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57화 (253/268)

< 46. 도화선 [2] >

베른닐이 용병처럼 차려입기는 했지만, 검 하나는 제 것을 차고 나왔다.

애초에 신분을 감추는 데에 풀 플레이트를 입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베른닐의 사슬갑은 용병이 차기에 또 너무 비싼 물건이었다.

합금이 아닌 통짜 미스릴 체인 메일이었으니까.

티란디스에는 이전 광산 분쟁으로 인해 미스릴이 나온다.

많은 양은 아니라 기사들이 합금이나 도금으로 쓸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베른닐은 호위 기사라서 단장급 인사들과 함께 가장 먼저 지급을 받았다.

그런 이유에서 베른닐의 검 역시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진 명검이었다. 분쟁에서 미스릴을 다루는 드워프를 덤으로 주워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 역시 베른닐의 검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한껏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던 칼잡이들이 거리를 두고 일행과 대치했다.

그 숫자가 열둘.

그에 비하면 이쪽은 파린은 전력이 못 되니 제외하고 시엔과 베른닐, 트리예 세 명뿐이었다.

그런데 왜 세 명이야?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안내인이 곁에 있었는데, 그새 줄행랑을 친 모양이었다.

고객을 두고 그렇게 도망쳐서야.

그러자 중앙에 있던 칼잡이가 건들거리며 나섰다.

“일개 용병이 쓸 검이 아닌데. 외유를 나온 도련님이신가? 경계하실 필요 없으니 그냥 가시지요.”

예의를 차린 것도, 안 차린 것도 아닌 애매한 말투였다.

덕분에 베른닐도 호통을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시엔이 혀를 찼다. 이딴 걸 호위 기사라고.

시엔이 호칭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나, 언제까지나 시엔 개인에 대한 것이었다.

시엔이 귀족임을 알고 나서도 저리 껄렁하면 단박에 감히! 따위를 외치는 것이 호위 기사의 주요한 임무가 아니던가.

그러면 시엔이 일단 만류하며 말문을 틀 터인데.

이야기에서나 하는 행동이 아니다.

실제로 상대에게 위협과 위엄을 동시에 전달하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른닐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기에, 시엔이 그냥 포기하고 마주 앞으로 나섰다.

“그냥 가라고?”

“아, 그쪽이셨나? 저쪽은 도련님이 아니라 기사였던 모양이고.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신데,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길이니 신경을 쓸 필요 없으신데.”

“감히! 도련님께 무슨 무례냐!”

베른닐이 그제야 버럭 호통을 쳤다.

“한 박자 늦었잖아.”

“아까는 좀 애매했지 말입니다.”

“내가 하나하나 타이밍까지 알려줘야 하나?”

“기사 베른닐인지 용병 베른닐인지 확실히 해 주셨으면야.”

“흠. 뭐. 그도 그렇네.”

딱히 긴장감은 없었다.

시엔은 이미 먼 과거에 정예 기사들을 상대했던 이고, 베른닐은 검위공과 그 휘하 제자들에게 오랜 시간 제대로 괴롭힘을 당했다.

검을 쥔 자세만 봐도 상대가 달인인지 아닌지는 뻔히 보였다.

그 경지에 대해서는 몰라도, 실력이 있다 없다 정도에 대해서는 그랬다.

극도로 단련된 신체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껄렁한 태도라도 달인의 몸짓에는 탄탄한 중심을 서 있었으니까.

그러나 저 칼잡이들은 그냥 건달패였다.

정돈되지 않은 자세와 흐트러진 무게 중심을 보면 제대로 된 검술을 익힌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태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칼잡이가 발끈했다.

“이봐요, 도련님. 우리도 꽤나 바쁜 사람들이라서. 어중간히 계시지 말고 비켜주시면 감사하겠는데.”

“뭐. 날 노린 게 아니라면야. 비켜줄 수도 있지.”

“흐흐, 말이 통하는 분이시군.”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이리 똑바로 오던데.”

“도련님이 아니라 그 뒤에 용무가 있어서.”

시엔이 이들과 마주친 것이 공방을 나서서였다.

당연히 등 뒤에는 제화 공방이 있었다.

“습격이야? 이 벌건 대낮에? 이 동네는 경비도 없나?”

“우리가 바로 그 경비인데, 추가 수당이 있으면 다른 일도 합니다요.”

칼잡이가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자유도시의 경비대란 결국 용병들이었다.

영주가 없으니 군대가 없다. 그냥 돈 주는 사람 밑에 있으니 하는 일이 치안 유지일 뿐, 그냥 용병질과 다름없는 꼴이었다.

그나마도 상인을 위한 치안이겠지만.

“여기가 케이즈의 공방이니까, 타플강드에서 보낸 모양이야?”

“어차피 상인 간의 일이요. 도련님은 상관없잔수. 거기다 따지자면 케이즈가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 아침에 폭발 난 거 들으셨지?”

