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9] >
제아무리 영민하다 한들 열네 살 꼬마 아이의 한계는 명확하다.
사람이 온갖 사람을 겪어야 그 대응 방법을 아는 법이었다.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연륜으로 쌓는 지혜를 말함이었다.
노회하다는 표현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에.
시엔이 대뜸 말하기를 너 죽을걸, 하고 말았다.
그러니 어느 쪽이건 반응을 보였어야 했다.
개소리로 치부해 무시하려면 곧장 화를 내고 이게 대체 무슨 무례냐 호통을 칠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소상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하고 흥미를 보였어야지.
그러나 가너는 황당함에 얼어붙었다.
이러면 쉽지.
시엔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민감한 말씀 드리기에 자리가 적절하지 않은데, 동행하여 설명해 드려야겠네요.”
“잠깐, 그건.”
“혹여 여정에 방해가 되는 일일까요? 사제가 동행하여 보지 말아야 할 일인가요?”
“아니, 그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도련님도 만났으니 슬슬 도시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도움을 주신다 하셨으니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어…….”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음이 곧 승낙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엔이 미리 말문을 막았다.
사제에게 보이지 못할 일을 벌일 예정이냐고 물었다. 그 누가 그렇다고 대답하랴.
그러나 말이 뉘앙스가 묘하니 그게 아니라면 동행을 해도 되겠네요, 하는 식이었다.
소년이 어어 하는 사이에 시엔이 귀족가의 행렬로 향했다. 아예 당당하게 앞장을 서는 꼴이었다.
가너가 당황하면서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는.
시엔이 행렬에 닿아 눈길에 닿는 이가 있었다.
나이 든 이가 바닥에 쓰러져 곡소리 같은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걷어차여 쓰러진 그 녀석이었다.
시엔의 시선이 빠르게 지부장을 훑었다.
손가락에 닿아 끼워진 반지를 확인하고 나서, 시엔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이런, 환자분이 있으시네. 어쩌다 다리가 이리되셨는지?”
“누, 누구신지…….”
지부장이 갑자기 행렬에 끼어든 낯선 청년을 보며 물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어딘가의 도련님 같기는 한데.
시엔이 대답 대신 손끝에서 신성을 밝혔다.
지부장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아. 사제님이십니까. 그게, 넘어지는 바람에 이리되었습니다만.”
“넘어져서 뼈가 부러졌다구요? 인체의 뼈가 여럿인데 개중 정강이뼈는 단단하여 여간해선 나가는 물건이 아닌데.”
“하하, 어쩌다 보니 말입니다요.”
“환부의 모양을 보아하니 무언가에 콱 찍힌 것이 아닌가 싶은데요. 하박 하단이면 딱 발에 차이기 좋은 위치기도 하고. 넘어져서 이리 되었다구요?”
지부장이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눈치도 없는 사제가 괜히 추궁 비슷한 것을 한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 계신 가너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발로 차 부러뜨렸다고. 그렇게 실토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시엔 옆에 가너와 기사들이 있고, 그리고 주변이 온통 디엔바의 병사들이었다.
“하하,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재수가 없어서. 많이 재수가 없으셨네.”
“예, 재수가 없었지요. 하하. 넘어진 자리에 하필 돌부리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이리 잘 닦인 도로에 돌부리가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요.”
“하긴 재수가 없으면 뭐 하필 있던 돌부리에 하필 찍힐 수도 있겠죠, 뭐. 참 재수도 없으시네. 어디 재수 없는 환자분 다리나 좀 볼까요.”
“아, 감사합니다. 그래도 영 재수가 없지는 않았나 봅니다. 하하.”
지부장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곧장 기분이 나아졌다.
할타스에는 신전이 없다. 이대로면 몇 달 고생해야 할 일이나 사제의 치료는 또 이야기가 달랐다.
그러나 그 좋아진 기분도 잠시였다.
“끄악! 으아아악!”
지부장이 죽어라 비명을 질렀다.
부목을 끌러놓은 시엔이 부러진 정강이를 우악스레 주물렀으니까.
“아. 이런. 움직이면 안 되는데. 참아 봐요.”
“아악, 헉, 허억. 사, 사제님?”
“뼛조각이 꽤 많이 나온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뼛조각은 개뿔, 아주 깔끔하게 잘 부러졌다.
사실 잘 맞대 신성만 뿜어도 금방 치료될 상세다.
그러나 손가락에 멸망한 우상 따위를 끼고 있는 값은 치러야겠지. 시엔이 부러 마주 주물러대며 부러진 뼈의 단면을 비볐다.
