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이병수: 남자는 의리다.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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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 번의 사랑>은 멜로영화이자 액션영화다.
하수연이 맡은 ‘소연’ 역은 신인 배우가 연기하기 쉽지 않은 역할이다.
먼저 이 영화 <세 번의 사랑>을 이끌어가야 한다.
주연 배우로서의 책임감을 감당해야 한다.
둘째로 세 남자를 만나는 동안, 귀여운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하는 스펙트럼이 넓은 연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인영화의 특성상 과도한 노출이 따라온다. 이 부분에 대한 결과는 하수연이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성인영화는 다른 영화보다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소비가 많다. 따라서 성인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육체적인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적 멘탈이 강해야 한다.
여배우의 노출 연기는 항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쉽게 대중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노출 전문 배우라는 이미지가 족쇄가 될 수도 있다.
배우로서 성공하려면 전략이 필요하다.
<은서>의 김은정이나 <아씨>의 김두리는 노출 연기로 먼저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다음 작품들에서는 노출이 아니라 안정된 연기력으로 인기 여배우로 자리 잡았다.
하수연은 선배 여배우들이 의도적으로 노출 연기를 선택한 것처럼, 먼저 대중들에게 인지도를 넓히려고 강산의 영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강산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 스무 살이 많은 사십 대 중년배우 이병수.
- 열 살이 더 많고 190cm에 가까운 삼십 대 중반의 유요한.
- 두 살이 어린 아이돌 출신의 미소년 서윤호.
하수연은 서로 다른 캐릭터의 남자 배우들과 같이 연기해야 한다.
연기 경력이 더 많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이병수나 유요한과 연기할 때에는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서윤호와 연기할 때는 서윤호를 리드해야 한다.
<세 번의 사랑>의 촬영 일정은 삼일 연속으로 촬영하고, 다음날 하루 쉬는 일정이다.
촬영 순서는 이병수의 스케줄 문제로, 이병수 먼저 시작하기로 했다.
한류스타이자 연기파 미남 배우로 유명한 이병수가 출연하는 성인영화,
그것도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이병수의 필모그라피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영화 <세 번의 사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감독인 강산이나 주연인 하수연이 아니다.
조역이지만 한류스타 이병수다.
제작사인 TY필림의 마케팅팀도 홍보 포인트로 이병수의 출연을 들었다.
이병수는 영화에 출연한 주연급 배우들 중에서 제일 분량이 작지만 홍보에서는 제일 비중이 클 것이다.
그리고 영화 포스터나 홍보용 영상에는 이병수가 제일 중요하게 나올 것이다. 실제로 완성된 영화를 보면 이병수의 팬들은 실망하겠지만.
이병수가 강산의 영화에 출연한 것은 영화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서나 출연료가 많아서가 아니다.
순전히 강산과의 의리 때문이다.
이병수가 젊은 시절, 연예인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반인 여성들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당시 동석했던 여자들 중의 한 여자가 이병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협박을 하다가 강산의 도움으로 해결한 적이 있었다.
이병수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가 강산의 이번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것이다.
강산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 * *
이병수가 처음으로 촬영하는 날이다.
<세 번의 사랑>의 제작진들은 영화 홍보를 위해 크랭크인을 하는 날로 정하고, 방송과 신문 등 연예계 매체들을 불러 고사를 지냈다.
돼지머리는 태블릿 PC 화면에서 웃고 있는 돼지머리 사진으로 대신했다.
근래의 고사상에는 돼지머리 대신 돼지머리 모양의 케이크나 떡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이후, 돼지머리에 돈을 꽂아주는 관습이 사회 정서상 맞지 않는다고 사라지고 있다.
촬영은 소연(하수연 분)이 중섭(이병수 분)과 헤어지는 야외 장면부터 시작했다.
이병수의 스케줄상 야외 장면부터 먼저 촬영하고, 실내 촬영 장면들은 나중에 몰아서 촬영하기로 했다.
“씬 48. 1에 1”
연출부의 막내가 씬(Scene), 컷(Cut), 테이크(Take)를 크게 말하고는 슬레이트를 내려치고 카메라 밖으로 나갔다.
강산은 메가폰을 잡고 ‘레디 액션’을 소리쳤다.
슬레이트를 내려치는 것을 ‘딱따기’ ‘딱딱이’라고 하는데, 보통 연출부의 막내가 담당한다.
슬레이트를 치는 사람은 씬, 컷, 테이크 넘버를 최대한 빨리 말하고, 슬레이트를 치고 빠져야 한다.
이것은 값비싼 필름으로 촬영하던 시절에 필름을 아끼기 위해 생긴 전통이다.
딱딱이를 빨리 치면서 화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딱딱이 장인’ ‘딱딱이 프로’라는 말이 있다.
'딱딱이 장인'의 경지에 오르려면 마이크 쪽으로 정확하게 말하고, 슬레이트를 빨리 치고 빠져야한다.
