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조명기사 서지수: 말 내리기 어색해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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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두 번째 영화, <남수이야기>를 촬영해야 한다.
어젯밤 <다현 이야기>의 마지막 촬영이 늦어지면서, 새벽까지 촬영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7시가 된 지금도 깨어난 스텝이나 배우는 아무도 없었다.
강산은 <남수이야기>에 여러 가지 고민들이 남아 있었다.
첫 번째는 진짜 대본을 만드는 것과 두 번째는 배우들과 연기를 만들어가는 방법, 세 번 째는 야외촬영을 위해 자연광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강산은 <남수이야기>의 트리트먼트는 애플에서 출발할 때 이미 나누어 주었다.
오늘부터는 쪽대본이지만 진짜 대본을 나누어줘야 한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씬에서는 가능한 배우들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게 하려고 한다.
완전한 대본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점도 있지만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를 끌어내기 위해 시도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1992)>를 만들 때 배우들에게 시도했던 방법이다.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를 위해 시도하는 것이지만 배우들이 강산의 생각대로 따라올 수 있는지,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다.
마지막으로 <남수이야기>는 야외촬영이 많다.
가능한 최대한 자연광을 살려고 촬영하려고 하지만 감정이 섬세한 장면은 실내에서 촬영하려고 한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남수이야기>의 주 무대인 오대산 중턱, 화전민이 살던 너와집으로 이동해야 한다.
* * *
“네. 평창군 홍보실 이대영입니다.”
“애플 프로덕션의 영화촬영 스텝입니다. 촬영장소를 찾고 있는데요. 도와줄 수 있는 분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영화 촬영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강산은 서울에서 오대산으로 출발하기 전, 평창군청 홍보실 공무원에게 영화를 촬영하는 장소 섭외를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다.
힐링하우스 펜션과 화전민들이 살던 집의 대강의 위치를 말했다.
홍보실 공무원 이대영은 영화촬영장소라는 말에 아름다운 평창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강산의 요구를 충실하게 들어주었다.
손님을 받지 않으려는 힐링하우스 주인 부부를 설득하고, 화전민이 살던 집주인에게는 평창군 홍보를 위해 3일간 집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대영 주사는 강산이 만들려고 하는 영화가 에로영화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예술영화가 아니면 누가 에로영화를 찍겠다고 오지까지 가려고 하겠는가?
강산은 기왕 신세를 진 김에, 이대영 주사에게 화전민이 사는 집까지 길안내를 부탁했다.
이대영은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길안내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면서 우체국 집배원이 근처 방향으로 간다고 따라 가라고 했다.
포장된 도로까지는 에쿠스와 봉고를 타고 이동했지만, 굴곡진 비포장도로가 나타나면서 차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집배원과도 산허리에서 헤어지고, 집배원이 가리켜준 방향으로 한 시간 정도가면 나온다고 했지만 강산이 찾는 집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야! 강산, 대체 얼마나 남았어. 헉, 헉”
“이제 다 왔어”
“그 말은 아까도 했었잖아. 헉, 헉”
“그때 보다 조금 더 다 왔어”
“다 왔다는 말 말고 진짜 얼마나 남았냐고?”
“조금만 더 가면 돼”
“그것도 아까 한 말이잖아”
“촬영하다보니 그래. 조금만 더 가면 나올 거야.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김두호는 배낭위에 20kg에 달하는 35mm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산을 타고 있었다.
카메라는 촬영감독인 최철수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는 장비다.
카메라는 촬영감독이 아니면 손대서는 안 되는 기물이다.
최철수는 그렇게 일을 배웠다.
최철수 촬영감독은 평소 너그럽고 인자한 성격이지만 카메라에 대해서만은 달랐다.
실수라도 스텝들이 카메라에 손대면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
어디에 가든 촬영 카메라는 최철수 촬영감독이 챙겼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는 최철수 촬영감독이 아니면 손대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최철수의 이런 소신은 오대산 자락에 오르면서부터 시험에 들기 시작했다.
50세가 넘은 최철수는 비포장도로까지만 해도 카메라에 대한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하면서는 더 이상 소신을 지키기 어려웠다.
최철수는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다고 떨리는 육체를 채찍질했지만 그 채찍은 최철수의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하나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최철수는 몇 번이나 마태복음 6장 13절을 외우면서,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힘을 줄수록 자꾸만 굳어지는 다리와 자신도 모르게 내려가는 어깨를 멈추기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최철수의 카메라는 도와주러 온 강산 감독에게로 넘어갔다.
‘그래도 감독에게는 카메라를 맡겨도 되지’
강산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카메라를 김두호에게 양보했다.
카메라가 김두호에게 넘어가자, 최철수는 강산의 행동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두호 대신 카메라를 받으려고 생각했지만 애써 못 본 척하고는 다리를 주무르는 시늉을 했다.
김두호는 제작부장이지만 애플의 스텝들 중에서는 나이가 어린데다 건장한 편이라 이동할 때마다 스텝들의 무거운 짐을 들었다.
강산은 김두호 대신 카메라를 교대로 매기도 하고, 서지수 조명기사를 도와 조명기구를 들어주기도 했다.
촬영 장비를 든 사람은 스텝만이 아니다.
스텝들이 부족한 덕에 배우들도 교대로 짐을 들거나 조그만 짐이라도 옮기는데 도와주고 있었다.
