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박현태: 이제 바나나 가족이 되야 불었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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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옥상에서 아래에 펼쳐진 거리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장 골목들과 오래된 건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10년이 지나면, 이 지역은 도시 재개발의 광풍으로 완전하게 바뀔 것이다.
여기 땅을 사놓을까?
여기 있는 아무 땅이나 사두어도 돈이 될 것이다.
아니다. 강남이다. 돈이 있다면 강남에 몰빵해야지. 영끌이라도 해서 말이다.
그런데 돈이 없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돈이 없다. 미래는 저만치 멀리 있고 현실은 너무 가까이 있다.
현실은 에로영화를 만드는 애플의 잡부일 뿐이다.
현실에 집중해야 한다.
조금 더 있으면 이덕배 사장이 에로영화 감독을 제안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받아들일까? 거절할까?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다시 전생의 에로영화 감독생활이 반복될 지도 모른다.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아무것도 없다. 담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 생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는 제작부장 김두호가 시키는 대로 3층과 4층, 옥상을 청소하면서 보냈다.
청소를 하면서 회귀하기 전에 이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번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왜 하필 이 시기에 회귀했을까?’
정확한 날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즈음, 애플에 감독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덕분에 강산은 애플의 잡부에서 갑자기 에로영화 감독으로 고속 승진을 했었다.
그때는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애플의 잡부일이 너무 힘들어서, 잡부 일을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생각했다.
촬영 보조를 하다가도 조명기사가 부르면 조명보조, 녹음기사가 부르면 녹음 보조를 하고, 촬영이 끝나면 편집기사 보조까지 해야 됐다.
이러다 과로사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덕배 사장이 감독을 해보겠냐는 제안에, 아무 생각 없이 감독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회귀하기 전에 강산은 에로영화 덕분에 돈을 벌었지만, 에로영화 감독출신이라는 족쇄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에로영화 감독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예 에로영화 감독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애플에서 잡부로 일하면서 1년을 채운 후에 애플을 벗어나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강산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사실, 강산이 미래를 결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당장은 이곳 애플을 벗어날 수 없다.
* * *
‘박두철 감독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덕배는 박두철 감독의 대안을 찾아 고민하고 있었다.
‘박두철이 없다 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최선의 방법은 박두철 감독이 돌아와서 해결하는 것이다.
결자해지라고나 할까?
지금이라도 박두철이 사과하고 돌아오겠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받아줄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들어온 사람은 티가 나지 않지만 나간 사람의 빈자리는 크게 보인다는 말이다.
있을 때는 모르지만 없어져야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이덕배는 애플의 전임감독 박두철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이때 삼송의 프리미엄 폴더폰이 울렸다.
잠깐이지만 이덕배는 이 전화가 박두철 감독의 전화가 아닐까 가슴이 뛰었다.
아니, 박두철 감독의 전화이기를 바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 이사장. 어때 지금 전화가 가능헌가?
“실례지만 누구신가요?”
- 나여. 나. 바나나 박현태.
바나나는 먹는 바나나가 아니다.
바나나 필림이란 에로영화 제작사를 말한다.
바나나 필림의 사장 박현태는 조폭 세계의 선배로 연예기획사를 운영하다가 에로영화계로 들어온 지는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의 인맥 덕인지, 실력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에로영화제작사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이덕배는 박현태가 조폭세계의 족보상 형님격이라 바나나의 박현태를 어려워했다.
아직도 조폭세계에서 은퇴하지 않고 힘을 쓴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이고 형님. 오랜만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 그려. 나야 평야 그라고 살제. 요즘 필드에 나가서 공치는 재미로 살고 있어. 동상은 어쩐가?
“저는 뭐, 그저 그렇습니다."
- 동상, 공은 칠 줄 알제?
"조금 칩니다. 그런데 형님.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는가요?”
- 그게 말이여, 나가 동상하고 공 좀 치면서 이야기 할게 있어서 말이여. 술도 하고 오랜만에 몸도 풀고 말이여
"형님. 요즘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서요. 공은 다음에 치지요. 그 때는 제가 형님을 모시기로 하고, 하실 말씀이 계시면 그냥 하시지요."
- 그려, 나가 좀 동상에게 부탁 할 것이 있어서 말이여.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돌리실까요. 바로 말씀하시지요.”
- 긍께 그거시 말이여, 나가 동상 헌티 쪼까 미안한 말을 해야 혀서 말이여.
“형님. 말씀 돌리지 마시고 말해 주세요.”
- 그려. 동상도 이제 알아는 둬야 허는 것잉 게, 말은 혀야 것제. 동상.
“네”
- 박두칠이 말이여. 박두칠이
“네?”
- 박두칠이가 말이여. 이제 바나나 가족이 되야 불었어. 그란게 자네가 좀 박두칠이를 풀어줬으면 좋것네.
“박두칠? 형님 말은 혹시 박두철 감독을 말하는 가요?”
