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강산: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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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시작한 지, 오 일째다.
오 일째가 되면서, 스텝들과 배우들의 호흡이 조금씩 맞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스텝들도 조금씩 호흡을 맞추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강산이 원하는 세팅을 알아서 만들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다.
최철수 촬영감독이 아예 퍼져버린 것이다.
최철수는 어제까지만 해도 육체적으로 무리인 것 같았지만 그럭저럭 따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촬영을 마치고부터는 아예 들어 누웠다.
새벽 5시,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사방이 어두웠다.
강산은 카메라를 들고 새벽 촬영을 위해 잠자고 있는 안정민을 깨웠다.
어제 저녁에 미리 말해 두었지만 안정민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안정민을 깨우는 실랑이에 선잠을 깬 김두호가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좀 더 쉬라고 했다.
강산은 새벽잠에 취해있는 안정민과 함께 산을 향해 올라갔다.
“정민이형! 발 밑 조심해요!”
잠결에 안정민이 발을 잘 못 디딜까봐 강산이 말했다.
아직은 아침이 밝기 전이다.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분위기와 차가운 산 공기가 상쾌하게 다가왔다.
정상에 선 강산은 인서트 컷으로 사용하기 위해, 산허리에 거린 푸른 능선과 새벽안개가 오대산의 허리를 감싸고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카메라를 들었다.
안정민의 쫓기는 장면에서 강산은 안정민이 긴급한 장면을 살리기 위해 안정민과 같이 달리면서 촬영했다.
강산은 돌부리에 걸쳐 넘어지면서 큰 사고가 날 뻔 했지만 다행이도 카메라는 다치지 않았다.
안정민이 달리는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핸드핼드로 안정민을 따라가거나 앞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커다란 전나무에 기대어 헐떡이는 안정민을 촬영할 때는 카메라를 고정해서 지켜보았다.
어느새 주위가 밝아오자 강산은 촬영을 마치고 내려가기로 했다.
* * *
다음은 시아버지 정학과 며느리 은숙의 정사 씬이다.
영화 <남수 이야기>의 트리트먼트는 남수의 사고로 산속에서 우연하게 만난 은숙, 가희, 가은과 타임트랩을 통해 사랑을 나누는 전형적인 에로영화였다.
트리트먼트에는 며느리 은숙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중에 남수와 정사를 벌이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강산은 <남수 이야기>가 너무 전형적인 에로영화처럼 진행되는 것 같아서 고민이었다.
영화의 구조상 긴장감을 주는 요소가 필요하다.
강산은 새롭게 나타난 이방인 남수와 기존 집안의 권력자인 정학과 대립구도를 설정하기로 했다.
정학이 이집에서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며느리 은숙의 파트너로 남수 대신 정학으로 수정했다.
정학의 카리스마를 더하기 위해 며칠 전부터 장민호에게 수염을 깍지 말아달라고 했다.
며칠 사이 햇볕에 그을린 피부에 덥수룩한 수염, 장민호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치면 누구나 압도될 것이다.
이번 씬부터 누워있는 최철수 대신 강산이 카메라를 잡았다.
최철수는 건넌방에서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산은 최철수 촬영감독의 부재가 큰 일이 아니라는 듯이 거침없이 카메라를 돌렸다.
오히려 최철수 촬영감독을 존중해서, 최철수에게 맡겼던 카메라의 앵글이나 구도를 강산이 찍고 싶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번 씬은 장민호 선생님의 눈빛 연기와 선우혜 선배님의 표정 연기가 중요합니다. 참고로 이번 씬은 타임루프가 되지 않습니다.”
집에는 시아버지 정학과 며느리 은숙이 남아있었다.
너와집 마당 구석에 있는 우물가에는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이 비치는 이불 홑청들이 널려 있다.
은숙은 옛날 작두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삐걱’거리는 손잡이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물을 긷고 있었다.
시아버지 정학이 안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서 햇볕을 감상하다가,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는 성냥을 켜서 불을 붙였다.
카메라의 시선은 길게 내뱉는 담배 연기를 따라 천천히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며느리 은숙으로 전환된다.
은숙은 양동이를 들어 빨래거리가 담겨있는 빨간색 고무대야위에 물을 부었다.
참고로 고무대야에 있는 빨래거리는 실제 스텝들과 배우들의 빨래들이다.
정학은 마루턱에 걸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빨래하고 있는 은숙을 보고 있었다.
장민호는 며칠 전부터 면도를 하지 않아 하얀 수염이 듬성한데다 거친 눈빛에서 카리스마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정학의 사나운 눈빛 앞에서는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분위기다.
은숙은 고무대야 앞에 쪼그려 앉아서 열심히 손빨래를 하면서 은숙의 상의가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손빨래가 리듬을 타면서 은숙의 풍만한 가슴이 조금씩 드러난다.
정학은 담배를 피우면서 은숙의 가슴을 훔쳐보다가, 은숙이 빨래를 말리기 위해 일어서자 잠시 눈을 피했다.
은숙이 빨래들을 들어 빨랫줄에 넓게 펴서 걸어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정학과 눈이 맞았다.
은숙이 시아버지 정학을 보고 미소를 짓자, 정학은 은숙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뜨거운 눈으로 계속 은숙을 지켜보았다.
