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이병수: 처음 본 것처럼 연기해 줘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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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윤의 카메오가 불씨를 붙였다면, 이병수의 출연은 촬영장 분위기를 뜨겁게 끌어올렸다.
이병수의 스케줄상 열흘 안에 예정된 촬영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스텝들뿐만 아니라 출연 배우들도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했다.
중섭이 소연과 룸싸롱에서 만나는 씬. 룸싸롱에서 소연을 구해내는 씬. 소연과 별장에서 사랑을 나누는 씬. 별거하던 아내에게 소연과의 관계를 들키고 헤어지게 되는 씬.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씬 들을 촬영했다.
기대했던 대로 이병수의 연기는 만족스러웠다.
이병수는 자기만 연기하지 않고 상대역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앙상블을 만들어 낸다.
그만큼 연기를 잘한다는 말이다.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김은경(양은옥 분)에게 중섭이 용서를 비는 씬에서 이병수가 보여준 연기는 그 동안 이병수에게 쉽게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연기였다.
평소 이병수는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과 중저음의 목소리로 상대를 압도하는 무겁고 진지한 이미지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병수 못지않게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장부 양은옥 배우의 기에 눌렸는지, 중섭은 아내 은경과의 잠자리에서 거시기가 서지 않아 은경에게 무시 당하고 쩔쩔매는 연기를 했다.
양은옥은 몸집(?)이 작지 않은 배우로, 한류 스타 이병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다.
막장 드라마에서 보는 돈 많고 뚱뚱한 사모님과 젊고 잘생긴 운전사 정도의 이미지다.
침대위에 큰 대자로 꽃무늬 파자마를 입고 코를 고는 양은옥의 옆에서 이병수는 새우처럼 등을 굽히고 자면서 애드립으로 우는 표정을 지었다.
양은옥에게 이불을 빼앗기고 추워서 떠는 연기는 상대 배우인 양은옥과 스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병수는 평소 이미지와 다른 바람둥이 중섭이 되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찌질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같았다.
그 중에 압권은 중섭이 아내 은경에게 용서를 구하는 씬이었다.
“한 번만 용서해주면 당신이 원하는 거, 다 해줄게”
“이혼해”
“그것 만 말고”
“이혼해”
“그것만 말고! 다른 거 말해. 내가 다, 다, 다 해준다고 했잖아”
“이혼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은경에게,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폼을 잡던 중섭은 갑자기 털썩하고 큰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쿵’하는 소리가 너무 커서 ‘NG’를 하려고 했다.
중섭은 무릎으로 기어가서 자꾸만 이혼을 요구하는 은경에게 매달렸다.
은경은 중섭을 떨치려고 발로 찼지만 중섭은 거머리처럼 은경의 다리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이병수의 연기는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터지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 * *
다음 씬은 이병수와 하수연의 노출이 필요한 장면이다.
중섭이 룸살롱 <블루>에서 일하던 소연의 선금을 갚아주고,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와서 중섭과 소연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 중섭은 소연과 사랑을 나누고, 소연은 자기 집을 찾은 것 같은 편안한 감정을 느낀다. -
강산은 이병수와 하수연에게 두 배우가 연기하는 동선을 정해 주면서, 카메라가 두 배우를 어떻게 잡을 것 인지를 설명했다.
이병수는 자신이 연기할 장면을 혼자서 리허설 하다가, 촬영장 구석에서 푸시업을 시작했다.
이병수처럼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하는 배우도 베드신을 촬영할 때는 벼락 공부를 하듯이 푸시업을 했다.
촬영 전에 푸시업을 하면 근육을 돋보이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 회복되므로 틈틈이 반복해서 근육의 긴장을 올려줘야 한다.
이병수는 자신을 보고 있는 하수연에게 농담을 건다.
“수연씨. 지금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거예요. 나중에 촬영할 때 처음 본 것처럼 연기해줘요.”
* * *
별장의 거실, 중섭은 가죽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중섭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이층의 계단에서 붉은 가운을 입고 자신을 보고 있는 소연을 발견한다.
카메라는 오버 더 숄더 샷(over the shoulder shot)으로 중섭의 등 뒤에서 소연을 바라본다.
조금 긴장한 듯 소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있다.
카메라는 중섭의 등 뒤에서 소연을 보다가 다시 소연이 계단에서 내려와 거실에 서자, 소연의 뒤에서 붉은 가운을 입은 소연의 뒤태와 중섭의 얼굴을 비춘다.
강산은 하수연의 몸매를 콜라병처럼 보여주려고, 뒤태 전문 대역 배우를 사용할까 고민했다.
하수연은 강산의 지시대로 몸무게를 50키로 까지 올려왔지만 전체적인 비율은 강산이 기대한 몸매보다는 조금 부족했다.
그러나 이 장면 외에도 계속적으로 나올 하수연의 노출 장면이 부담이다.
그때마다 대역 배우를 사용하면 하수연의 몸매와 대역 배우의 몸매가 자연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강산은 하수연의 뒤태에 조명과 카메라의 기술을 사용해서 소연의 몸매가 좀 더 굴곡지게 보이게 만들었다.
하수연의 몸매는 조금 마른 편이지만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산이 원하는 것은 섹시함이다.
청순한 이미지와는 다른, 남성들을 자극할 만한 여성으로서의 관능미는 부족하다.
영화 <타짜>의 이대 나온 여자가 보여줬던 도발적이고 섹시한 관능미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수연은 남자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강산은 하수연에게 에로배우 출신 포즈 전문 코치를 붙여 줄 까도 고민했다.
너무 프로처럼 보이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섹시 전문 코치는 포기했다.
