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11] >
지분 매각의 최종 절차는 시청 청사의 주 회의실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사실 최종 절차라고 해 봐야 결정권자의 수결이 남았을 뿐이었다.
계약상의 내용이야 이미 수차례 백작가와 상단이 조정의 과정을 걸쳐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계약상의 내용을 확인하고, 공증인들 앞에서 계약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하면 끝이었다.
공증인들은 상인 연합에서 나왔다.
타플강드에서 지목한 공증인들이었다.
도시를 팔아넘기는 자리에, 그에 반대하는 상인 연합 소속이 공증을 서는 꼴이었다.
네까짓 것들이 뭐 어쩌겠느냐, 막을 테면 막아 보라는 그러한 모욕이었다.
공증인들의 소태를 씹은 듯한 표정이 바로 그 이유였다.
백작가가 얽혔으니 공증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러한 자리에 나온 것이 가너 꼬맹이였다.
거래가 성사되면 그 결과 책임자라는 뜻이었다.
요 꼬맹이가 주도해 계약을 이뤘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백작이 삼남에게 공훈을 하나 주고자 떠먹여 주는 자리일지도 몰랐다.
시엔이야 전자인지 후자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느 쪽이건 간에 가너 디엔바가 백작가에서 퍽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기는 했다.
혹여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가문 전체가 들고일어나 그 조사와 복수를 확실히 하고자 할 정도로는.
타플강드의 목적이 거기에 있으니 상단 쪽에서 먼저 접근했을 수도 있겠고.
디엔바의 재무 인사가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다 된 계약을 허사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야 거기에 장난을 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곧 지분 매매 계약이 체결되겠지.
글쎄, 일단은 살살 약이나 올려 볼까.
시엔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부장. 상단주는 어디 갔나?”
“예?”
“못 들었나? 그 유명한 타플강드의 상단주는 어디 갔느냐고. 대륙 제일의 거부가 어찌 생겼나 한 번 볼까 했더니.”
지부장이 속으로 울컥했다.
상단주가 제 친구라도 되나?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아랫사람 찾듯이.
정작 지부장도 속으로는 상단주지 상단주님은 아니었다. 애초에 타플강드 의원이 그리 존경스러운 인물은 못 되었으니까.
“아. 그렇군. 백작가가 대리인을 내세웠으니, 타플강드도 대리인이 나서겠다는 뜻인가 봐.”
그에 가너 꼬맹이가 움찔하여 고개를 들었다.
심기가 상한 도끼눈이 시엔을 향했다.
시엔이 대답 대신 그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하긴. 도련님께서 연치가 얼마 되지 않으시니까. 대륙 제일의 거상이 직접 나서기에는 그렇겠지. 왜, 상단을 이리 크게 키운 인물이니.”
타플강드 상단주가 아직 한참 덜 자란 애송이를 상대하고 싶겠냐는 말이었다. 돌려 말했으나 가너에게는 딱 그렇게 들렸다.
가너가 귀엽게도 또 울컥했다.
“사제님. 타플강드의 상단주는 현재 와병 중이라 어쩔 수 없이 대리인이 참석한 것입니다.”
가너가 특정 어휘를 강조하며 그리 말했다.
시엔이 부러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요. 분명 며칠 전에 타플강드 본단 저택이 파괴되는 일이 있었는데, 제가 듣기로는 상단주가 요행히도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워 화를 면했다고 하던데요. 와병 중이라고요?”
와병이란 병으로 자리에 눕는다는 뜻으로, 대개는 중병으로 거동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대단히 불편한 상태를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 이봐, 지부장? 어떻게 된 거지?”
가너의 분노가 지부장을 향했다.
지부장이 진땀을 흘렸다.
저 빌어먹을 사제 놈이 또.
“그것이, 그것이…….”
“똑바로 대답해.”
“실은 상단주님께서 와병 중이신 것이 맞습니다. 상단에 악재가 될까 봐 대외적으로 알릴 것이 못 되어 모처에 요양하고 계십니다요.”
지부장이 제가 대답하고도 놀랐다.
제게 이러한 순발력이 있는 줄은 몰라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뿌듯한 답변이었다.
거기에 더해, 불안하게 공증인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들키면 안 되는 사실을 들켰다는 듯이.
상인 연합에서 나와, 못마땅히 앉아 있던 공증인들이 눈을 빛냈다. 타플강드 상단주가 아프다고?
