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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에로영화감독의 비상-72화 (72/140)

〈 72화 〉 채은숙: 감독님 덕분에 잘 잤어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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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화본역에 도착해서 촬영할 장소를 살펴보았다.

경북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있는 화본역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만들어졌다.

일제 강점기의 건축양식 그대로 뾰족하게 세운 지붕이 인상적인 역사 건물과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급수탑이 유명하다.

나중에는 철도 마니아가 뽑은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의 화본역 모습은 강산의 회귀 전에 보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강산이 기억하는 화본역은 2007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끝난 2010년의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했다.

“우와,,, 정말 예쁘네요. 촬영장 세트 같아요. 날씨가 더 화창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아뇨. 지금이 딱 좋아요.”

채은숙은 소박한 화본 역사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화본역은 가을비라도 내리려는지 어두운 날씨가 화본역사의 아름다움을 감소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을에 떠난 사랑>이라는 이별 노래의 배경으로, 높고 푸른 하늘에 작은 역사는 이미지가 맞지 않았다.

지금처럼 우중충한 날씨가 어울린다.

좋은 날씨를 기대한 채은숙에게 미안하지만, 강산은 오늘 날씨가 좋지 않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회귀했으니까 알지요.’

하지만 회귀했다고 해서 전국의 날씨가 어떻게 될지를 기억하는 능력을 가지고 회귀한 것은 아니다.

50대의 기억력을 가지고 왔는지 선명하지 않고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결과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사실이나 일의 진행은 잘 모른다.

어제 기상청에 전화해서 물어봤다.

채은숙의 노래 분위기에 맞게 일부러 날씨가 좋지 않은 곳을 골라서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를 정한 것이다.

화본역은 작은 간이역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인근에서 가장 큰 오일장인 2와 7로 끝나는 날에 열리는 영천장을 보려고 사람들이 붐비지만 오늘은 주말도 아니고 영천장이 열리는 날도 아니다.

덕분에 촬영하기 수월할 것 같았다.

강산은 인서트 컷으로 사용하기 위해 먼저 화본역 주변의 배경들을 촬영했다.

화본역사와 승강장의 플랫폼, 길게 늘어선 기차선로, 증기기관차에 물을 대주던 급수탑을 연이어 촬영했다.

화본역에는 중앙선이 하루에 여섯 번 기차가 오가는데, 이미 두 편의 기차가 지나갔다.

마지막 편 기차가 떠나기 전에 오늘의 촬영을 마쳐야 한다.

내일은 한밤마을과 한남고택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   *   *

“은숙씨. 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세요. 리허설로 두 번 정도 연습하고 촬영에 들어갈게요.”

“이 장면은 사랑하던 남자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장면이에요. 이 여자의 감정을 생각해 주세요.”

강산은 채은숙에게 이 장면에서는 자신은 이렇게 촬영할테니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자신은 어떻게 촬영하는 지를 설명했다.

채은숙이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는 리허설 촬영을 하는데, 조명이 조금 흔들렸다.

“천일씨! 조명이 흔들렸어요.”

“죄송합니다. 감독님. 할머니들이 자꾸 말을 걸어서요.”

강산이 조명을 담당하는 조천일을 보자, 조천일이 강산에게 미안하다는 표시를 했다.

승강장의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이 조명판을 들고 있는 조천일에게 갑자기 말을 걸어서 조천일이 반응한 것이다.

강산이 촬영을 멈추고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을 바라보았다.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들이 미안한 듯이 말한다.

“뭐꼬? 우덜이 방해한 기가?”

“아뇨. 할머니. 괜찮아요. 금방 촬영이 끝나니까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미안하데이, 우덜이 잘 몰라가 그랬다카이.”

“괜찮아요. 할머니.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요. 잠시만 쉬었다 할게요.”

세 할머니 중에 한 할머니가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스카프에는 손자수로 구절초와 여러 가지 들꽃들이 수놓아져 있었다.

강산은 이 스카프가 조금은 투박해 보이지만 2020년 <구짜>의 화려한 플로라 디자인 못지않아 보였다.

“할머니. 스카프가 예뻐서 그런데요. 잠깐만 빌려주실래요. 촬영할 때 사용하고 돌려 들릴게요. 아니면 제게 파시면 안 되나요?”

강산은 할머니에게서 손자수 스카프 한 장을 5만원에 사서, 채은숙의 머리에 씌었다.

채은숙은 카메라 뷰파인더에 보이는 스카프가 마음에 들었는지 할머니에게 더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보자기에서 다른 꽃무늬 손자수 스카프 2장을 더 내놓았다.

추가 구매를 주저하던 강산은 채은숙이 나중에 계산해 주겠다고 하자, 할머니에게 2장 더 구매했다.

강산은 채은숙에게 할머니에게 구매한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게 하고, 화본역 입구에서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촬영했다.

날씨도 흐린 데다 바람도 불어서인지, 채은숙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걸어 들어왔다.

“은숙씨, 허리는 곧게 펴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들어와 주세요.”

“은숙씨, 걷는 템포가 너무 빨라요. 마음속으로 딴, 딴, 딴, 하면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어와 주세요.”