오히려 하수연이 조금은 주저하고 서툰 모습이, 관객들을 보호 본능을 자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섹시 전문코치 대신 이병수에게 하수연을 잘 리드해 달라고 부탁했다.
카메라는 소연의 굴곡진 뒤태를 비추다가, 소연의 왼쪽 어깨라인에서 허리라인과 쭉 뻗은 다리까지 천천히 내려간다.
다리까지 내려갔을 때 붉은 가운이 '툭'하고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섭의 부드러운 눈빛과 거부할 수 없는 저음의 목소리.
“여기로 와요.”
카메라는 중섭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다가, 소연이 중섭에게 걸어가 중섭의 무릎 위에 올라가 앉는 모습을 잡았다.
중섭과 소연은 잠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격정적인 키스를 하고 농도 짙은 애무를 하면서 거친 호흡을 내뱉는다.
중섭은 소연을 껴안듯이 소파에서 일어나 2층에 있는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컷. OK요. 다음은 2층 침대 씬입니다. 스텝들은 빨리 세팅해 주세요.”
강산이 OK를 외치자, 이병수와 하수연이 모니터로 와서 촬영 장면을 확인했다.
소연이 중섭의 무릎 위에 앉는 장면에서 아주 잠시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주 잠깐 짧은 순간이었지만 천하의 이병수가 신인 배우인 하수연의 기세에 눌리는 것이다.
“강감독님. 한 번만 더 가시죠.”
“전 이 장면이 더 좋은데요. 이 모습이 중섭의 성격과 더 맞을 것 같아요. 이배우님, 아까부터 매니저님이 시간이 없다고 재촉하는데 다음 씬 가시죠. 이 씬이 이 배우님하고 마지막입니다.”
다음 장면들은 컷 바이 컷 편집 기법을 사용할 생각이다.
이병수에게 시간만 더 있었다면 미장센처럼 원 컷, 원 씬으로 욕심을 냈을 것이다.
이병수의 시간도 시간이지만 하수연의 연기력을 생각하면 욕심을 줄여야 했다.
강산은 두 배우가 침대에 누워 마주 보다가 키스하는 장면에서 ‘컷’을 하고, 상의를 벗은 중섭과 소연이 서로 키스하고 애무하는 장면에서 ‘컷’을 했다.
두 배우의 얽혀져 있는 다리를 비추다가 ‘컷’을 하고, 서로 키스하고 애무하다가 중섭이 소연의 위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컷’을 하고, 정사를 마친 후 서로 등을 돌리는 장면을 촬영을 마쳤다.
컷과 컷 사이에는 짧은 페이드 아웃과 미묘한 음악을 넣을 것이다.
“컷. OK요. 오늘 촬영을 마치겠습니다.”
촬영 종료를 마치자 촬영장 안으로 장비를 정리하는 스텝들이 들어와 시끄러워졌다.
모니터로 자신의 연기를 확인한 이병수가 강산에게 말했다.
“감독님. 한 컷 정도는 더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이배우님. 정말 만족합니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촬영인데, 감독님 미련이 남지 않겠어요.”
“저는 정말 만족합니다. 이주일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대로 마치겠습니다. 감독님, 꼭 성공하세요.”
“이배우님 덕에 꼭 성공하겠습니다.”
이병수는 이주일 동안 강행군을 하듯이 촬영을 했다.
이병수와 한 약속은 열흘 정도였다. 촬영 일정이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지면서 고민이었는데 나흘이나 시간을 더 내주었다.
오늘은 이병수의 마지막 촬영이었다.
촬영이 예상보다 나흘이나 길어지면서 이병수의 매니지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이병수 매니저 최영일은 제작 부장인 김두호에게 일정을 이야기하며, 촬영을 빨리 마쳐 달라고 외압을 주었다.
사실 김두호에게 외압을 가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김두호에게 이 정도의 외압은 외압도 아니고, 오히려 이런 외압들을 막아주는 일이 김두호의 일이다.
최영일이 저쪽에서 이병수를 향해 시계를 가리키며 계속 신호를 주고 있다.
아마도 다음 스케줄이 늦어지고 있는가 싶다.
빨리 끝내라는 연기 같기도 하지만.
이병수는 지난 번에 고희윤을 욕하는 스텝들의 말을 들었는지, 사진을 요구하는 스텝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고는 마지막 인사하고 촬영장을 떠났다.
* * *
별장의 이층, 넓은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이번 씬은 중섭과 소연이 사랑을 나누고 다음 날 아침이다.
소연은 화장대 위에 있는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붉은 립스틱을 입술에 바르고 있다.
입술을 ‘쪽’ ‘쪽’ 하고 모으면서 화장 상태를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콧소리로 허밍을 한다.
저 멀리 안방에는 중섭의 등을 지고 잠을 자고 있다.
이 장면의 중섭은 이병수가 아니라 대역이다.
스케줄이 맞지 않는 이병수 대신 몸매가 비슷한 대역을 섭외해서 연기하게 했다. 대역은 뒷모습만 나올 것이다.
중섭의 얼굴은 이병수가 미리 찍어 놓은 장면으로 편집할 예정이다.
소연은 진홍색 가운 속에 매끄러운 왼다리를 드러내고, 천천히 오른다리 위로 포개어 놓았다.
허밍을 하면서 왼다리를 조금씩 건들 거리며 발가락을 꼼지락 댄다.
이 장면에서 강산이 하수연에게 별다른 디렉션을 주지 않았다. 소연이 중섭에게서 안정을 찾은 감정을 연기해 달라고만 했다.
하수연이 애드립으로 자신이 편안해진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강산은 모니터 화면속 소연이 가볍게 다리를 흔드는 장면에서 어떤 남자들도 소연의 유혹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산과 촬영 감독, 그리고 스텝들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