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강산: 이렇게 끝나는 건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뭐라고요?”
- 하수연이가 강산이, 네 딸이라고.
“형...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영란이 딸이라면서요. 영란이는 최현철하고 결혼했잖아요. 그럼 하수연은 최현철이 딸이잖아요.”
- 휴우... 하수연하고 최현철은 피가 다르단다. 혈액형이 달라서 최현철은 절대로 친아버지가 될 수 없대.
“......”
- 사춘기 때 알았단다. 자기 혈액형이 아버지 최현철과 어머니 하영란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래. 그래서 한동안 방황했다고 하더라.
“......”
- 하수연이가 자기 어머니 하영란에게 친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봐도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듣고 있냐?
“네... 듣고 있어요.”
- 2년 전에 하영란이가 암으로 죽었대.
“여, 영란이가 죽었어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일전에 하수연에게 고희윤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 고희윤이 어머니의 친구라고 했었다.
고희윤은 하영란과 절친 사이고,
그래서 고희윤이 자신에게 하수연을 잘 부탁한다고 했구나.
- 그래. 영란이가 죽은 후에 유품을 정리하다 자기에게 남겨준 편지에 강산이 네가 친아버지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하수연이 강산이 너를 찾았다고 하고... 네가 영화감독이라는 것을 알고, 배우가 되려고 공부했다고 하더라.
“형...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한데요. 말이 안 되는 말이에요.”
-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시간이 안 맞아요.”
- 무슨 시간?
“하수연 나이하고 저하고 시간이 안 맞아요.”
- 뭐가 안 맞는데.
“나하고 하영란과 헤어진 것은 1999년이에요. 하수연이 내 딸이라면 00년생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수연은 02년생이에요.”
- 아, 그거... 프로필은 출생년도를 2년 줄인 거래. 하영란이가 너와 헤어질 때 임신 3개월이었다고 하더라.
“......”
강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영란이 강산을 떠나갈 때 임신 3개월이었다니?
강산은 하영란이 임신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자신에게 딸이 있다는 것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수연은 자신이 딸인 줄 모르는 친아버지 강산을 돕기 위해, 영화 제작비를 몰래 지원하고 영화에도 출연하려고 나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산은 하수연이 자기 딸인 줄도 모르고,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하수연에게 노출연기에 집중하라고 혼내고, 연기라는 이름으로 남성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인가?
“그럼, 최현철하고 하수연이 둘이 같이 살고 있는 거예요?”
- 그럼. 부녀가 같이 살지. 따로 사냐? 그건 왜 물어.
“아뇨. 최현철이... 잘해 주었데요?”
- 뭘 말이야. 너 혹시 이상한 상상하는 거 아니야?
“......”
- 최현철이 하영란하고 하수연을 학대하고 막 이상한 짓 하는 거. 혹시 너 그런 거 상상하는 거야
“아니에요. 아는 대로만 말해 주세요.”
- 자식... 안타깝지만 최현철은 착한 남편, 좋은 아빠였다고 하더라.
“최현철이 그 자식, 학교 다닐 때 유명한 카사노바였잖아요. 나이도 어린놈이 까져 가지고 술집에, 룸살롱에, 차도 외제차에 여자들도 자주 바꾸고...”
- 야! 아무리 미워도 선배인데 선배한테 어린놈이라니.
“형. 형도 그랬잖아요.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 그때는 어렸을 때고
“지금은요?”
- 여전히 싸가지가 없지
“형도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 아무튼 하영란하고 결혼하고부터 가정적인 남자로 바뀌었다고 하더라고. 영란이가 수연이, 최지희를 낳고는 몸이 약해져서 많이 아팠다고 하고. 수연이 말로는 어머니를 집에서보다 병원에서 본 기억이 많았다고 하니까.
“형. 사람 안 바뀌어요. 겉으로는 가정적인 척 하고 몰래 바람피우고 있었는지도 모르잖아요.”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최현철은 영란이가 죽을 때까지 한 여자 영란이 곁을 지켰다고 하더라. 그런데 너는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지금도 방황하고 있잖아.
“다. 운명이죠...”
이제야 알겠다.
고소는 하수연이 아니라 최현철이 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최현철은 절대로 고소를 취하하지 않겠지만, 강산도 최현철에게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사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하영란을 원망하고, 최현철을 미워하며 살아왔다.
최현철에게 고소를 취하해 달라는 말은 죽으면 죽었지, 죽어도 못하겠다.
- 그래. 다 운명일지도 모르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고소건 하고 메이킹 필림 말이야. 다 최현철이 화가 나서 일을 벌인 거야. 최현철이 입장에서는 귀한 딸이 머리가 찢어지고 팔이 부러졌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겠어?
감정이 복잡하다.
