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고희윤: 여배우는 건들지 마.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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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씬은 세면장 씬이다.
소연이 세면장에서 몸을 씻은 후, 자신의 감정을 결정한다.
강산은 청수장 407호의 기존 화장실에서 촬영을 하려고 했었지만 카메라 동선이 좋지 않아 별도로 세트를 따로 만들었다.
세트장에는 하수연만 남았다.
서윤호는 이번 씬에 출연하지 않기 때문에 먼저 퇴근했다.
이번 세면장 씬은 나중에 조금은 짙은 블루톤으로 후보정을 할 생각이다.
이전 장면인 청수장 407호의 짙은 녹색 벽지와 어두운 분위기로 보정하면 대조적인 느낌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모든 장치들은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계산된 것이다.
* * *
‘솨~’
소연이 세면장의 샤워기에 꼭지를 틀자, 뜨거운 물이 소연의 머리위로 떨어진다.
잠시 후, 하얀 수증기가 올라와서 소연의 몸매를 가렸다.
젊은 여자가 목욕하는 장면은 전형적이지만 관객들의 호기심과 은밀한 욕망을 자극한다.
성인영화는 남자 관객들의 욕망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소연의 물에 젖은 어깨와 가슴 속살이 지나가듯 노출하면서 소연의 매끈한 피부와 가녀린 몸매가 부각하는 장면을 찍고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소연이 샤워하는 장면과 윤기가 TV를 보며 손가락을 떠는 장면을 교차 편집해서 관객들에게 불안한 감정을 고조시킬 것이다.
소연은 샤워를 마치고 난 후, 소연은 큰 수건으로 소연의 가슴아래를 감추고 거울에 낀 수증기를 손으로 닦아낸다.
거울 앞에 선 소연은 거울 속의 소연과 시선을 마주친다. 카메라는 거울을 보는 소연과 거울에 비친 소연이 대화를 하듯이 비췄다.
“그래. 더 이상 피할 수 없어.”
소연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물방울이 등 뒤로 떨어진다.
카메라는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따라 소연의 등과 허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소연의 뒷모습을 비추다 멀어진다.
“OK. 오늘은 이만 마치고 내일 아침 아홉시에 뵙겠습니다.”
* * *
다음 씬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이 씬은 윤기와 소연이 나누는 정사 장면이자 격투 장면이다.
강산은 두 배우들에게 실제로 때리고 맞는 것처럼 연기해 달라고 했다.
특히 하수연에게는 윤기가 소연을 벽으로 밀치거나 침대에 던져질 때는 실제처럼 나뒹군다는 느낌으로 연기해 달라고 했다.
참고로 <300: 제국의 부활>에서 페르시아의 아르테미시아(에바 그린 분)가 그리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설리반 스탭플턴 분) 장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배위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격렬한 정사 씬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서윤호와 하수연은 서로 어떻게 움직이고 반응할 것인지를 상의했다.
“내가 수연씨를 벽으로 밀치고 잠시 있다가 내가 다시 수연씨를 침대로 던지고 연기하다가 수연씨가 뒤로 돌아서 내 뺨을 때리고, 나를 침대 위로 밀치면 나는 침대에 누워있으면 끝이에요.”
“동선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에요. 동선도 외워야 하고 대사도 틀리지 말아야 하죠.”
“그리고 감정도 실어야 하지요.”
“윤호씨는 대사도 많은데 다 외웠어요?”
“외우긴 다 외웠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모두 다 잘될 거예요. 우리 서로 힘내고 한 번에 끝내요.”
“네. 수연씨도 힘내요.”
서윤호는 조금씩 움직이면서 굳어진 몸을 예열하고, 하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동선과 대사를 연습하고 있다.
강산은 이번 장면이 쉽게 촬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연과 서윤호는 연기경험이 많지 않은 신인 배우다. 연기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도 쉽지 않은 씬이다.
강산은 하수연과 서윤기를 불러 움직이는 동선과 대사에 따른 윤기와 소연의 감정을 이야기했다.
“이번 장면이 쉽지 않다는 알고 있죠?”
“네”
“나도 한두 번에 끝나기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촬영은 30분 뒤에 시작할 테니까 잘 준비해 주세요.”
강산은 스텝들에게 사전에 지시했던 것들 카메라의 위치와 조명, 미술을 확인했다.