“으아악! 으아아악!”
“아. 움직이지 마시라니까. 엄살이 심하시네.”
“끄악, 꺽.”
고통을 이기지 못한 지부장이 눈을 까뒤집고 거품을 물었다.
“세상에. 살다가 겨우 이걸로 기절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요.”
시엔이 남들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중얼거렸다.
실상은 부러진 뼈를 일부러 갈아 바스러트리고 근육을 콱콱 쥐고 힘줄을 흔들었다.
세상 지독한 고문과 별반 다르지 않으니 재수가 좋아 혼절이었다.
늙고 육중한 몸뚱이를 보아하니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심장이 멈춰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생고문을 당한 지부장이 천하의 엄살쟁이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부장이 정신을 잃었으니 치료는 편하게 되었다.
길 한복판에서 신성 치료를 행했으니 지켜본 이 모두가 신분의 증명이 될 터다.
시엔이 지부장의 다리를 치료했다.
나중에 정신이 들고 나면 꽤 기뻐할 테지.
치료를 마친 시엔이 그리 생각했다.
* * *
가너 디엔바의 마차는 여덟 마리 말이 이끌었다.
팔두 마차. 일개 백작이 보일 물건은 아니었다.
왕실의 행차에서나 쓰는 물건이라서.
물론 재력 있는 귀족이라면 한 대 정도는 마련해 두는 물건이지만, 의전을 위한 준비물이었다.
아니면 혼례나 토벌 승전 등의 큰 행사 때, 혹은 기분 내고 싶을 때 영지에서나 한 번씩 꺼내 썼다.
이런 초호화 마차로 다른 땅에 들었다간 그 주인의 체면을 욕보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예외였다.
자유도시는 어차피 호화스러운 마차 때문에 권위가 상할 만한 주인도 없다.
거기에 대표로 나온 공자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이러한 장치로라도 위엄을 세우려는 심산이었겠지.
어쨌거나 이런 육중한 마차의 내부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좁은 편이었다.
그 차이에 있는 공간에 나무판과 양모, 양철 지지대 따위가 들어차 충격을 분산해 주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방음 역할도 톡톡히 해주고.
그러니까, 꺼내 쓰기는 부담스러워도 일단 승차감에 있어서는 이만큼 편한 마차가 없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편히 기댄 채로 가너를 바라보았다.
가너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무슨 사제가 호화스러운 마차 속에 마치 주인처럼 저리 편히 있단 말인가.
수상하기 짝이 없는 치다.
가너가 그러다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제 기사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은근한 눈길을 받은 기사가 흠흠 헛기침을 하다 입을 열었다.
“사제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말씀하세요.”
“아까의 처치를 보았습니다만. 물론 사제님께서, 물론 인명을 중시하시는 분이시니, 흠. 제가 의학에 어두우니 제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마는.”
데먼 경이라고 했던가.
기사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딱 봐도 수상한 치를 그래도 사제라고 하는 모습을 보니 제법 독실한 신앙을 가진 모양이었다.
시엔이 기사의 등을 긁어주었다.
“굳이 절단할 필요가 있었으냐구요?”
“커흠.”
기사가 의학이 어둡다고 해서 부상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기사가 다치는 일이야 훈련 중에도 비일비재하니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은 알았다.
데먼이 보기로는 고작 뼈나 좀 부러진 상처인데, 아예 그 아래를 싹둑 잘라내니 기이하다 여길 수밖에는.
시엔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럴 필요는 없었죠. 단순 골절이었는데요.”
“예?”
“도련님이 발길질에 조예가 좀 있으신 듯한데. 참 깔끔하게 부러져서 부목만 대도 한 달이면, 뭐.”
“일부러 절단하셨다는 말이십니까?”
“네. 발이 하나면 도망도 못 치겠고, 혹여 도주한다 해도 금방 붙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으음…….”
데먼이 불편한 신음을 흘렸다.
신성력을 쓰는 모습을 눈으로 보았으나 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타플강드 상단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명백히 알릴 만한 증거가 없는 상태이기는 하지만요.”
그제야 데먼 경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어떠한 음모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아라이드 왕국과 왈켄 왕국의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게 아닌가 하구요.”
데먼 경이 입을 다물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듣던 소년이 그제야 말문을 텄다.
“사제님, 할타스의 지분 매입으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 염려하시는 모양입니다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요.”
“아니요, 이미 헤라군 백작가와 합의를 보았습니다. 상인 녀석들이 제 딴에는 머리를 굴린답시고 경합을 붙이려던 모양입니다만.”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가너가 순순히 이야기를 꺼냈다.
