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류재일: 너무 보수적인데.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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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3일 전,
오늘은 이만과 같이 리허설을 해보기로 했다.
이만이 꽃 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겪는 장면과 지하철에서 내리고 맨하튼의 <버치> 커피숍으로 이동하는 장면들을 촬영할 에정이다.
오늘의 리허설 중에서 주의할 부분은 이만이 거리에서 이동하는 장면이다.
이만의 말대로 리얼로 촬영하다 보면 이동하다가 불편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만은 꽃 집 장면과 커피숍 장면을 줄이고 거리에서 이동하는 장면을 늘리자고 했다.
이 장면은 류재일이 이 영화 <어느 하루>를 기획한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만이 리얼 다큐로 촬영하자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욕의 맨하튼 길거리를 걸어가다 보면 혼자서 걸어가는 여성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거나 성적인 말로 희롱하는 불량배나 양아치들이 많다.
특히 흑인 여성이나 동양 여성, 소수 인종 여성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심하고 더 외설적이다.
길을 가는 여성에게 휘파람을 불거나 성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캣콜링(catcalling)이라고 한다.
캣콜링이란 말 그대로 길을 가는 여자에게 고양이 부르듯이 말을 거는 행위를 말하고 길 위의 성폭력이라고도 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프랑스, 포르투갈, 아르헨티나에서는 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캣콜링이 무서운 점은 캣콜링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지속적으로 여성을 따라가서 성추행을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강간, 살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 *
영화는 이만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 아르바이트하려고 집에서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이만의 아르바이트 장소인 맨하튼에서 이만의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 순간, 영화를 마칠 예정이다.
이만이 지하철 역에서 내려 <버치>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구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하철 역으로 돌아가는 구간을 이만과 같이 체크하려고 한다.
이 부분이 이번 단편 영화 <어느 하루>의 하이라이트다.
오늘 리허설을 앞두고, 촬영을 맡은 폴이 갑자기 생긴 일정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본래는 폴이 이만의 앞에서 걸어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이만을 촬영하고, 앤드류는 카메라를 고정하고 이만이 다가오고 지나가는 모습을 촬영하려고 했다.
본 촬영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 류재일은 이만과의 리허설 일정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사실, 폴은 촬영 연습을 많이 했었다.
폴이 앞서 가면서 뒤따라오는 류재일을 많이 촬영해 보았지만, 이만과는 다른 체형과 보폭이라 테스트 촬영이 필요했다.
류재일은 카메라를 장치하기 위해 특수하게 개조한 등산용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이만의 앞에서 걸어갔다.
촬영용으로 개조한 등산용 가방에는 카메라가 흔들림을 방지하는 짐벌(Gimbal)이라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류재일은 영화의 대부분을 이만을 앞에서 리드하거나 뒤에서 따라가는 방식으로 촬영하기 때문에 어떻게 카메라의 흔들림을 줄이기 위해 짐벌을 생각했다.
카메라 화면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이런 장치를 짐벌이라고 한다.
일반 영화제작용으로 사용되는 카메라 짐벌은 부피가 너무 크고, 대여하는 비용도 너무 비싸다.
결정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을 숨겨야 하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별도로 제작해야 했다.
류재일은 이 장치를 만들려고 한 달 전부터 준비했다.
짐벌의 설계도를 그리고 제작해줄 공업사를 찾다가, 펄드맨 공업사에서 류재일이 설계한 짐벌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고 시제품을 만들었다.
류재일의 짐벌은 한강대학에서 단편영화를 만들 때 강산이 만들었던 모델을 개조한 것이다.
참고로 짐벌이란 장치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미국의 촬영감독 가렛 브라운이다. 1975년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강산이 설계한 짐벌은 당시 영화 촬영용으로 사용하던 짐벌처럼 정교하지도 않고 거칠지만 장치가 심플하고 조작하기 간결했다.
류재일은 강산과 독립영화를 만들면서 촬영을 맡은 적이 있었다.
여배우(고희윤 분)가 불량배로부터 도망치고 나쁜 짓을 당하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긴박한 표정을 잡으려고 짐벌이 필요했다.
짐벌 대여비용이 너무 부담이 된 강산은 철공소에서 짐벌이라고 뭉특하게 생긴 장비를 만들어왔다.
류재일은 엉성하게 생긴 장비를 짐벌이라고 하면서 테스트해 보라는 강산을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타박했는데 촬영 결과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 *
류재일이 강산에게 물었다.
“강산. 너 언제 짐벌 만드는 것을 배웠어?”
“군대에서”
“야! 강산. 네가 군대에서 제대할 때까지 밴드병으로 기타만 줄곧 쳤다는 것을 다 아는데 어디서 뻥을 치고 있어”
“밴드병이라고 군대에서 기타만 치는 줄 아냐.”
“그럼, 밴드병이 기타치지 않고 뭐 하는데?”
“내가 군대 가자마자 밴드병이 된 것은 아니야. 밴드병이 되기 전에는 땅개로 있을 때 낫질하고 망치질을 배웠지. 밴드병을 할 때에는...”
“잠깐, 네가 낫질을 해? 강씨 집안의 귀한 도련님이 군대에서 낫질하고 망치질을 배워?”
강산의 형제는 1남 3녀로 여동생들만 셋이 있었다.
아버지는 남자가 귀한 집안의 장남으로 어머니가 강산을 낳자, 감동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내아이를 낳으려고 아이를 계속 가졌지만 줄줄이 정연, 정화, 정미를 낳았다.