타플강드 상단이 따로 후계 이야기가 없었던 때에 상단주가 아프다면 신용을 팍팍 떨굴 만한 호재다.
가너는 그거 봐라, 하는 눈빛으로 시엔을 보았다.
대답은 상단주가 하고 어째서 제가 으쓱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양새에 시엔이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가너의 눈빛이 한층 사나워지는 가운데, 시엔이 다시 말했다.
“본단 저택이 호화롭기가 왕가의 별장이라도 그 정도는 아니겠다 싶던데. 저택을 놔두고 굳이 다른 곳에서 요양할 이유가 있나?”
“어, 복잡한 도심보다는 한적한 자연이 병세에는 더 나은 것이라서…….”
“그것도 이상한데. 그리 심각한 이가 왜 신전이 아니라 자연에 든단 말인가? 신전에 문의하지 않았던가?”
지부장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것이 거짓말의 굴레였다.
처음부터 저는 잘 모른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상단주가 만화원을 피해 몸을 숨기는 바람에 백작가에 와병 중이라 전달했고, 지부장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사람이 본래 거짓말이 들킬 것 같으면 어떻게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려 노력하게 되어있었다.
지부장이 버벅거렸다.
왜 신전을 찾지 않았냐고? 애초에 안 아팠으니까.
그런데 대륙 제일의 거상이라는 이가 아파서 신전을 찾지 않는 것이 또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시엔이 지부장을 보고 잘 찔렀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 타플강드가 교단에 도움을 청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아프면 신관을 찾을 것이지, 어째서 미련하게 그저 누웠나?”
“그것이 말입니다요…….”
그야 시엔이 교단의 내부 소식을 전해 들을 일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듣지 못할 수밖에는 없지만…….
지부장은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시엔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이런. 상단주가 말 못 할 질병에 걸린 모양이지? 성병 종류인가? 매독, 아니 매독이야 워낙에 흔하고. 혹시 부색 증상인가?”
가너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지는 상황, 이러다 상단주를 내놓으라고 강짜라도 부리면 일이 더 복잡해졌다. 더불어 지부장의 미래도 복잡해지고.
이러한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내린 동앗줄이었다.
지부장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부색 증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 예. 사실 그렇습니다요.”
“허어. 교단에서 제발 염소는 가축으로만 키우라고 그리 당부하는데도. 쯧쯧.”
“예?”
“부색 증상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본래 염소의, 흠흠. 타플강드쯤 되는 상단의 주인이나 되어서 여인이 없을 리는 만무한데, 그러한 취향인 모양이지. 아니, 여인을 두고 짐승을. 허어.”
시엔이 징그럽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백작가의 재무 인사와 호위 기사, 병사들. 그리고 공증인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떫고 시큼한 그러한 표정.
대개 혐오와 경멸이라 하는 감정이었다.
“뭐야? 뭔데? 데먼 경, 무슨 일인가요?”
“도련님, 그것이 말입니다. 잠시.”
데먼이 가너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직 열 네살 꼬맹이가 알기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데먼 경이 생각하기에는 알 만한 나이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엑. 역겨워. 미친 거 아냐?”
가너의 평가였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지부장이 사색이 되었다.
오늘 저녁쯤이면 온 도시에 타플강드 상단주가 짐승과 붙어먹는다고, 그러다 성병까지 걸렸다는 소문이 쫙 퍼지리라.
그리고 북부 무역의 중심인 할타스의 소문은 머지않아 온 대륙으로 뻗어나가겠지.
심지어 소문은 전령보다도 빠른 법이었다.
순식간의 의회 대의원의 체면을 시궁창에 처박고 말았다. 특히나 그 체면 차리는 인물이.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의 취향이 여러가지라 하나. 흠흠. 내 이해하겠네.”
“아니, 아닙니다요. 그게 아니라.”
“의사가 말하기를 부색 증상이라며. 지부장이 그 입으로 똑똑히 말하지 않았나.”
“그게 아니라.”
“자꾸 같은 소리만 하는군? 아니면 뭔가?”
“그게 아니라…….”
“아니라면? 도련님께 거짓말이라고 했다고? 거 상단주란 인물이 도련님을 만나기가 정말로 싫었던 모양이야. 백작님이 직접 오시지 않아 그리도 체면이 상한 모양인가?”