“은숙씨. 고개를 너무 숙였어요. 15도로 조금만 숙여야 얼굴이 보여요.”

강산은 본래 배우들에 대해 디렉션을 많이 하지 않았다.

채은숙처럼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눈빛이나 호흡, 손짓까지도 지시했다.

감독의 연기지시가 반복하고 촬영하는 테이크를 반복하다 보면, 연기지시를 받고 연기하는 배우도 감독이 원하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의 이 감정이 감독의 감정인지, 배우 자신의 감정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디렉션이 많은 감독들은 그제야 배우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진다고 말한다.

강산은 열 번이 넘는 테이크 만에 OK를 했다.

두 번째는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채은숙은 사랑하는 남자를 보고 교도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남자는 오지 않는다.

채은숙은 기차가 들어오기 전에 벤치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서서 쓸쓸하게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을 촬영했다.

머리에 두른 스카프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은숙씨, 천천히 일곱 걸음 걸어가다가 서서 마음속으로 셋을 세면서 뒤로 돌아보는 장면이에요. 뒤로 돌아서 저기 첨탑 끝을 보면 카메라가 천천히 따라붙어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얼굴을 45도 각도로 따라잡을 거예요.”

채은숙의 얼굴을 줌인하는 장면을 위해 회귀하기 전에 사용하던 카메라를 생각했다.

그 카메라는 카메라 레일을 사용하지 않아도 카메라 목 부분이 30cm 정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배우의 전신을 비추던 카메라가 배우의 특정 부분을 부각해서 다가서면, 관객들은 배우의 중요하고 내밀한 속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강산은 어제 철공소에 가서 투박한 철골 구조지만 카메라의 목 부분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별도의 받침대를 제작하고 촬영을 위해 가지고 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기차가 채은숙의 뒤로 돌아설 때까지는 전신 샷으로, 채은숙이 간의역 대합실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얼굴을 부각하고, 채은숙이 기차에 올라가는 장면에서는 다시 뒤로 물러서서 촬영할 예정이다.

“컷. 은숙씨. 뒤돌아보는 장면에서 3초 후에 눈썹을 조금 떨어 주세요. 눈물이 조금 어려도 좋아요. 그러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요. 절제하는 장면이에요. 알겠죠. 다시 한 번 더 갈게요.”

자신은 배우가 아니라며 연기에 자신이 없다던 채은숙은 강산의 디렉션과 반복되는 테이크로 표정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강산이 ‘컷 OK’를 하자, 잠시 정차 중이던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채은숙과 강산, 스텝들은 서둘러 기차에 올랐다.

카메라는 창문 밖에서 기차 좌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채은숙을 비췄다.    창문에 비치는 채은숙의 흐릿한 모습은 카메라가 기차 안으로 들어오면서 조금씩 선명해진다.

점점 기차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실내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채은숙을 비춘다.

기차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던 채은숙은 카메라가 기차 안으로 들어오자,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조용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자 채은숙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고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에는 저 멀리서 불빛이 지나간다.

강산은 노래의 시작과 끝은 기차에서 담기로 하고, 노래하는 중간, 중간에 채은숙의 느끼는 감정들을 화면에 담으려고 했다.

기차의 맨 뒤로 가서 기차 뒤로 이어지는 철길을 촬영하고 인근 기차역에서 내려 다시 화본역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화본역은 늦은 시간이라 시장에 있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국밥을 먹고, 화본 역 근처의 여관에 방 2개를 잡았다.

강산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을 채은숙에게 주고, 그 옆방에는 3명의 사내들이 같이 잠을 잤다.

아침 6시,

강산은 습관처럼 일어나 세면하고 화본역 주변을 산책하다가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 앞에는 채은숙이 나와 있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역 주변을 산책하고 왔습니다. 은숙씨는 잠은 잘 주무셨어요?”

“네. 감독님 덕분에 잘 잤어요.”

“제 덕분에요?”

“네. 감독님 덕분에 너무 피곤해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잠이 들었어요.”

“그거, 좋은 의미인가요?”

“그럼요. 제가 요즘에 걱정이 많아서인지 불면증이 있었거든요. 감독님 덕분에 오랜만에 잠을 푹 잤어요.”

“그런 의미라면 오늘 밤도 잘 주무시게 될 겁니다.”

“오늘도요?”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이동해야 하거든요. 아침 식사하러 가시죠?”

화본의 오늘 날씨도 흐리다.

생각 같아서는 바람도 불고 계속 흐렸으면 한다.

강산은 3분을 위한 촬영이지만 <늦가을>의 탕쉐이처럼 채은숙의 굳은 얼굴에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깊은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강산이 회귀 전에 보았던 채은숙이 <개여울>을 눈을 감고 부르던  표정은 전문 연기자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당~ 신은~’

눈을 감은 채 허스키한 보이스로 부르는 한 마디로 충분했다.

채은숙의 음색은 가수 계은숙이 일본에서 <참새의 눈물>을 부르던 전성기 시절의 음색을 보는 것 같았다.

채은숙의 굳은 표정 속에 숨겨진 부드러운 감정의 민낯을 보여줄 수 있다면 충분히 승부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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