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이덕배: 돌아오게 만들어야지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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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은 어때?”
“제 쪽은 어려울 것 같아요.”
이덕배는 담배를 길게 내뱉고는 비벼 끄며, 최철수에게 말했다.
어제 최철수와 이덕배는 박두철 감독의 잠수로 빵구가 난 두 작품을 채우기 위해 고민했다.
이덕배는 외주 제작사를 알아보고, 최철수는 영화를 맡을 감독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래도 그 쪽은 의리가 통하는 세계 아니야?”
“의리요? 의리는 무슨 의리에요! 지금이 무슨 쌍 팔년도 아니고, 형님이 생각하는 그 쪽도 이제는 돈이 아니면 통하지 않아요. 그런 세계가 된 지 오래 됐어요.”
“플레이보이에서는 뭐라고 그러는데?”
“플레이보이요. 거기는 저희보다 더 어려워요. 도매상들에게 선금을 받고 영화를 만들고 있대요.”
“그럼, 위험하잖아?”
“그래서 작품을 빼주기 어렵대요.”
플레이보이 메이커스 조영수 대표와 이덕배는 같은 뒷골목에서부터 알던 사이다.
둘이 만나면 서로 ‘브라더’ 라고 불렀다.
에로영화 제작사도 급이 있다.
자본력이 되는 제작사들은 스스로 제작비를 충당해서 영화를 만들지만, 영세한 제작사들은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하려고 도매상들에게 선수금을 빌려서 영화를 만들었다.
이런 시스템은 매우 위험하다.
도매상들의 선수금으로 만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흥행에 실패하면 선수금은 미수금으로 변하고 제작사가 모든 빚을 떠안게 된다.
플레이보이는 도매상들의 선수금을 받고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마이웨이는?”
“거기는 편당 3,000만원 달래요. 자기도 일정이 빡빡해서 우리에게 한 편을 주려면 자기들도 한 편은 외주를 줘야 한다고 하고.”
마이웨이 픽쳐스의 봉춘식은 영화감독과 제작사 대표를 겸하고 있다.
애플 프로덕션에서도 가끔 마이웨이 픽쳐스에 외주 제작을 맡기고 있었다.
봉춘식 대표의 입장에서도 갑자기 한 편을 달라고 하면 곤란하다.
이미 만들어 놓은 작품이 있거나 다른 일정이 없으면 몰라도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기 쉽지 않다.
“으음... 센데. 두 편이면 6,000이네.”
“......”
이덕배는 고민이 많은 듯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사장실 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김양아! 여기 커피 두잔!”
“네!”
최철수가 이덕배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사장. 한 편에 3,000만원이라면 조금 센 것 같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이사장. 그냥 받지 그래.”
애플에서 해피머니에 납품하는 두 작품 말고, 남는 작품들을 도매상에게 넘기면 편당 2,000에서 2,500정도로 작품비를 받았다.
편당 3,000만원은 비싼 편이지만 급행비라고 생각하면 그리 비싸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이덕배의 생각은 최철수와 달랐다.
“그게... 말이에요. 형님. 지금 상황에선 편당 2,000도 주기 힘들어요.”
“이사장. 지난번에 5,000정도 여유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 1,000은 외상으로 하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잖아”
“5,000요. 그거, 다 써버렸어요.”
“그 돈을 다? 어디다?”
“강남 아파트 계약금으로 다 써버렸어요.”
“갑자기 왠 아파트냐?”
“요즘 마누라 친구들 세계에서 강남 아파트 분양이 유행이래요? 애들도 점점 커 가는데 언제까지 남의 집에서 살아야 하냐고 하도 바가지를 긁어서요. 5,000은 아파트 계약금으로 다 썼어요.”
“하필...”
“그러게요. 하필”
“아파트 중도금은 어떻게 하려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죠.”
“이 시기에?”
“네... 아무튼 작품을 사오는 것은 어려울 거 같아요. 형님은요?”
* * *
강산이 회귀한 지, 하루가 지났다.
숙식은 회귀하기 전처럼 애플에서 해결했다.
밥은 아침은 굶고 점심은 애플 직원들과 함께 먹고, 잠은 소품실 구석의 야전침대에 누워 잤다.
회귀 전에는 야전침대에서 생활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기억한다.
불편하기도 했지만 애플 잡부 생활이 힘든 것뿐만 아니라 군대 생활을 다시 하는 불편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지난밤은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회귀 전 마지막 삶이 너무 힘들었나 보다.
애플의 건물 1층 돼지갈비 식당에서 나는 냄새도 제법 괜찮았다.
강산은 이 냄새를 아주 싫어했었다. 에로 영화처럼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의 냄새였으니까.
‘무엇을 해야 할까?’
강산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고민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전생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강산이 애플 프로덕션에서 잡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영화 <나마스테>를 찍으려고 빌린 사채 때문이다.
‘사채업자의 돈을 빌려 독립 영화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없고 무모한 일이지만 그때는 무리한 도전이 아니라 젊은이들만이 가능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제에 출품해서 수상하면 상금을 받아서 빚을 갚거나, 영화가 완성되면 제작사에 판권을 팔아서 빚을 갚으면 된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노가대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 갚으면 되고.