지부장의 안색이 까맣게 죽었다.
이렇게 되면 택일이었다.
상단주가 짐승을 애호하거나.
혹은 애송이를 마주하기 싫어 꾀를 부렸거나.
그리고, 지부장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 상단주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사실은 함구하여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상단의 신용이 걸린 일이니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자를 선택하면 상단주의 체면만 상하고 만다.
그러나 후자를 선택하게 되면 백작가에게 제대로 모욕을 주는 셈이었다.
계약이 무산되는 일은 당연하고, 그 후폭풍까지 밀어닥칠 것이 뻔했다.
거기에 백작 자제를 암살해 전쟁을 일으키는 의회의 대의 역시 차질을 빚게 될 터.
지부장의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소문이 퍼지지 않게, 입만 다물게 만들 수 있다면. 공증인들은 어쩌지? 돈을 먹어야 하나? 돈만 먹고 떠들면? 상단의 이름으로 협박도 같이 하면.
하지만 백작가의 인원들은 어떻게? 계약에 좀 더 우대를 주고 입을 다물어달라 하면.
그러자 시엔이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애초에 상단주의 명예나 더럽히려고 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기꺼운 일이지만, 명예보다는 목숨을 떨구는 게 제일이 아니겠는가.
목숨과 명예를 동시에 잃게 만들면 더 좋고.
“지부장, 상단주가 많이 아픈 모양인데, 다행이 여기에 사제가 와 있지 않은가. 내 상세를 보도록 하지.”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왜, 또 절단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나? 괜찮아. 나도 사내인데, 자네 발목처럼 그걸 그렇게 싹둑 자를 수는 없지.”
당황의 연속이었다.
사제가 이제는 상단주를 직접 치료해 주겠다고 나섰다. 대체 저 사제 놈은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런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 많이 쾌유하셔서 사제님께서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쾌유라니? 거동이 안 되니 이 중요한 자리, 이 중요하고 귀한 손님과 막중한 계약을 함에도 대리인이 나오지 않았나.”
시엔이 유난히 중함을 강조했다.
지부장이 말문이 막혔다.
시엔이 쐐기를 박았다.
“명색이 성자인데 환자가 불결하다 해도 아픈 이를 두고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아, 어, 성자님이셨습니까?”
“내 말을 안 했던가? 뭐. 스스로 성자라고 칭하기가 또 영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나. 그러니 치료는 걱정하지 말고.”
아니, 저딴 놈이 성자라고? 지부장이 놀랐다.
무슨 성자가 말하기를 하대를 기본으로 사람을 깔보고, 환자의 다리를 잘라놓고는 비웃으며 복장을 뒤집어놓는단 말인가.
말은 또 얼마나 경솔한지 한 사람의 명예가 걸린 일을 툭툭 가볍게 내뱉어버리고.
그러나 성자가 먼저 호의를 보였다.
거절하는 일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지부장이 판단을 포기했다.
“그, 상단주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결국은, 시간을 끄는 수밖에는.
* * *
돌연 벽으로부터 검은 안개가 스며들었다.
거뭇한 안개가 조용히 모여들고, 이내 사람의 형상을 이뤘다. 마치 그림자가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그림자에 색이 돌았다.
색이 돈다고 해도 검은 상의와 하의에, 검은 두건을 코 위로 덮고 검은 모자를 쓴 모양이었지만.
의회의 일원에게는 전달자, 그리고 의회의 하수인 소모품들에게는 악령이라 불리는 이였다.
실제로도 그는 살아 있는 악령이었다.
반은 사람, 반은 악령이라고 하던가.
어찌 가능한 일인지는 모르지만, 능력을 쓰는 데에는 이미 익숙하여 능숙한 상태였다.
의회에게서 받은 능력이었다.
그리하여 전달자는 무적이었다.
악령은 실체가 없으니 벽과 문을 자유로이 넘나들어 가지 못하는 장소가 없다.
그런가 하면 공격을 받아 그냥 지나치니 해를 끼치지도 못했다.
반면에 그는 상대를 만지고 떠밀고 물건으로 찌르는 것이 자유자재.
그가 바로 의회가 가진 최고의 칼이었다.
마침 방의 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전달자가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단검을 닦았다.
잘 닦인 검의 면에 눈만 내어놓은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 46. 도화선 [1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