“애초에 타플강드 상단이 할타스의 지분을 전부 갖지 아니한 탓에, 나머지 반절은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하필 그 지분이 헤라군 백작가와 거래 대기에 있었으니까요.”
빈 땅을 두고 국경을 두는 일과, 아예 맞닿아 부대끼는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두 왕국의 변경백은 이에 대해 비밀리에 합의를 하여, 도시를 동서로 나눠 가지기로 이미 이야기를 마쳤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국경을 유지하되 치안에 필요한 병력만을 파견해 관리하는 식으로.
“타플강드는 우리가 반대파 상인들을 몰아내 주길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우리 디엔바가 주둔하면 헤라군 백작의 군대 역시 올 수 있으니, 그뿐입니다.”
결국, 타플강드와 상인 연합의 다툼이 전부 헛짓거리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두 귀족이 도시를 갈라 먹기로 했으니.
한 편을 들어 이득을 보려는 시도 자체가 무용이었다.
상인 놈들이 하는 일이 뭐 이렇지.
그네들 머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도련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두 왕국의 군대가 대치하는 때에 도련님의 신병이 상하면, 그때는 좋게 말로 넘어갈 수 있겠어요? 혹 암살이 일어나고 그 범인이 상대방의 사주였다 증거를 남기고 나면요?”
귀족은 명분을 무기로 삼지만, 때로는 그에 휘둘리기도 했다.
가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제가 암살을 당한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말이었다. 가너를 호위하는 기사와 군대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사제님께서는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니 이리 오지 않았나요. 곁에 있다가 위험한 때에 막아드리려는데. 호위에 한 손이라도 보태면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자유도시에 신전이 없음은 알고 계시겠지요?”
어차피 손해 볼 것 없지 않냐는 말이었다.
가너가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례할 수 있는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신관님을 어찌 신뢰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데먼 경이 부르는 호칭에는 우려가 담겼다.
신실한 신도인 데먼 경이야 사제님께 그러한 실례는 좋지 않다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가너는 못할 말 했냐는 태도였다.
“솔직히, 사제님께서는 성함도 밝히지 않으시고, 하시는 말씀 역시 타플강드가 음모를 꾸미나 증거는 없다 하시니.”
“뭐. 이해해 주셨으면 하지만요.”
“그러니 저 역시 최소한의 증명은 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이다운 치기인지, 가너의 말이 곱지 않았다.
데먼 경이 우려섞인 눈빛을 보내나, 가너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신성은 이미 보여드렸는데. 그럼 어찌 증명을 드리면 될까요?”
“제게는 성함을 밝힐 수 없다 하셨으니, 밝힐 수 있는 분을 찾아 보증을 부탁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할타스에 신전이 없으니 저희 교구의 사제님께서 동행해 주셨습니다만.”
이것 봐라. 제법 똘똘하고 독한 녀석이네.
시엔이 소년의 평가를 상향했다.
똘똘함은 신성에 경도되어 함부로 신뢰를 보내지 않는 점에 있어서 주는 평가였다.
게다가 제 교구의 사제를 걸고 보증을 세우라니.
곧 시엔의 행동이 추후 영지의 신전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허튼짓을 하거나 거슬리면 신전의 기부금을 깎거나 그 등등의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한 점이야, 뭐.
상인의 정강이를 부러뜨리고 나서 일행에 사제가 있음에도 그대로 방치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시엔이 잠시 고민했다.
교단을 끌어들이기는 조금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이미 뷔아가 의회의 존재를 알고 교단에 알렸다. 교단의 최고위 사제들이 제국의 인장 반지를 추적하는 중이 아니던가.
끌어들이고 자시고, 이미 한배를 탄 상황이니.
가너가 이제 어쩌겠냐는 듯한, 그런 도발적인 미소를 지으며 시엔을 바라보았다.
요 꼬맹이 좀 봐라? 시엔이 결론을 내렸다.
* * *
가너가 생각하기에 참으로 뿌듯한 한 수였다.
그러나 그런 뿌듯함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시엔과 면담을 가진 영지 교구의 사제가 전달한 소식 때문이었다.
“그분의 신분을 대신 보증해 달라 하셨습니까?”
“예, 사제님.”
“외람된 말씀 드립니다만, 제가 함부로 그러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 어째서요?”
“그분께선 교단의 성자님이시니까요. 일개 사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보증해 드리겠습니까?”
< 46. 도화선 [9]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