끗하지 않게 건물의 낡은 부분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해 달라고 했다.

건물 뒤편은 의외로 넓은 공간이 남아 있었다.

이 건물에서는 2주 정도 촬영할 예정이다.

이번 촬영이 마지막이 아니다.

다음 촬영은 한 달이나 한 달 반 정도에 다시 올 것이다.

3개월 안에 모든 촬영을 마쳐야 하는 짧은 기간이지만 가능한 많은 시간의 흐름을 담고 싶었다.

장미여관에는 여관 주인 서영남과 아들의 여자친구(?) 이미숙 외에도 장기 투숙하는 오십 대의 박카스 아줌마 박마리아, 이십 대의 소설가 지망생 이한, 사십 대의 노가대하는 조철성이 살고 있었다.

이한 역에는 신인 배우 이영철, 조철성 역에는 연극배우 박철을 섭외했다.

이영철은 나중에 꽤 괜찮은 배우로 성장하는데, 주로 냉정한 검사나 대기업 실장 역할로 유명했다.

박철은 지금은 무명배우지만 나중에는 성격파 배우로 인상이 험악해서 그런지 조폭 보스 역할을 하거나 대기업 재벌 회장이나 작은 시골 마을의 이장 역할을 해도 주로 악역을 맡았다.

“컷. 서정아 배우님,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 지금 미숙이는 싫어하는 청소를 억지로 하는 중이거든요.”

“네”

강산은 서정아가 엉덩이를 들고 걸레를 눌러서 밀면서 긴 마루를 청소하는 모습을 촬영하고 있었다.

서정아는 치마를 입은 채로 걸레를 밀고 있었다.

강산은 카메라를 고정하고, 서정아가 걸레를 밀고 오는 장면과 다시 뒤로 돌아서 걸레를 밀고 가는 뒷모습을 다시 촬영했다.

강산은 박은혜처럼 육감적인 몸매가 아니라서, 서정아에게 섹시함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미여관의 남자들이 이미숙에게 반해야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전작의 이미숙이 농밀한 섹시함으로 장미여관의 남자들을 유혹했다면 이번의 이미숙은 주변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끌어냈으면 한다.

섹시한 애인 느낌 뿐만 아니라 청순한 첫사랑과 여동생같이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감정들을 서정아가 보여주지 못한다면, 강산이 서정아를 이미숙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컷. 서정아 배우님, 치마 좀 조금 올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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