- 그려. 박두칠이. 저간의 사정은 나가 말을 혀기는 좀 거시기 허고. 이제 바나나 가족이 되어 부렀네.
“......”
이덕배는 박두칠의 말에 가슴이 턱 막혀온다.
‘이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박두철 감독이 돌아와야 이 위기를 풀어 가는데, 박두철이 바나나에 들어가면 애플로 돌아오기 어렵다.
아니 박두철이 돌아오지 못한다.
강제로 박두철을 뺏으려고 하다가는 진짜로 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느 뒷골목에서 칼침을 맞을지도 말이다.
- 그래서 말이여. 그만 박두칠이 집 근처에 풀어 논 아이들은 동상이 그만 거둬들여야 것네. 내 말 듣고 있는가?
“네”
- 박두칠이도 집에는 들어가야 허지 않겄어. 애들이 지 아빠를 찾아서 울고 불고 어미를 괴롭힌다고 그러더라고.
“아니 형님.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한 거 아닙니까?”
- 알제. 나가 동상 맴을 알제.
“형님. 박두철 때문에 제가 죽을 지경입니다.”
- 그랑게 나가 먼저 동상에게 공을 치자고 허지 안컷어. 험, 험, 내 급헌 전화가 와서 말이여, 이만 끊어야 것네. 그럼 다음에 보세잉.
“혀, 형님! 형님!”
- 뚜뚜뚜뚜...
이덕배는 바나나 박현태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이 눈앞에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바나나 필림은 항상 전임감독을 구하고 있었지만, 박두철 정도의 중견감독은 쉽게 구하지 못했다.
이 바닥이 좁다.
바나나 필림 박현태 사장의 과거는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문제는 실력이 있는 감독들과 스텝들을 고용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누가 조폭출신 사장 밑에서 일하려고 하겠는가?
이덕배도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지금도 조폭 출신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스텝들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강산 같은 잡부도 있는 거고.
이제는 박두철도 없으니, 어렵게 구한 전임감독도 없어진 셈이다.
바나나의 박현태는 진짜다.
사실 이덕배의 과거도 만만치 않지만 박현태에 비하면 준수한 편이다.
그런데 박두철은 박현태를 선택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박두철은 이덕배의 손을 피하려면 박현태 정도는 되어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박현태는 이덕배보다 정말 무서운 자였기 때문이다.
박두철의 입장에서는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간 것이지만 당장에 화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박두철은 이덕배를 피해 여러 제작사 사장들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연락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이덕배의 과거를 아는 사장들은 박두철을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받아주고 싶어도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만큼 이덕배의 과거도 만만치 않다.
무서운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하다.
이덕배는 박두철의 과거를 모두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두 팔 벌려 안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박두철은 이덕배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만 생각했다.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 * *
“무슨 일인데, 그래”
최철수는 이덕배가 빨리 와달라고 하는 전화를 받았다.
최철수는 박두철 감독이 잠수타고 영화제작이 늦어지면서 시간이 남는 덕에 회사 근처 기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덕배의 전화를 받고 최철수는 서둘러 사장실로 들어갔다.
무슨 큰일이 났는가 싶어 달려왔는데, 이덕배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박두철이요.”
“그래. 박두철이 연락 왔어? 지금 어디 있대?”
“바나나에 갔대요.”
“뭐 바나나?”
“네, 바나나필름.”
“박현태. 그 양반이 있는 바나나필름 말이야?”
“네. 그 바나나필름”
“아~ 박감독도 생각이 있을 텐데, 가도 하필이면 바나나로 간데?”
“그러게 말이에요. 박현태 그 양반은 저도 어려워요. 바나나에는 저도 힘을 쓸 수 없어요. 그건 그렇고 형님. 이제부터는 어떡하죠?”
떠난 버스에는 손을 흔들지 않는다.
이덕배의 장점은 태세전환이 빠르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전에 말한 방법은 어떨까?”
“무슨 방법요?”
“한 편은 이 사장이 구매하고, 한 편은 최현우 감독에게 맡기는 거 말이야.”
“형님. 형님말대로 하려면 최소 6,000이 필요해요. 지금 저는 3,000 만들기도 빠듯해요.”
“이사장.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지날수록 사정이 더 어려워질 거야.”
“그래도 형님. 3,000만원 안에 해결책을 만들어야 해요.”
최철수는 이 상황에서도 3,000만원으로 해결하려는 이덕배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돈은 나중에 해결하는 자신의 생각하는 방법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럼 이사장. 신인 감독에게 맡기는 것은 어때?”
“신인 감독요?”
“그래. 신인 감독이라면 이사장의 3,000만원 예산 안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단 작품 수준이나 2주 안에 만들 수 있을지는 보장하기는 어려워.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할 수만 있다면 그런 부분은 감수해야죠. 적당한 신인 감독 있어요?”
“으음... 적당한 감독이 있지.”
“누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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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