강산은 청수장 씬을 원 컷, 원 씬으로 보이게 하고 싶었다.
실제는 4 씬으로 나누어 촬영하지만 편집을 통해 원 씬으로 만들 예정이다.
소연이 청수장 407호에 들어와 담배를 피우는 장면,
세면장에서 소연이 목욕하고 거울을 보는 장면,
윤기가 407호에서 소연에게 나쁜 짓을 하는 장면,
용한이 돌아서고 소연이 혼자 남아 우는 장면.
강산은 박형수 촬영감독에게는 카메라를 넣을 때와 뺄 때, 인 앤 아웃장면들을 상의하고, 이호철 조명감독과는 하수연과 서윤호의 얼굴에 비치는 조명의 량과 색깔을 상의했다.
마지막으로 세트장을 살펴보며 이상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청수장 407호의 벽은 어두운 블루 바탕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박성희 미술감독의 작품이다.
강산 감독에게 기성벽지들을 보여줬는데, 강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박성희가 직접 프린트해서 만든 것이다.
이 벽지들은 박찬옥 감독의 영화 <올드 보이즈>에 나오는 배경을 오마주한 것이다.
강산은 카메라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세트 벽 일부를 허물었다.
카메라의 화각을 확보하기 위해 세트 벽을 부수거나 늘리는 작업을 ‘덴깡’이라고 한다.
세트의 일부를 떼어내서라도 화각을 확보해 인물을 찍는 게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강산은 촬영 순서를 고민했다.
용한이 소연을 찾아다니다가 윤기와 소연이 함께 있는 장면을 발견하고 돌아서는 장면을 먼저 촬영하는 것이 좋을 지,
아니면 시간 순서대로 소연과 윤기의 정사 씬 장면을 촬영한 후, 용한에게 들키는 장면을 나중에 촬영할지를 고민했다.
시간 순서대로 찍는다면 혼자 남겨진 소연의 감정을 하수연 배우가 표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강산의 고민은 소연과 윤기의 정사 씬이 쉽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용한이 등장하는 장면을 먼저 찍어 놓으면 배우들이 집중하는데 더 좋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결국 강산은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기로 결정했다.
강산은 대화를 하고 있는 서윤호와 하수연을 보았다.
하수연과 서윤호는 시나리오의 설정 상에는 어린 시절부터 오랜 인연이 있었지만 사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연기도 하수연 위주로 두 달 전에 몰아서 찍었다.
윤기가 출연하는 장면은 자전거를 타고 둘이 데이트 하는 씬과 소연이 윤기의 엄마에게 버림을 받을 때 몰래 지켜보는 씬, 소연과 사랑을 하는 씬 등 많지 않았다.
소연과 윤기가 사랑을 나누는 씬은 두 사람이 고등학생이라는 설정에서 노골적인 장면은 피하려고 했다.
서로 포옹을 하는 씬, 키스를 하는 씬,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씬, 모델에서 나오는 씬들은 조명과 구도를 위주로 사진을 찍듯이 촬영했다.
그래도 성인영화라는 장르적인 클리셰로 윤기가 소연의 가슴을 애무하고 키스하는 장면은 하수연의 가슴과 비슷한 가슴 대역 배우를 기용했다.
바스트 샷을 위주로 서윤호와 하수연의 상반신을 촬영하고, 윤기가 소연의 가슴을 애무하는 장면은 대역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이번 씬에서는 대역을 사용하기 곤란한 장면이 많아서 대역 없이 촬영하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두 배우의 얼굴에 전에 없는 긴장감이 돌았다.
강산은 서윤호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간단하게 몸을 풀고 있는 서윤호에게 다가가 농담을 걸었다.
“윤기씨. 준비를 많이 했나 봐요.”
“아닙니다. 감독님.”
“식스펙이 훌륭한데요.”
“네...”
서윤호는 강산의 말에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었다.
서윤호는 이번 촬영을 위해 이 주간 방울토마토와 닭 가슴살만 먹으며 몸매를 만들었다.
촬영 이틀 전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야 근육이 붙는다고 소속사 선배가 가르쳐 주었다.
하수연도 마찬가지다.
3주전부터 몸매를 관리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서 11자 복근을 만들었다.