실제로 집 전세금을 빼서 독립영화를 만들다가, 돈이 떨어지면 영화 촬영을 잠시 멈추고 노가대나 알바를 하거나 돈이 모이면 다시 영화를 만드는 선배들도 많았다.
강산과 류재일은 해피머니에서 각각 500만원씩을 빌려서 총 1,000만원으로 영화 <나마스테>를 시작했다.
나머지 부족한 자금은 그때, 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융통 하거나 돈이 떨어지면 촬영을 대기하고 돈이 생기면 촬영을 계속했다.
운이 없었다고 밖에 말을 할 수밖에 없지만 독립영화 <나마스테>의 주인공이 불법체류자 단속으로 파키스탄으로 강제송환 되면서 영화를 완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강산과 류재일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친구들의 자취방에 숨어 지냈다.
새벽에는 류재일과 노가대를 나가고, 다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모았다.
깡소주에 생라면 안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당시에는 영화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시련은 영화라는 예술을 하려면 감당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지냈다.
언젠가 성공하면 위대한 예술가의 무명 시절의 기억이라고 웃으면서 말하리라.
그러나 이런 소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산과 류재일은 사채업자가 보낸 추노꾼들에게 잡혀 해피머니로 압송 되었다.
그 후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해피머니에서 풀려난 류재일은 미국 뉴욕으로 유학가고 승승장구하면서 칸영화제 최연소 황금사자상을 받은 감독이 되었다.
강산은 해피머니에서 애플로 팔려가 잡부 생활을 하다가 에로영화 감독이 되었다.
‘어쨌든 그런 생활을 다시 반복 할 수는 없어’
* * *
“형님은 어떻게 됐어요?”
“나도 잘 안됐어.”
“형님은 그 방면에 발이 넓잖아요?”
“음. 최현우 감독이 말이야.”
“최현우 감독이 누군데요?”
“우리 애플하고는 작품을 하지 않았지만 <꼴려오네>, <지금 우리 할까요?> 등등 50여 편을 만든 감독이야. 우리 세계에서는 나름 중견 감독이고 나하고는 절친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야.”
“그런데요.”
“그 최현우 감독이 3,000을 달라고 그러네.”
“하... 3,000이면 업계 최고 수준 아니에요?”
“그렇지. 업계 최고 수준이지. 보통 때라면 최현우 감독 정도의 레벨은 2,500이면 서로 만족할 수 있는 금액이지.”
“그럼, 2,000에 해 달라고 다시 부탁하면 안 될까요?”
“3,000이하는 어렵대. 3,000도 나를 보고 해주는 것이라 깎아주기는 어렵다고 하더라고”
“다른 감독들은 어때요?”
“이은용, 김응순, 최영수 등등 다른 감독들에게도 전화를 돌려 봤지.”
“돌려 봤는데요?”
“나하고 작품 이야기를 잘하다가 애플 작품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를 끊더라고.”
“왜 그러는 건데요?”
“소문이 퍼지고 있나 봐”
“무슨 소문요?”
“박두철 감독 이야기 말이야. 박감독이 이사장 때문에 잠수 타서 애플이 곤란하게 됐다고”
“벌써요?”
“박두철 감독이 잠수를 탄 지 벌써 4일째야. 소문이 날 시간이 되었지. 그런데 소문 내용이 안 좋잖아. 이사장 손버릇 말이야.”
“......”
“갈수록 더 어려워질지 몰라. 가재는 게 편이라고, 이 동네 감독들은 다 박감독 편이라고 봐도 될 거야.”
“......”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돈을 파격적으로 주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할 거야. 그나마 최현우 감독이 나를 보고 하겠다고 나서는 거지”
최철수는 절친인 최현우 감독을 밀고 있다.
마침 일거리가 없어 쉬고 있는 최현우 감독에게 3000을 부르면 2500 정도로 이덕배 사장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일이 잘 되면 소개비로 100을 받기로 하고.
그런데 이덕배는 이 상황에서도 주판, 아니 계산기를 돌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떤 결정이든 빨리 결정해야 하지 않겠어. 다른 제작사에서 작품을 사오든, 감독을 구해서 만들든”
“형님. 그걸 누가 몰라서 그래요. 제가 돈이 없어서 그러지요. 돈이 있으면 내가 이 꼴을 보고 있겠어요. 바로 결정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무튼, 시간이 갈수록 더 안 좋아질 거야. 작품비나 제작비가 지금도 올라가고 있으니까”
“그럼, 형님이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은요?”
“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최현우 감독이 낫지 않겠어?”
“최현우 감독은 빼고요. 다른 거요?”
“그렇다면 아무래도...”
“아무래도”
“아무래도 박두철 감독이 돌아오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
“박두철...”
“그런데 말이야. 박두철 감독이 순순히 돌아오겠어?”
“형님. 박두철이 돌아오지 않으면, 돌아오게 만들어야지요.”
“안 돼!”
“뭐가요?”
“아무튼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