덕분에 강산은 사내가 귀한 집안의 장남으로, 세여동생들과는 달리 집안일은 하지 않고 자랐다.
“군대에서 세상 일이 무슨 상관이야. 고참들이 까라면 까야지. 재일이 너도 2주 동안 땡볕에서 낫질하고 망치질만 해야 하면 충분히 배울 거야. 하긴 방위가 군대에 대해서 알면 뭘 알겠어. 여섯시 되면 퇴근이나 할 줄 알지”
“캉산. 너는 말이 불리하면 항상 방위를 꺼내는데, 너 방위한테 열등감 있어.”
“아니 내가 운이 없다는 말이야. 밴드병 막내가 된 때부터 기타 치다가 선임들이 제대하고 간신히 최고참이 되었는데 말이야.”
“고참이 되면 편해지잖아. 나도 방위지만 고참이 되니까 진짜 편해지던데”
“어허! 형님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알았어. 계속하기나 해”
“내 후임들이 운이 없게도 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도련님들이야. 밴드병이 편한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공연을 하려면 세트장을 만들고 장비들 운반하고 수리해야 하는데 아무리 망치질 가르쳐도 할 줄을 모르는 거야.”
“일부러 배우려고 하지 않은지도 모르지”
“아무튼, 어쩔 수 없이 제대할 때까지 내가 무대 장치를 만들고 망치를 계속 들어야 했어. 나도 나름 도련님 출신인데 말이야.”
“군대 가서 사람이 된다더니, 너 군대 가기 전에는 장남이라고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떠받고 살았잖아.”
“떠받고 살기는 누가 그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누가 그러긴 네가 그랬잖아. 일전에 네 자취방에서 시골집에서 자랄 때는 라면한번 끓이지 않고 살았다고 나한테 라면을 끓이라고 했잖아.”
“그건 라면을 끓이기 싫어서 그런 거고. 인간적으로 너도 내 자취방에서 기생하고 살려면 라면이라도 가끔 끓여야지 하지 않냐?”
“내가 라면을 잘못 끓이기는 하지. 그런데, 정미 있잖아.”
“누구?”
“강산이 네 막내 동생 정미 말이야.”
“갑자기 걔는 왜? 그리고 네가 걔를 언제 봤다고 아는 척 하는 거야?”
“일전에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시골에서 갔을 때 정미를 봤어. 얘가 아주 야무지게 생겼더라.”
“야! 류재일. 정미는 이제 중학생이야. 어린 얘라고”
“캉산! 너 너무 보수적인데. 그리고 누가 뭐랬어. 친구 여동생한테 야무지게 생겼다는 말도 못해. 이제는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었다고 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자랑해 놓고는 이제 뭐라고?”
“뭐 보수. 헤이 진보. 진보는 10살 차이나는 친구 동생에게 관심을 가져도 되냐. 그리고 김대중 선생 이름이 왜 나와. 재일이 너는 그래서 안 돼.”
“안 되긴 뭐가 안 돼. 네가 정미 아빠야. 정미 오빠지. 세상일을 누가 알아. 그 때 가봐야 알지. 참! 여섯시다. 네 말대로 나는 퇴근해야겠다.”
* * *
류재일은 강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왔다.
대학시절, 류재일은 아버지의 재혼 문제로 아버지와 의절하고 집을 나왔다.
류재일이 잠자리를 찾아 동아리방을 전전할 때, 강산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함께 지내자고 손을 내밀어주었고 항상 자신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류재일은 본의는 아니지만 강산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혼자서만 도망친 것이 되어버렸다.
류재일은 강산의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두 뺨을 양손으로 쳤다.
“화이팅!”
스토리보드를 보고 있던 이만이 갑작스런 ‘화이팅’ 소리에 깜짝 놀랐다.
“왜 그래 제이, 무슨 일이 있어?”
“아냐. 집중하려고, 이제 시작할까?”
류재일은 이만의 앞에서 카메라가 들어있는 등산용 가방을 어깨에 메고 걸어갔다.
거리를 걸어가면서 ‘슬쩍’ ‘슬쩍’ 뒤를 돌아보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이만과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걸어갔다.
이만은 꽃 배달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꽃집에서 배달할 꽃을 받고 인근의 아파트에 직접 꽃 배달을 마치고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만은 커피숍 알바를 하러 <버치> 커피숍이 있는 맨허튼으로 가는 지하철로 갔다.
지하철에서 내리고 <버치> 커피숍으로 가려면 30분정도 걸아가야 하는데 그 길이 쉽지 않다.
이만은 7시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로 돌아가는 구간이 제일 어려운 구간이 될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목에 곳곳에 공사하는 구간이 많아서, 어떤 블록은 불빛이 꺼진 구역이 있었다.
결국 이만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불빛이 없는 밤거리를 지나가야 한다.
이 구간이 제일 힘든 구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 <어느 하루>를 촬영하기 전날.
류재일은 폴과 앤드류, 이만을 불러 영화의 분위기와 촬영 방식을 설명하면서 최종 점검했다.
이만이 꽃 배달을 하는 씬과 버치 커피숍으로 가는 씬, 버치 커피숍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씬, 3부분으로 나눠 촬영하기로 했다.
꽃배달하는 씬은 가볍고 경쾌하게 촬영하고, 버치 커피숍으로 가는 씬은 가볍지만 조금은 꽃배달 씬보다 어두운 분위기로 촬영할 예정이다.
이만이 버치 커피숍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씬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로 처리하고, 3부분의 화면 톤을 조금씩 다르게 촬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