강산은 하수연과 서윤호를 불러서 스토리보드를 보여주면서 동작과 시선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촬영할 테니, 너희들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말이다.
* * *
어제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라면 이런 전화는 받지 않는데, 이번에는 받아야할 전화 같았다.
그동안 신용불량자로 사느라 예전에 알고 지내던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많이 잃었다.
“여보세요.”
“강산 감독님, 핸드폰인가요?”
“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강산 오빠. 나 고희윤이야. 고희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박형수 선배에게 오빠 전화번호를 물어봤죠.”
“그래. 대 고희윤 배우님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를 주시는가요?”
“지난번에는 바빠서 촬영이 끝나자마자 떠나서 미안해요.”
강산은 고희윤이 전화하는 것도, 사과하는 것도 어색했다.
“미안은 뭘, 천하에 대 고희윤 배우님이 미천한 소인의 영화에 출연만 해주셔도 감사하지”
“오빠도 참, 이제 그만 하지.”
고희윤의 말이 날카로워진다.
어린 시절에도 강산은 고희윤의 이런 카리스마에 기가 죽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하려고 이 밤중에 전화했냐?”
“어머, 지금이 늦은 시간이에요. 12시 밖에 안됐는데”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네 맘대로 구나. 네게는 12시가 초저녁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한밤중이야.”
“이제야 촬영이 끝나서 그래요. 미안해요.”
“너도 나이를 먹은 거 같다. 평생 안하던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왜 그래요? 오빠. 사람 이상한 사람 만들고. 나, 예전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사과 많이 했어요.”
“그래. 네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랬겠지. 나한테는 미안하다는 그런 말 한 마디도 안했잖아.”
“오빠. 왜 또 옛날이야기는 꺼내고 그래요. 10년 만에 전화하는 건데 예전처럼 싸우다 끝낼 거예요.”
“알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말싸움이나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최지희 말이에요.”
“누구?”
“나하고 같이 연기했던 배우 있잖아요.”
“그러니까 누구?”
“그 눈이 크고 보조개가 예쁜 주연배우?”
“하수연?”
“맞다. 하수연!”
“그 친구는 왜?”
“잘 부탁한다고요. 오빠가 잘 지도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전화 끊자.”
“예전처럼 여배우 손대지 말고요.”
“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오빠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들하고 오빠하고 그런 소문이 많았잖아요.”
“하... 참. 이 밤중에 전화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왜 하배우 신경 쓰냐? 그리고 나도 총각이고 걔도 결혼 안한 처녀인데, 왜 안 돼?”
“오빠. 나이를 생각하세요. 나이. 올해 쉰이 아니세요?”
“너. 이 말 하려고 이 밤중에 전화했냐? 여배우 건들지 말라고.”
“아무튼, 오빠. 걔는 건들지 마세요. 딸 같은 애잖아요.”
“야! 고희윤, 네가 전화하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만 네 전화를 받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왜요. 아무리 나한테 화났다고, 그 화를 딸 같은 애한테 풀어요. 오빠 아직도 나 못 잊었어요?”
“끊어!”
“왜 그래요. 오빠. 아직도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마음대로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화를 내고 그래요.”
“끄응... 좋게 말할 때 전화 끊어라. 옛날 기억 생각나게 하지 말고.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다.”
“오빠는 아직도 젊네요. 저는 이제 다 잊었는데 말이에요. 남자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요. 오빠도 포함해서. 난 요즘 딸아이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 아이 키우는 재미에 살아요.”
“그래 알았다. 딸 잘 키워라. 이제 전화 끊어라. 나는 네 수다를 들어줄 여유가 없다.”
“오빠. 제 딸 사진 보내 줄까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전화 끊어라. 내가 네 딸아이 사진을 봐서 뭐하냐? 그리고 너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몰라. 나 에로영화감독이야. 에로영화”
“에로영화감독이 어때서요? 오빠는 아직도 그 지긋 지긋한 열등감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어요. 그거 병이에요. 병.”
“알았다. 그만하자. 나 피곤하다. 잠 좀 자야겠다.”
“누가 오빠보고 뭐래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자신감. 천하에 고희윤이 사랑한 남자잖아요.”
“희윤아. 나 먼저 끊는다. 잘 자라. 그리고 나 여배우 안 건드린 지 오래됐다.”
“오빠! 잠깐,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