* * *
강산은 숲이 우거진 계곡이 나타나자, 다시 카메라를 내리고 스텝들에게 촬영을 준비하게 했다.
안정민은 하와이 셔츠를 입고 계곡을 헤매는 연기를 했다.
산과 개울을 뛰어다니다가 개울에서 발을 헛디뎌 쓰러진 후에는 자연스럽게 다리를 저는 연기를 했다.
강산은 다리가 풀린 최철수 대신 카메라를 잡았다.
안정민의 연기에 리얼함을 살리려면 핸드헬드로 촬영해야 한다.
최철수는 이미 다리가 풀려 카메라를 들거나 어깨에 메고 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강산은 안정민이 장민호에게 쫓기는 장면을 핸드헬드로 거친 흔들림을 만들어 남수의 긴박한 감정을 만들었다.
무리한 장면이 아니면 어지간한 장면에서도 ‘컷’을 하지 않고, 연속으로 촬영을 계속했다.
“정민이 형.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뒤도 돌아보고 불안한 표정을 연기해 주세요.”
안정민은 계곡에서 달리다가 의도하지 않게 넘어졌지만 바로 다시 일어나 달리기를 계속하면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다급한 연기를 했다.
이런 안정민의 연기는 이규리의 연기열정이 다른 배우들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7월의 폭염 속에서 안정민은 산악달리기를 계속했다.
안정민의 뺨에 흐르는 땀과 거칠어진 숨소리는 굳이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연스러웠다.
산등성이를 달리다가도 가끔씩 뒤돌아보는 장면도 잊지 않았다.
“최감독님. 애들 갑자기 왜 그래요?”
“뭐가?”
조명기사 서지수가 조명장비를 정리하면서, 카메라를 정리하는 촬영감독 최철수에게 물었다.
“최감독님. 배우들 말이에요”
“배우들이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최감독님 보기에는 어떠세요. 이상한 것을 모르겠어요.”
“서기사. 서기사가 보기엔 뭐가 이상해?”
“그게 아니라요. 왜 이렇게 진지하게 연기 하냐고요?”
“그게 어때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요. 배우들이 저렇게 나서면 우리들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항상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거야 당연히 그래왔죠. 라고 하기엔 좀...”
“서기사. 그렇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이번 현장은 다른 현장과 좀 다르지”
“네. 많이요. 자연스럽게 집중이 돼요. 강산이 있잖아요.”
“어허! 강산 감독”
“네. 강산 감독요.”
“아무리 그래도 감독인데 말조심!”
“네. 죄송합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조수로 알던 사이라. 실수했습니다.”
“서기사가 중심을 잡아야지. 다른 사람들 눈도 있는데”
“네. 조심하겠습니다.”
“강산 감독이 왜?”
“네. 신임감독이라 만만하게 생각했는데 노장감독 같아서요. 현장을 아주 노련하게 조율해요. 화를 낼만도 한데 흔들림도 없고요. 오히려 배우는 부분이 많은 거 같아요.”
“음... 서기사가 보기에도 그렇지.”
“언제부터인가 제가 강감독에게 말을 올리고 있더라고요. 지금은 말 내리기 어색해요.”
화전민이 사는 집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강산은 화전민이 사는 집이 보이지 않자, 일부러 찾는 것을 늦추는 것처럼 장소에 맞는 장면들을 만들어 배우들에게 연기를 하게 했다.
장민호는 밀짚모자에 늘어진 런닝구를 입은 농민이 되어, 처음 보는 밭에 들어가 익숙한 일인 듯이 쟁기질을 했다.
옥수수 밭에서는 이규리와 박미혜가 들어가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우연히 절벽처럼 가파르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보이자, 안정민에게 그곳으로 올라가게 했다.
안정민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불평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가파른 바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표정 씬까지 리얼하게 찍고서야 벼랑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 * *
이윽고 강산이 찾던 너와집이 멀리 나타났다.
너와집은 깊은 산속에서 지붕에 이을 기와나 볏짚 등을 구할 수 없는 지역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너와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본래 너와집은 구조상 중앙에는 마루를 두고 위쪽에는 온돌방들, 옆에는 부엌, 아래에는 외양간까지 한 지붕 아래 포함하고 있는 구조다.
그러나 이 집은 지붕만 너와로 올리고 보통의 시골집 구조처럼 마당에 들어서자 마루가 정면에 보이고 마루 뒤에는 방들과 부엌이 보인다.
너와집을 둘레로 쌓아진 돌담과 그 주위에 피어난 들꽃들은 파란 하늘과 더불어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강산의 일행이 너와집으로 다가가자, 기다리고 있던 집주인이 반갑게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이 집은 사전에 평창군청 공무원 이대영을 통해 사전에 섭외해 두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시요. 이런 곳까지 찾아오느라 고생이 많았소이다. 12시 정도에 온다고 하던데 조금 늦었구려.”
“네. 이것저것 구경하고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먼저 약속한 것이나 주시요.”
“여기 있습니다. 약속한대로 이 집 사용료로 하루에 10만 원씩 3일간 총 30만원 중에서 20만원을 먼저 드리고 10만원은 모래 떠날 때 드리겠습니다.”
“그럼 모래 아침에 다시 뵙겠소이다.”
주인 아저씨는 강산에게 돈을 받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랫마을을 향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