대신, 화면에는 슬레이트가 아무런 흔들림이 없이 글자들이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
슬레이트에는 씬 넘버, 컷 넘버, 테이크 넘버가 있고 촬영이 바뀔 때마다 슬레이트의 넘버들을 새로 고쳐 쓴다.
이렇게 첫 화면에 슬레이트가 촬영된 영상은 후반기, 촬영 완료 후 영화를 편집할 때 사용된다.
슬레이트에 기록된 씬 번호와 슬레이트 소리를 기준으로 영상과 배우들의 대사를 일치시킨다.
이것을 싱크(Sync)를 맞춘다고 하고, 이것이 틀리면 싱크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촬영현장에서는 슬레이트 소리를 신호로, 감독이 스텝들의 준비상태를 확인하려고 ‘레디’하고 말하면, 녹음기사는 ‘스피드’, 촬영감독은 ‘카메라 롤링’ ‘카메라 롤’이라고 대답한다.
녹음기와 카메라가 이상 없이 잘 돌아간다는 말이다.
스텝들의 진행 상황을 확인한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배우들은 연기를 시작한다.
* * *
“레디 액션”
소연이 시골별장의 대문 밖으로 나오면서, 집안에 있는 중섭(이병수 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장면이다.
중섭은 회사가 위험해지자, 별거 하던 아내 김은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은경은 중섭과 소연이 헤어지는 조건으로 도와주겠다고 하고, 중섭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소연과 헤어지기로 했다.
중섭이 별장 2층에서 소연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장면은 잠시 후에 이어서 촬영할 예정이다.
소연은 구찌의 플라워 스카프를 머리에 쓴 채, 버버리 트랜치 코트를 입고 캐리어 가방 하나를 끌면서 별장 현관문에서 걸어오다가 대문 앞에서 멈춘다.
늦가을 배경으로 마른 잔디 위에는 빨간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들이 섞여서 뒹굴고 있다.
소연이 뒤를 돌아 별장의 2층을 보는 장면에서 소연의 뒷모습과 별장의 2층이 걸리는 각도를 맞춰 촬영하고,
지미짚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소연이 대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촬영할 예정이다.
소연은 대문 앞에서 고개를 잠시 떨구고 눈을 훔치고는 2층에서 보고 있는 중섭을 향해 인사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돌아선다.
카메라는 풀 샷에서 소연의 전신을 잡았다가, 바스트 샷으로 소연의 얼굴을 잡는다.
소연은 말을 하지 않지만, 눈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잘 계세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강산은 모니터로 소연의 연기를 보면서 ‘컷’을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소연의 애절한 표정이 강산의 마음을 울린다.
“컷. OK요. 하수연 배우님. 아주 좋아요. 한 번만 더 갈게요. 이번에는 조금 드라이하게 가 주세요.”
“네.”
강산은 OK라고 하면서 한번 더 가자고 했다.
나중에 편집할 때를 대비해서, 다른 버전을 남겨두려는 것이다.
“다시 준비하시고. 레디 액션”
이번 테이크에서 소연은 이별에 우는 순진한 소녀가 아니다.
담담한 눈으로 잠시 별장을 돌아보았다가 플라워 스카프와 커다란 선글라스에 작은 얼굴을 숨기고, 버버리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돌아선다.
강산은 잠시 여운을 즐기듯이 좀 더 기다렸다.
“컷. OK. 이제 클로즈업 샷을 딸게요. 조명 좀 다시 세팅해 주세요.”
클로즈업 샷은 인물의 얼굴을 강조하기 위해 눈, 코 부분이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촬영하는 샷이다.
하수연의 젖은 눈이 애틋하다.
* * *
이번 씬은 룸살롱 씬이다.
김소연이 박윤기와 헤어진 후, 룸살롱에서 일하다가 김중섭을 만난다는 설정이다.
룸살롱 마담 오세라 역으로 고희윤이 카메오로 출연하기로 했다.
고희윤은 한강대 연극영화과 후배로 본명은 강수현이다.
강산과는 길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사적인 인연이 있었다.
젊은 시절, 고희윤은 큰 눈망울에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로 남성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당대의 미녀배우이자 차가운 이미지의 냉미인으로 유명했다.
근래에는 영화나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않고, 명품 브랜드 CF에만 출연하고 있었다.
촬영 장소로 사용할 룸살롱은 세트로 만들지 않고 실제 룸살롱을 섭외했다.
강산이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던 다정 룸살롱의 박상무의 소개로 마침, 영업 30일 정지를 맞고 영업을 쉬고 있는 장소였다.
고희윤은 등장하자, 룸살롱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던 스텝들과 관계자들이 술렁거렸다.
고희윤은 이병수 못지않은 스타이자, 이병수보다 만나기 어려운 여배우다.
그런 고희윤이, 카메오지만 룸살롱 마담으로 출연하기 위해 세트장에 나타난 것이다.
스텝들과 오늘 촬영을 이야기하고 있던 강산은,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고희윤을 발견했다.
“오랜만입니다. 고희윤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