칼잡이가 순순히 불었다.

물론 놈이 멍청해서 하는 말은 아닐 터다.

습격의 목격자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케이즈가 폭발을 의뢰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터뜨린 것은 만화원의 마법사들이었다.

그러니 무얼 어찌 조사해도 케이즈가 범인이라 할 것은 나올 턱이 없다.

그러나 할타스에서 타플강드를 공격할 세력이란 상인 연합뿐이었다.

케이즈가 그 대표이니 확실한 심증은 있겠지만.

그 복수라면 널리 알리는 것이 낫다.

그런 판단이었겠지.

시엔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타플강드 상단에서 나왔다는 말이네?”

“거참. 말귀가 어두우신가? 아직 젊으신데.”

“내가 케이즈와 조금 인연이 있어서. 이대로 모른 척 넘어가기도 좀 그런데.”

“흐흐, 이걸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실걸.”

칼잡이 대장이 검을 높이 치들었다.

뒤이어 검날에 찬연한 빛이 피어올랐다. 검극에 어린 오러가 한 뼘쯤 더 자랐다.

오러 블레이드. 소드 마스터의 징표였다.

시엔이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무슨 개나 소나 마스터야?”

“뭐요? 지금 나한테 개나 소라고.”

자세만 봐도 안다.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운 적이 없는 놈이었다. 그런 녀석이 오러 블레이드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또 같은 일이 벌써 여럿 겹쳤다.

결론은 간단했다.

“베른닐.”

“예?”

“다른 놈은 상관없고. 저건 살려 둘 거야.”

베른닐이 앞으로 검을 겨눴다.

트리예 역시 앞으로 지팡이를 내밀었다.

마스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하 웃음을 흘렸다.

“도련님께서 모르시나 본데, 이제 바로 오러 블레이드란 말씀. 내가 바로 소드 마스터, 헨켈 님이시다 이거야.”

“소드 마스터라. 마스터가 언제 죽는지 알아?”

“뭐요?”

헨켈이 얼빠진 되물음을 보냈다.

이게 아닌데 싶었으니까.

오러 블레이드를 보이면 사색이 되어 도망갈 줄이나 알았지, 싸우겠다며 나설 줄을 알았겠는가.

시엔이 키득거리며 재차 물었다.

“마스터가 언제 죽는지 아냐고.”

“그걸 내가 어찌 아요?”

“마스터는 불패지. 어지간하면 죽을 일이 없어.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쳐도 잡을 방법이 없거든.”

“그걸 아는 도련님께서.”

“그래도 방심하면 죽는 거야. 트리예.”

……에사 트리예!

입술을 달싹거리며 남몰래 주문을 외우던 트리예가 곤장 마법을 발사했다.

헨켈이 놀라 급히 외쳤다.

“마법사! 젠장! 죽여!”

어둠 화살들이 쏘아져 나갔다.

연발 주문식을 알려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벌써 익혀 쓰는 것을 보면 가르치는 보람은 있다.

헨켈의 검이 빛의 잔상을 그렸다.궤적에 베여 사라지는 어둠 화살들.

그리고 때를 맞춰 시엔의 마력이 몽창 풀렸다.

-크아아--!

헨켈의 얼굴에서 사악한 비명이 터졌다.

악령이 포효다. 버닝 신. 소사자의 악령.

개중에서도 격이 특히 높은 개체다.

진짜 마스터라면 보이지 않아도 기감으로 느끼고 피한다. 그러나 헨켈의 수준이 그렇지 않았다.

시엔이 시답잖은 소리로 주의를 끄는 동안, 악령이 제 얼굴을 감싸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시엔이 마력을 풀어내자마자 곧장 타오르니 헨켈의 얼굴이 화염에 휩싸였다.

헨켈이 얼굴을 붙잡고 바닥을 구른다.

나머지 칼잡이들이 급히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이미 베른닐이 그 앞으로 당도한 이후였다.

칼잡이가 칼을 쑥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쏘아지는 칼날. 베른닐의 허리가 비틀렸다. 뻗어진 왼손이 검면을 밀었다.

그 서슬에 휙 돌아가는 몸통.

하체가 반 박자 늦게 상체를 따랐다.

깊숙이 내민 디딤발에 회전이 실린다.

곧장 한 바퀴 돌며 검기의 잔상이 원을 그렸다. 궤적에 목이 걸리니 바닥에 둥근 것이 떨어졌다.

하늘로 치솟는 피.

으아아!

또 다른 녀석이 겁도 없이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수직과 가까우나 비스듬히 내리쫓는 일검.

그래도 검을 다룰 줄은 아는 녀석이다.

그러나 베른닐은 체계적인 검술을 제대로 익혔다.

용병의 막검 따위는 검술에 비하면 요령에 지나지 않는다.

검술은 검을 휘두를 뿐 아니라, 받아내는 방법 또한 포함된 것이기에.