한 때였지만 사랑하던 하영란이 죽었다는 것, 영란이가 내 딸을 낳고 키워왔다는 것,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고소했다고 원망하던 하수연이 내 딸이라니.
분명한 것은 죽어도 최현철에게는 사과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말, 믿고 싶지 않은 말들의 연속이다.
방금 전만 해도 박형수에 대한 배신감으로 화가 나 있었다.
형수 형과 통화하고 난 지금은 자신이 쓰레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친 딸의 부상을 두고 건강을 걱정하기보다, 고소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거나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더 이상 박형수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강산은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박형수는 강산이 전화를 끊은 줄도 모르고 말을 계속했다.
- 하수연이 최현철에게 네 고소를 취소해 달라고 설득하고 있다고 하더라. 최현철도 네가 사과하면 고소를 취하해 주겠다고 나한테 전해달라고 말하고. 강산이 네가 이제까지 최현철을 오죽 까댔으면 그러겠냐. 취하해 주겠다고 해서 내가 메이킹필림을 경찰에게 준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잘 될 거야.
* * *
강산은 흐르는 강물, 아니 한강의 지류 하천을 바라보았다.
주위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벤치에 놓인 녹색 소주병들은 빈 병이 되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빈병이 된지 오래 되었을 것이다.
술이 약한 강산은 술기운을 빌어서 큰 결심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술 한 병, 두 병을 다 마셨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강산은 하천으로 다가가 손을 담가 보았다.
“아차차!”
강산은 생각보다 차가운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물에서 손을 빼냈다.
지금 물에 들어갔다가는 너무 춥겠다.
추울 정도가 아니라 뼛속까지 시릴 거 같았다.
옛말에 얼어 죽은 귀신은 저승에서도 냉골 신세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일기예보 아나운서가 오늘은 근래 들어 유난히 차가울 거라고 한 것 같다.
기왕에 죽기로 결심한 거지만 오늘은 말고 다음에 죽자.
굳이 추운 날을 골라서 죽을 필요는 없잖아.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날이 풀리면 그때 결심하자.
그래. 그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과감하게 뛰어 내리자.
그때, 저 쪽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꺅!”
“누가 119에 신고 좀 해주세요.”
“여보세요. 119죠. 사람이 물에 빠졌어요!”
“어머머, 이를 어째”
“누가 좀 들어가서, 빨리요. 사람 좀 구해주세요! ”
“저기요. 빨리요.”
강산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멀리서 물에 빠진 여자의 모습에 소리를 지르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도 물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았다.
누가 뛰어들까? 나 말고 누구?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고 소란만 더 커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용감하게 물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바로 강산이었다.
강산이 사람을 구하려고 일부러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경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들어간 것이다.
누군가에게 떠밀려서 들어간 것 같기도 하지만, 술에 취해서 그런지 분명하지 않다.
강산이 처음에 물에 들어가서는 중심을 잃고 물속으로 넘어졌다가 이내 곧 물속에서 일어났다.
강산은 정신을 차리고, 뭍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뭍에 있는 사람들은 물에 빠진 여자의 방향을 가리키며 강산에게 소리쳤다.
“이 쪽이 아니에요. 저쪽이에요.”
“저기요. 반대쪽이에요! 반대쪽!.”
“아저씨, 빨리 좀 가요. 빨리 좀 가라구요!”
“아저씨! 서둘러요. 떠내려가고 있잖아요.”
강산은 사람들이 말하는 반대쪽으로 가고 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름 열심히 서둘러 여자를 향해 가고 있는데 계속 더 서두르라고 다가갔다.
술이 다 깨는 것 같았다.
여자를 향해 가면서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강산이 다가가서 본 것은 사람이 아니였다.
허탈하지만 쓰러진 나무 등허리에 걸린 빨간 우비였다.
주위가 어두워진 시간이었는지, 빨간 우비를 사람으로 잘못 본 것이다.
‘사람이 아니잖아?’
강산은 빨간 우비를 들고, 흔들며 뭍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사람이 아니에요! 우비에요. 우비!”
강산이 우비를 흔들며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치자, 뭍에 있던 사람들도 이내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두 흩어진 뒤에도 강산은 빨간 우비를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뭍으로 돌아가야 한다.
강산은 긴장이 풀렸는지, 술기운이 확 올라왔다.
그런데 돌아가야 할 길이 제법 멀다.
강산은 뭍을 향해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발을 헛디뎌 쓰러지고 말았다.
물속에서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쳤다.
구덩이가 깊은 곳이었는지,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어, 어’
갑자기, 강산의 기관지와 폐로 많은 물이 들어와 기도를 막았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발도 땅을 딛지 못하고 물속을 헤매고 있다.
강산은 숨을 쉬려고 시도했지만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다.
“커컥... 컥, 젠장 이렇게 끝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