어색해진 은숙은 고무대야로 돌아가, 정학에게 등을 지고 빨래하기 시작했다.
다시 카메라 화면은 정학의 뒤로 돌아가, 밝은 햇볕 속에서 빨랫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은숙을 비춘다.
정학이 마루에서 일어나자, 주위의 분위기가 변한다.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정학은 천천히 일어나 마당을 지나 은숙의 뒤로 다가갔다.
은숙의 등 뒤에 정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정학은 은숙의 치마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컷. OK요. 지금부터는 선우혜 배우님 정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촬영할 거예요. 선우혜 배우님의 얼굴 외에는 옷이나 뒤에 있는 장민호 선배님의 모습도 흐려져 이미지로만 남을 거예요.”
이 원씬 원컷 방식으로 찍는 롱테이크 장면은 강산에게 도전이다.
예전에는 이런 장면을 찍으려면 배우들과 수십 번의 리허설하고 며칠에 걸친 테이크를 통해 촬영을 완성했다.
왜 갑자기 이런 방식으로 촬영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날씨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끝없이 푸른 하늘도, 밝게 빛나는 햇빛도, 신선한 공기도 강산의 마음에 들었다.
어떤 도전이나 시도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라고나 할까?
강산은 카메라 세팅을 선우혜가 연기해야하는 위치에서 선우혜의 얼굴이 부각될 수 있는 초점과 조명을 맞추어 놓고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연기는 선우혜에게도 도전이었다.
다른 영화에서라면 이런 단독 씬은 연기력이 매우 뛰어난 배우들이나 하는 것이다.
강산은 선우혜에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제안했다.
선우혜는 자신을 믿고 단독 씬을 제안하는 강산이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다.
강산은 선우혜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컷 바이 컷으로 컷을 잘게 쪼개면서 촬영할 생각이다.
선우혜와 장민호 컷을 나눠서 찍으면 더 노골적인 촬영이 가능하겠지만 선우혜가 단독으로 하는 롱테이크 만큼 관객들의 긴장감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우혜는 긴장을 풀려고 두 팔을 벌려 기지개를 펴기도 하고, 갑자기 팔 다리를 돌리고 옆구리 운동을 하였다.
오랜만에 보는 선우혜의 국민체조가 강산의 긴장감을 풀어주었다.
강산은 선우혜가 국민체조를 마치고 자리를 잡자, 선우혜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레디 액션’을 외쳤다.
장민호가 정학이 되어 선우혜의 뒤에 서자, 선우혜는 은숙이 되어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학이 은숙의 뒤에서 치마를 올리자, 은숙이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은숙은 정학의 행동에 다른 반항을 하지 못하고 은숙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지나간다.
카메라의 초점은 은숙의 얼굴에 맞춰져 있다.
은숙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고, 은숙의 얼굴 외에 나머지 부분들은 흐리게 처리되었다.
뒤에 있는 정학의 모습도 초점이 맞지 않는 실루엣으로 흐리다.
흐리지만 은숙의 뒤에서 정학이 허리를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질 때마다 은숙의 얼굴은 놀람과 수치로 일그러진다.
선우혜는 표정만으로 고통 속에 쾌락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드러낸다.
관객들은 선우혜의 표정 연기에 은숙의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언제 보여줄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뒤섞여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강산과 관객들의 감정의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시간이다.
카메라는 정학의 얼굴을 잡기 위해 은숙의 얼굴을 흐리게 만들고, 잠시 검게 그을린 정학의 얼굴을 비추고는 다시 은숙의 얼굴이 선명해 졌다.
은숙이 놀란 표정을 짓는 순간부터 정학이 일을 마치고, 은숙에게서 멀어질 때까지 은숙의 얼굴을 정면으로 지켜보았다.
은숙의 표정변화만으로 은숙의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선우혜의 연기 덕분이다.
“컷. OK요. 다음 씬은 잠깐 쉬었다가 갈게요.”
강산이 오케이를 하자, 주위에서 지켜보던 스텝과 배우들이 선우혜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 * *
점심식사를 하고, 남수가 타임트랙이 반복되자 반복되는 일상들을 지겨워하는 장면들을 촬영했다.
안정민의 표정도 부드러워지고 에로연기가 아닌 생활 연기도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았다.
남수는 하품을 하면서 지겨운 표정을 지으며 너와집 뒷벽에 테니스 공을 던지고 벽에 맞고 튕겨 나온 공을 받는 것을 반복했다.
우연이지만 불규칙 바운드로 튕겨 나온 공에 단잠을 자고 있던 강아지가 맞았다.
‘깨갱’하고 잠이 깬 강아지가 남수를 향해 짖기 시작했다.
남수가 강아지를 향해 발길질을 하는 장면들은 너무 자연스러워 연기가 아니라 실생활 같았다.
“정민이 형. 지금은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무료함, 벗어날 수 없는데 대한 불만들을 촬영할 거예요. 남수는 이곳이 천국인줄 알았는데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자연스럽게 연기해 주세요.”
안정민은 마루에서 갑자기 ‘아 씨발! 이게 뭐야!’ ‘악~’하고 소리치거나, 화장실을 가지 않고 너와집 뒤편의 텃밭에다 오줌을 싸거나, 튀어나온 무를 발로 차면서 반복되는 시간에 대한 무료함을 연기했다.
“컷, OK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