베른닐이 왼손으로 제 검날 가운데를 붙잡고 비스듬히 올려 칼끝으로 공격을 받았다.

중심이 이동하며 칼끝이 내려앉는다.

붙잡은 왼손이 지레의 중심이 되고, 오른손은 깊숙이 파고들어 위로 치솟았다.

손잡이 아래 무게추는 균형 말고 타격의 용도로도 강력하다. 상대의 턱에 베른닐의 손잡이 아래 무게추가 제대로 박혔다.

곧장 턱뼈가 으스러지고 흰 것이 입에서 튀어 우수수수 하늘을 날았다.

허리를 노린 검격이 베른닐을 노렸다.

베른닐이 그대로 드러누웠다.

침대에 몸을 던지는 모양이더니, 곧장 팔을 튕겨 일어나 상대의 멱을 잡아채 끌어당겼다.

뒤이어 바닥을 훑듯 뻗어 나간 로우킥에 칼잡이의 정강이가 똑 부러지며 하체가 허공에 떠올랐다.

오러 사용자의 억센 힘이 멱을 쥔 채로 땅에 내리꽂는다. 다리보다 먼저 떨어진 머리가 구십 도로 꺾였다.

“와라!”

순식간에 세 명을 해치운 베른닐이 포효했다.

“밧산!”

“이 개자식이! 밧산을!”

꼴에 의리랍시고 칼잡이 둘의 눈이 돌아갔다.

동시에 달려드나 칭찬할 것은 기세뿐이었다.

베른닐의 검이 왼쪽의 심장을 뚫었다.

회수할 시간이 없어 검을 놓아버리고 몸을 날려 남은 놈의 허리를 들이받는다.

우당탕 엉켜 바닥을 구르다가 주먹이 몇 번 치솟으니 칼잡이의 얼굴이 피떡이 되어 축 늘어졌다.

시엔과 트리예에게 달려든 이들도 운이 나빴다.

어둠 화살이 날아 어깨에 맞으면 팔이 떨어지고 머리에 맞으면 목 아래가 바닥에 남았다.

한 놈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딱 굳은 상태였다.

시엔의 그림자 속박 주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제 그림자에서 사선으로 가시가 치솟기도 했다. 쉐도우 스토커, 그림자에 깃든 악령이 행사하는 그림자 가시였다.

창날에 스스로 몸을 던진 꼴이다.

배에 구멍이 뻥 뚫린 칼잡이가 튀어나온 내장을 쥐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남은 한 놈이 진정한 실력자였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고 곧바로 몸을 돌려 뒤를 향해 돌진했으니까.

시도는 좋았으나 상대가 나빴다.

-조심해! 오른쪽에 화살!

귓전에 쨍하니 울리는 여인의 다급한 외침.

칼잡이가 급히 왼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등을 강타하는 충격에 멀리 날아 바닥을 쭉 미끄러지며 온몸으로 쓸었다.

오른쪽이라며…….

억울함도 잠시, 고통에 꺼져가는 시야 속에 여자아이 하나가 비친다.

피눈물을 흘리나 입으로는 귀밑까지 찢어 웃는 형상.

악령, 해피 드리머가 울며 웃으며 말했다.

-히힛. 속았지?

트리예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는 왜 빗나간 어둠 화살에 몸을 던지지?

트리예가 보기에는 잘 도망가던 놈이 갑자기 몸을 던져 주문에 맞은 것으로 보였다.

“어, 어어……”

그림자 속박에 꼼짝없이 굳은 놈이 말이 되다만 소리만을 내뱉었다. 눈동자가 덜덜 떨리는 것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시도다.

술자의 수준이 높고, 피격자가 마력이든 오러든 다룰 줄 아는 기운이 없으면 눈알조차 굴릴 수가 없으니까.

베른닐이 그리 굳은 칼잡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시엔이 그 전에 지시를 내렸다.

“걔는 놔두고. 일단 마스터부터 가져와 봐. 생각보다 더 수준이 낮아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망령술은 조절이 안 되는 것이 단점이다.

베른닐이 자칭 소드 마스터를 질질질 끌어 데려왔다. 다행히 아직 숨이 붙어있기는 했다.

대가리가 홀라당 타 버리고, 눈알이 불길에 녹아 흘러내린 상태이기는 했지마는.

시엔이 곧장 신성을 일으키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익은 살이 제 색을 되찾았다.

안타깝게도 눈과 모발은 지키지 못했지만.

베른닐이 달리는 자세 그대로 우뚝 선 칼잡이를 바라보았다.

“저건 저대로 놔둡니까?”

“대장이 살았으니 피라미는 필요 없지.”

“아, 안애, 아어우…….”

입과 혀도 움직이지 않으니 속박된 칼잡이가 어어 하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대충 살려달라는 내용 같기는 하나, 정확히 듣지 못해서 확실치는 않았다.

곧, 더는 그 내용을 확인할 방법도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으니까.

< 46. 도화선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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